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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2.11.25.주일예배<출 21:7-14. 의로운 율례-시리즈1/4.>

by 설렘심목 2012. 11. 26.

2012.11.25.주일예배<출 21:7-14. 의로운 율례-시리즈1/4.>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율법 안에 얼마나 사랑이 극진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7절과 8절은 히브리인 중 피치 못할 경제사정으로 자기 딸을 채주의 집이나 필요한 집에 팔았을 때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딸을 소실노예로 팔았는데 그 집에서 마땅치 않게 생각하여 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아 자녀가 없을 때는 그 팔려간 딸을 속인 것이 되어서 빚은 이미 갚은 것으로 하고 타인에게 되돌려 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소실로 사들이지 않고 일반 노동노예로 샀다면 그는 7년 만에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은 그 딸을 노예로 사서 아들에게 주어 소실이나 아내를 삼게 했다면 그를 딸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혹 그 여자노예를 둔 채 다른 여인과 혼인하여 외면당할지라도 소실이 된 여자노예에게는 입을 것과 먹을 것과 동침의 권한을 계속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게 안 지켜지면 그대로 자유하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수천 년 전인데 얼마나 놀라운 자비와 사랑과 공평의 법입니까?

 

 

구약시대 한시적으로 허락된 노예제도는 당시상황에 알맞는 경제정의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근본취지입니다. 아울러 노예제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균형을 유지하며 백성가운데 세워져 있는 걸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1.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섯 개의 구절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변치 않는 약속에 대한 신실성입니다. 사람은 도중에 조건따라 감정따라 말을 바꿉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계약과 그 조건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결정은 한치의 오차도 없고 따라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받을 채무조건 대신 그 집의 딸을 데려올 때 소실로 삼겠다는 약조를 했다면 어떤 경우든지 소실에게 합당한 권리를 끝까지 허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처음 약조가 소실이었다면 그는 일반 노동노예로 전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바뀐 것은 채주의 마음이지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명령이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죄에 빠져 죽어있던 인생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이미 에덴에서 가죽옷으로 시작됐습니다. 그 희생제사의 피로 시작된 예배는 훗날 성막제사로, 성막제사는 성전의 제사로, 성전의 제사는 예배당의 예배로 시대따라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게 제사의 형식은 바뀌었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창12:2절의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줄 것이며 너는 복이 될지라.”는 하나님자신의 선포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 그리고 열두 이스라엘지파로 내려오며 순종축복, 불순종멸망의 길로 지켜져 내려왔습니다.

 

인류는 절대적인 죄성과 무능속에서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오류 속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바로 걸으려 해도 비틀거리듯이 인생은 늘 회의와 실패를 거듭합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속성이 사람에게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죄성과 신실은 서로 반대편에 있습니다. 죄가 들어온 순간 신실함은 사라집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신뢰가 이 땅에 없음을 각종 규제와 법률, 그리고 형무소와 법관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계속 살피게 될 모세의 율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얼마나 인간이 말로는 이끌어가기 어려운 존재인지를 낱낱이 알게 할 것입니다.

 

 

2. 약자를 보호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첩실노예에서 보았듯이 채권자가 채무자의 딸을 노예로 데려온 후 첫 약조가 이뤄지지 않으면 이는 이미 채권이 다한 것으로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빚을 갚았으니 자유롭게 하라는 겁니다.

 

죄의 노예로 묶여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들여 자유케 하셨으니 우리는 변변치 못해도 구원의 약조는 불변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언제나 약자 편에 서계신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를 보고 계시고 고통 중에 있는 자를 보시고 좌절 중에 있는 자를 보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낮추어 히브리인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절대무능을 고백하는 시간부터 임마누엘은 시작됩니다.

