‘캠페인을 보면 사회가 보인다’는 사회상을 볼 수 있는 표어, 포스터, 전단 등을 전시하여
100년 간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표어, 포스터, 전단 등 캠페인 관련
자료를 보면 우리민족이 그 때 어떠한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는 기사가 눈에 띄기도 하고, 독립운동 전단이 그들의 절박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자강계몽운동,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빌려온 차관이 1300만 엔에 달해 빚더미에 올라서자,
이를 상환하여 경제적 독립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신교육 실시가 불가피하다는 교육운동은 개화운동 중에서도 일찍부터
제기된다. 그리고 근대민족교육은 을사조약 이후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되찾는 길은 장기적으로 교육을 통한 애국적 인재의 양성밖에 없다는 자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포스터를 보면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문자보급운동 교재와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소설 등이 교육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를 볼 수 있다.
브나로드운동 포스터
주권을 지키기 위한 이러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내선일체 및 황국신민화 정책을 통해 한민족말살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는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시행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자신들의 지배 하에 놓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그것을 나타내는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신민의 서사 수첩이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인고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러나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의 일체) 및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실질적인 내선일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일본도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단지 조선을 노예상태의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던 것뿐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공항으로 영국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보호무역주의의 일종인
블록경제권을 형성하여 공황에 대처해 나갔다.
당시 이 공황의 여파는 일본에 파급되어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일본은 이를 돌파하는 방안으로 아시아대륙을 침략하여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고 이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은 후방의 국민 모두를 전쟁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령을 실시하고 전시생활을 강조 캠페인을 벌이게 하였다. 그러한 생활상을 몸빼 장려 포스터, 국민정신 총동원 포스터, 금을 정부에게로 총동원 포스터, 금속 공출 장려 전단으로 알 수가 있다.
몸빼 장려 포스터
특히, 몸빼 장려 포스터는 눈에 띄었는데, 화려한 복식을 입은 여성이 몸빼를 입고 부지런히 근로하러 가는 여성을 보고 부끄러워한다는 내용의 포스터이다. 이 포스터가 만들어진 시대는 1940년대이다. 그 당시 태평양전쟁 중이던 일제는 물자절약과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간편 복장으로 남자들은 국방색 국민복 상의에 당꼬바지를 입게 하고, 여성들에게는 하의를 몸빼바지로 통일시켰다. 게다가 전쟁물자를 우리나라 국민에게서 수탈하기 위한 각종 표어, 포스터, 전단이 특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전시된 <전매>(52호, 1941년 조선전매협회 기관지)에는 “저축봉공”이라는 표어를 머리에 두른 어린 학생의 모습과 “우리들의 결의는 저축으로 보여주자“라는 표어가 보인다.
<전매> 52호
1941년 그리고 공동작업과 공출을 장려하는 포스터, 저축을 장려하는 달력, 조선간이보험 홍보 전단 등이 일제시대 말기의 공출, 저축, 채권, 보험이 모두 궁극적으로 전쟁수행을 위한 재원조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생활개선 캠페인 생활개선을 위한 표어, 포스터, 전단은 국민들의 생활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의 개선은 신생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개화기부터 다양한 이슈와 형태로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에는 봉건적 인습과 악습, 미신 등을 타파하자는 운동과 단발, 의복간소화, 색의옷 입기 같은 습속의 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색의옷 입기 캠페인은 쉽게 더러워져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실시되었다.
색의 여행(물들인 옷 입기를 힘쓰자)
일제시대가 막을 내리고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는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사회적 혼란과 많은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홍수처럼 밀려와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퇴치하기 위해 보건 위생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서로 조심하여 손님(두창)을 막자”, “폐결핵균을 박멸하자”, “선진국 수준으로 기생충을 없애자” 등 의 캠페인 슬로건을 걸고 국민생활증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6.25 전쟁 후까지 결핵은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염병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결핵퇴치사업을 강화하여 결핵퇴치를 도모하였다. 따라서 결핵협회의 크리스마스 씰 사업전개 등으로 결핵관리재원이 마련되어 엑스선촬영, 객담검사를 실시하여 환자를 발견하고, 결핵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결핵균 전파의 기회를 감소시켰다
.
결핵 예방 포스터
기생충 또한 커다란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기생충과 관련한 표어, 포스터, 전단 등이 지금도 남아있어 그 때의 상황을 말해준다.
