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은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개념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즉 펠라기우스와 같은 도덕적인 종교가는
인간의 의지를 선용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했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같이 스스로의 노력의 한계를 깨닫고 고민하던
이들은 인간 노력의 무가치성과 함께 하나님께서만 구원하시며 구원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무력한 것을 강조해 왔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고 마귀를 따르는 일에 익숙한 노예의지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의지는
아담의 타락 이후 완전히 타락하여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자유의지라는 말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모든 결정에 자유로우시고 행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한다. 즉 인간에게는 자유의자가 없고 죄를 짓는 노예의지만 있다고 한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쓸 때에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1. 칼빈의 예정론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한다. 영생에 이를 자를 선택된(elected) 자라 부르고,
선택되지 못한 자를 버림받은(reprobated) 자라 한다.
흔히 칼빈의 이중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으로 전해지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창세 전부터 구별하여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영벌로 예정된 죄인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멸망으로 예정되었기에 멸망받기 위하여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하시며, 유기(遺棄)된 자는 그들의 악함과 강퍅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영벌에 이르게 하신다고 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⒁)
2. 절대예정에 대한
웨슬리의 반박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주장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일단 예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뿐 인간의 태도나 의지에 관계가 없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가 성경의 교훈에 맞지도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칼빈의 예정교리를 비판한다.
웨슬리는 예정론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Almighty Tyrant)으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멸망을 결정하는 신으로 묘사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죄인의 멸망이 하나님께 원인이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불변의 경륜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한다. 구원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멸망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들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니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든 멸망으로든
이미 어떤 사람의 운명이 무조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다만 자기가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만 모르는 경우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인간
편에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된다. 즉 어떤 병자의 장래가 낫든지 죽든지 어느 편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약을 먹든지 안 먹든지 살도록 또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이미 결정된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약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정론의 교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비성서적 교훈이라 한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없어서 자기는 유기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거나 또는 그러리라고 두려워하게 되면 종교적인 위안 대신 불안과 근심을 갖게 될 것이니 예정론이 주는 해라고 본다. 또한 선택의 교리에
만족하는 자 역시 그가 선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가 선택된 수에 들지 못했다면 그의 만족과 위로가 헛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되었다고 믿지만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면 불못으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헛될 수 밖에 없다.
1739년
4월 26일에 웨슬리가 뉴게이트(Newgate)에서 죄인들에게 예정과 멸망에 관한 예민한 문제를 설교하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공적 활동인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고린도전서 13장과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고 전하며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권했다. 말틴 슈미트는 이것을 가리켜, 사람의 운명이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변경할
수 없다는 칼빈의 예정론을 공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예정론에 관하여 자기
의견을 표명하고 이를 인쇄하여 분배함으로 예정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여 웨슬리와 불편한 관계가 조성된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보편적
구원의 교리에 관해 설교하며 구원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준비되어 있다는 예정론을 반박했다. 휫필드의 문서에 의한 예정론 옹호를
웨슬리가 문서로 반박한 1739년에 브리스톨(Bristol)에서 설교한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예정론은 기독교의 계시사상을 전적으로 뒤엎는 망언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모독적인 주장이라고 말했다.
3. 죄와 구원에 대한
일치된 견해
칼빈과 웨슬리가 똑같이 주장하는 바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본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데 칼빈과 웨슬리는 동의한다.
모든 선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고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free-grace of God)라는 점에서
웨슬리신학은 칼빈신학과 공통의 견해를 견지한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자기의 주장과 칼빈주의는 머리털 하나의 차이밖에 안되며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술회한다.
칭의와 성결에 관해
웨슬리의 강조를
본 당시의 교계는 그가 선행으로 성화되는 도리를 가르치는 거라고 오해했다. 이에
답하기 위해 웨슬리는 1763년에 "구원의 성서적 방법"(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를 통해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성결의
은총도 믿음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믿음만이 구원과 성결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밝힘과 동시에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으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칼빈과
대립을 보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점에서 칼빈과
차이를 보인다.
4.
하나님의 선행은총,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고 혹 거역할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라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 잃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어느 정도 회복돼 자기구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손상이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고 동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나 역할을 부정하는
칼빈주의와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전적타락과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원죄아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의지의 자유가 회복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ting grace 또는 prevenient grace)의
교리이다. 선행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웨슬리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에 죽은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소원에 응답하여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능력이 부여된다는 것이 웨슬리의 구원관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연인에게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시기에 인간의 책임이 고조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신다(요 1:9). 사람들은 이 빛 가운데서 비췸을 받아 자비를
사랑하고, 옳은 일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선한 소원(good desire)을 가지게 된다. 웨슬리는 이러한
선한 소원을 생래적 양심(natural conscience) 또는 선행적 은총이라 부른다.
따라서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아
분별력을 잃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유한 선행적 은총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는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여 죄를
범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에 응답할 만한 양심 또는 선행은총을 누구에게나 주시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연인(natural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에게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양심이 있고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그 양심이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인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부여되어 있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를 악용하여 죄의 길을 선택하여 고집할 때, 구원은 거부되는 것이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분별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인간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고 선택할 수 있는 선행은총을 주신다. 생래적인 양심 또는 회복된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양심 또는 의지 자체가 선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행(先行) 은총을 따라 의지를 선용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니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인간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며 거저
주시는 바 은혜가 된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 대답해야 할 자유의지를 악용함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부르시는 음성을 거역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처음부터 멀어지게 된다.
비록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않고 순종하여 거듭나는 은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사탄의 계속적인 유혹에 따라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깨닫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예비적 은혜일
뿐이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중생의 은혜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최종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신다. 그러나 주신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다. 후대의 신학자들 중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주장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한 신단독설(Monergism)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5. 맺는 말
웨슬리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도덕폐기론자(또는 반율법주의자,
Antinomianist)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볼 때도 인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주장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폐기론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선을 행한다든가 법을 지키는 일이
무의미하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 똑같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罪論)이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서 웨슬리의
입장은 칼빈과 일치한다. 다만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에 반대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믿음(sola fideism)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구원을 적용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시므로 역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는 주도적(monergism)이라는 점에서
개혁자들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先行恩寵)이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다고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웨슬리의 주장이 개혁자들에게 가깝다기 보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구교(캐톨릭)적이라 할 수 있다.
선교 1세기만에 한국교회가 이룬 놀라운 부흥은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세계선교의 책임이 한국교회에 메워진 것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와 거기에 달리신 만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요 3:16, 행
16:31)를 힘차게 전하여야 하겠다.
이미 구원에 이른 자들은 자기가 받은 구원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감사하고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헌신 봉사하여야 할 것이며,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부탁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선교와 전도에 있어서는
웨슬리처럼 구원의 소식을 전함이 효과적일 것이다. 복음을 듣는 이들의 결단을 촉구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일 것이다.
("목회와 신학",
1992.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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