 

 

3.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것은 결코 인간의 생명이 타인의 의해 죽임을 당해선 안된다는 생명사랑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생명에 관한 한 양보없이 명령하신 것이 죽인 자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실수로 죽였거나 하나님의 의도로 죽게 한 경우는 정한 한 곳에 도피처를 만들어 보호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실수를 위장한 자는 역시 반드시 죽이되 비록 제단에 있어도 잡아 끌어내어 죽이라는 겁니다. 14절입니다. “사람이 그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하나님의 단에 있을 때엔 법조차 강제로 집행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살인자의 경우 예외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사관과 교회나 성당은 치외법권지대로 통합니다. 경찰이 진입하지 않는 것이 사회통념상의 묵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종교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명동성당에 몇 년 전 경찰이 들어갔지요..야만인이나 할 말세의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12절에서 14절까지 살인에 관한 모세율법을 살피며 현행 사형제도 찬반에 관한 성경적 소견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살인만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일은 생명주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범죄 중 범죄입니다. 따라서 살인은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다만 오판을 어찌 최소화할 수 있는가하는 것은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악한 인간의 욕심으로 희생되는 양심수의 희생이 없어야 합니다. 더러운 정권욕에 희생되어 소리없이 사라진 많은 영혼들 앞에 무슨 말을 합니까?

 

지금 저는 저의 판단이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경을 전합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이 사람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 백성이 알고 살인을 피하도록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사형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오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형수들의 사건비화를 보면 입이 벌어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시효만료 며칠 전에 진범이 잡혀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생명을 건진 이도 있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감옥에서 또는 밧줄에 목을 걸고 죽을 뻔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형을 폐지한다면 참으로 억울하고 슬프게 터무니없이 죽어간 사람들과 또 앞으로 계속되어질 그러한 악질범죄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사형이 살인죄를 줄인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아니, 사형제도가 있든 없든 살인사건은 그것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통계도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살인죄가 얼마나 흉측하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야 할 일인지를 살인범이나 그럴 소지를 지닌 사회와 환경과 인간에게 충분하게 계몽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이제 그 방법에 대하여는 사회학자들과 법리학자와 종교인들과 기타 각계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논의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결론을 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다만 오살자는 피할 곳을 마련하라.”

 

요즘 교계일부에서는 사형제도는 유지하되 유예기간을 늘이고 살인범을 교화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형을 선고하되 그 집행은 매우 길게 유예시키거나 혹은 종신토록 미뤄 사형수는 사형이라는 부담을 가진 채 교화의 기회를 받자는 것인데 고려할 가치가 있는 소견이라 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 양심의 통증을 느낀다면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 잠시 목을 걸고 순간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칫 살아있는 자로서 남의 일을 너무 쉽게 그리고 인권이라는 명분 아래 문화인인척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사형제도의 존폐에 한 나라의 인권수준이나 문화수준이 달려있다고 보는 시각도 바르지 않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갑니다. 여인들의 무리가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따라 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아멘. 죄를 청산하며 죽는 것이 복인지 세상이라는 험악하고 외로운 감방에서 긴세월 죄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복인지 아무도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초상집에서 먼저 떠난 자를 애석해 하면서 통곡합니다. 저는 누가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간 자가 복된지, 남은 자가 복된지..모를 일입니다. 율법에도 죽은 자를 위해 살을 베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떠난 자나 남은 자가 무엇을 바라보았고 또 무엇을 바라보고 있냐는 겁니다. 사랑한다면 작은 인간가슴 안에 우주가 안겨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 하나로도 그것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천국은 우리의 영원한 노래요, 기쁨입니다. 왜 우리는 끝내 천국에 우리의 결론이 가야 합니까? 거기 영원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아름다운 동산이 있고, 노래가 있고, 그치지 않는 사랑의 고백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노예가 기쁜 노래를 부르는 거기,..

죄가 없어 살인이 없고 앙갚음과 사형이 없는 거기,..

다시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어 감동만 넘치는 거기,..

천국은 꿈이 아니라 현실가운데 가장 확실한 현실임을 믿으시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