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5:23-31. 메로스의 저주와 야엘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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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된 본문은 여선지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부르는 승전가 중 한 부분입니다. 배경을 잠시 살펴봅니다.왼손잡이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모압을 굴복시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후 여호와를 잘 섬겨 80년간 태평했습니다. 그러나 에훗이 죽자 다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악행을 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선 가나안 야빈왕의 손에 붙입니다. 가나안왕 야빈은 철병거가 900이나 있는 막강군대를 지닌 채 무자비하게 이스라엘을 짓밟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회개하며 울부짖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여선지자 드보라입니다. 이 드보라가 가나안 야빈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부르는 노래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인물이요, 복의 여인으로 높이 세운 여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오늘 설교제목에 나오는 야엘이라는 헤벨의 아내입니다. 헤벨을 알려면 잠시 모세부터 거슬러 설명을 조금만 더 해야 합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이라고 하는 이드로의 친척 가운데 겐족속 헤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벨은 일찍이 유다지파 경내에 살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납달리지파 경내의 사아난님으로 거주지를 옮겨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멀어진 채 이스라엘의 압제자인 가나안 땅의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고 친밀히 지냅니다. 분명 헤벨은 민족의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의 아내 “야엘”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이끌어 내심으로 인간의 예견을 뒤집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23절의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24절의 야엘을 축복하는 매우 대조적인 장면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주제 몇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모든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작정아래 놓였다는 것입니다.
1. 우리들의 역사,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있습니다.
야엘이 남편 헤벨과 손을 잡고 친숙히 지내는 이웃나라의 중요한 인물인 군대장관 시스라를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4:18-21)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겁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며 극진히 대하던 이웃나라의 높은 지도자를 잠든 사이 관자놀이에 쇠말뚝을 박아 죽이는 건 대단한 용기와 특별한 결단이 없인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쉽지 않은 일이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드보라를 통하여 말씀하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4:9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일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이끄는 철병거군대는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바락은 웬지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해서 드보라가 그럼 함께 갑시다. 이번 일은 이미 여호와께서 이긴다고 말씀하신 전쟁이오. 그러나 적장 시스라의 목을 베는 일은 당신이 아니라 어떤 여인의 손에 의해 일어나 영광을 얻을 것이오 라고 예언합니다. 그 여인이 바로 오늘 본문 전체에서 언급되고 있는 복있는 여인 야엘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편과 함께 온 가족이 민족을 등지고 민족의 압제자들과 친하게 지내던 중 그 적장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뤄낼 수 없는 역사의 주권적 행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인의 역사가 알고보면 하나님의 손에 꽉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약속안에서 이루시는 일들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예고하신다는 것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주로 선지자나 사사, 그리고 제사장들을 통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오늘날 은혜의 시대엔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택함받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그러한 예언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진리없이, 구원없이, 소망없이, 예언없이 죄속에 살다가 죄속에 죽어서 지옥심판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이 중요한 택정교리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9:10~1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리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이삭의 두아들 에서와 야곱, 그리고 야곱의 자녀 열두 형제들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시기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윤리안에서 해석이 안 되는 문제입니다. 이어 14절에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함으로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곧 어느 것과도 비교해서는 안되는 주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의중은 다 깨닫지 못해도 그 분이 끝내 사랑이시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택함받았다는 것입니다.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모두 자신의 몫 외에는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철저히 일대일로 내밀한 가운데 해석되고 믿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유익할 아무 것이 없는 게 신앙입니다. 하늘의 기쁨이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철저히 주관적이라면 세상의 즐거움은 상대적이고 비교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 철심을 박아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감사하는 신앙체질입니까? 옆에 사람은 죽었고 또 한사람은 식물인간된지 벌써 몇 달째라는 겁니다. 여러분. 소위 이러한 안위와 행복감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기쁨과 행복은 어디 있습니까? 어느 것과도 비교하거나 상대적으로 말할 수 없는 택함받았다는 기쁨입니다. 불신자들이 아무리 겉보기에 좋아보여도 믿음안에서 우리가 장차 취득할 것과 현재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것이요, 하나님 열어주시는 비밀가운데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내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이미 천국에 예약이 되어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인 줄 믿기 바랍니다. 굳이 비교하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들지 못해서 택함받지 못하고 결국 지옥갈 불신자들과 비교하기 바랍니다. 저렇게도 예쁜데, 저렇게도 똑똑한데, 저렇게도 잘나가는데, 저렇게도 많이 배우고 건강한데..그런데 넌 지옥이고 난 천국이라는 사실... 놀라운 영적인 각성으로 감격하는 저와 여러분되기 축복합니다.
5장23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니라.”아멘
2. 메로스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메로스는 이스르엘평지에 있는 한 고을의 이름인데 여기 살고 있던 야벳 길르앗거민들이 하나님앞에 불충한 일이 있었습니다. 야벳길르앗거민들은 시스라가 이끄는 야빈왕의 철병거군대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돕지 않은 범죄를 합니다.
메로스를 저주하시는 하나님. 메로스는 오늘 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곁에 감쪽같이 숨어있습니까? 메로스는 일신상의 영달을 위하여 몸을 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나서야 할 때 자신의 불이익을 염려하며 몸을 숨긴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대적을 더 의식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12제자 모두 메로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마져 그렇게 되었습니다. 극도의 예민한 환경에서 대부분 무너지고 맙니다. 순교란 무너져야 마땅하다고 보이는 거기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몸을 드리는 동시 영이 영화를 입는 것입니다. 몸은 잠시지만 영혼은 영원한 안식과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 순교입니다. 메로스를 거듭거듭 저주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 대적과 싸운 공적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은혜를 내리시고 각종 선물을 끊임없이 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손에 뭐가 없겠습니까? 부요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악한 것들과 이미 이기기로 작정된 싸움을 싸우실 때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고 비겁하게 숨어있던 자들을 거듭거듭 저주하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면 지체없이 일어나 도우시기 바랍니다. 명령을 받는 자는 반문하지 않습니다. 명령에 복종하기로 결단한 자는 왜 접니까? 라고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자는 늘 명령을 피해보고 싶은 자들입니다. 명령앞에서 계산하는 자들입니다. 명령권자와의 관계보다는 눈에 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 있다고 했습니까? 소유가 아니라 관계라고 했습니다.
야엘은 시스라장군이 패주하여 헐떡이며 찾아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관계의 커다란 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메로스처럼 이스라엘을 등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등지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등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이스라엘을 등지고 대적들과 친교했던 날들을 기억해냈을 겁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든 드보라를 통한 예언대로 가나안은 패했고 가나안의 장군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땅에서 벌어지는 하늘의 전투입니다. 인생이 있는 한 이 눈에 안뵈는 전투는 지속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충성할 기회가 많습니다. 야엘의 복과 메로스의 저주는 하나님이 인간 앞에 두신 두개의 길입니다. 어떤 쪽이든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전투 중 세상이 두려워 메로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야엘이 되어 누구든지 부를만한 노래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살아계신 하나님 편에 서서 생명이라도 드릴 결단으로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되시기 예수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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