“내 몸 위해 먹은 음식, 기생충이 다 먹는다”라는 표어부터 “기생충 박멸하여 내 건강 내가 찾자”라는
포스터까지 당시의 기생충이 국민건강에 얼마나 위험요소였는가를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생활개선 운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맹퇴치운동이다.
일제시대 농촌계몽운동, 해방 후 1950년대 중반까지 정부에 의해 행해졌던 전국문맹완전퇴치운동까지 시대마다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국문초보는 그 당시 문맹퇴치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문교부 성인교육국이 지은 국문초보는 “국문개학운동”, “배우자 우리국문, 가르치자 우리한글” 이라는 표어와 함께 한글의 자음 모음 등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간첩 침략을 분쇄하자” 부모님 세대들은 “세상에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간첩이었다.”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똘이장군”이라는 만화를 보고 공산당은 사람이 아닌 짐승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인식은 국가의 의도적인 반공 캠페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캠페인은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포스터, 표어뿐만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6.25전쟁을 거치며 반공이념은 전 국민적으로 확대, 심화되었다.
반공 포스터
그 당시 “6.25는 예고 없다. 적색침략 미리 막자”, “간첩 잡아 상금 타니 나라 좋고 나 좋다”라는 표어로 반공이념을 고취시켰고, 심지어 담뱃갑에 “간첩침략을 분쇄하자”는 표어를 넣기도 했다.
전시된 반공 표어, 포스터 전단을 보면서 다른 것들에 비해 투쟁적이고, 과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잊지 말자. 피에 젖은 6.25” 포스터와 같이 대부분 빨간색을 많이 사용해 피와 전쟁을 연상하게 하였다.
6.25전쟁 전후의 남측과 북측의 표어와 포스터를 보면 그 당시 이념대립의 양상을 살펴볼 수가 있다.
남측에서는 “시간의 자유로운 사용도 민주주의의 한 특징이다”라며 자유, 민주주의를 홍보한 반면,
북측에서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퍼트렸다.
달력, 1963년
그리고 이런 대립은 한쪽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한쪽은 중공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그렇게 분단은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표어, 포스터, 전단, 달력 등이 뚜렷하게 보여준다.
당시의 원조는 물질적인 원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유세계의 원조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반해 북측은 “중국과 조선인민의 우의를 견고히 하자”, “미국 침략자를 이기자!”라며 중국의 원조를 통해 사회주의를 공고히 했다는 것을 캠페인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1970년대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캠페인은 새마을 운동이다.
이 캠페인은 전 박정희 대통령이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를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캠페인은 초기에는 초가집 없애기, 블록 담으로 바꾸기, 마을 안길 넓히고 포장하기, 다리 놓기 등 기초적인 환경개선사업에서 시작하였다.
그 후에 생산기반사업과 소득증대로 이어졌고 농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한 성공 후에 도시, 직장, 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마을 일기와 담뱃갑
이 당시 캠페인을 전시장에서 새마을 기, 표찰, 담뱃갑 등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 노래 레코드도 눈에 띄었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는 1960년대와 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들었던 ‘새마을 노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라며 시작하는 노래는 새마을 운동이 지향하는 바를 잘 담아내고 있다
<새마을 지도자 대회>포스터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위 가사는 새마을 운동이 진행될 당시 노래의
한 부분이다. 그 당시 새마을 운동은 “하면 된다”,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목표 하에 범국민적으로 전개된 지역개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생활상과 그 사회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가 있다.
캠페인은 그것이 수행되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는데 캠페인의 수단인 표어, 포스터, 전단 등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캠페인의 새로운 방향 모색 2003년을 살아가는 현재는 일방적인 국민 계몽의 시대는 지났다.
국가가 주도하고 나서서 전개하는 구호성, 전시성 캠페인은 공동체적이고 집단적인 동원이
힘을 발휘할 사회적 구성의 틀이 변화하면서 그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캠페인은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그 형태를 달리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70년대 말까지는 거의 대부분 관 주도의 캠페인에서 80년대에는 관과 민간차원 양쪽이 수행해 오다
90년대 초 문민정부를 맞이하여 캠페인의 대부분이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오면서 새로운 방향 설정과 의식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과거 의식주를 대부분의 내용으로 하던 캠페인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금연, 환경, 장애인 등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이렇게 캠페인은 그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려는 하나의 지향점이고 이는 그 당시의 역사와 생활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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