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에 8명을 전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이 사진을 소개한 어느 개척교회목회자의 헬슥한 얼굴,.. 피식 웃던 핏기없는 얼굴이 떠오른다. 주여 개척의 샘을 파는 당신의 종들을 기억하소서.
========================================================= (아래 컬럼은 대형교회를 비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기 올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금과 물량주의에 오염된 이 시대에 교회를 살펴 더욱 순결한 신부의 모습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두개의 글 중 그래서 아래는 개척의 샘을 파는 현장목회자의 글을 달아놓아 치우치지 않는 의로운 고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큰 교회는 큰 예산으로 세상을 향한 선포사역을 하며 작은 교회는 나름대로 큰 교회가 못하는 세미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개인적견해를 밝힙니다.) -게시자올림. -----------------------------------------------------------
진정한 교회상에 대하여, -칼럼니스트 김진혁 ( 경영 컨설턴트 )
자신의 교회를 소개할 때 우리는 그 교회의 교인이 숫자를 말하며 덧붙여 담임목사가 기독교계의 방송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교회가 크고 안락함을 빼놓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우리는 모두 부러워한다. 화장실이 레스토랑처럼 고급스럽고 로비가 최고급호텔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언제 이 같은 교회에 다녀보나 하고 시샘하며 부러운 생각에 잠긴다. 그렇지만 실상은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짓기 위해 세상의 금융기관에서 수십억의 돈을 대출해서 이자로 나가는 돈만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그 돈이 의로운 열매로 쓰이기를 원하는 헌금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게다가 빚을 얻는 것은 조급함과 탐욕의 증거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이며 사탄의 주요한 공격무기로 사용되지만, 교인들이 해도 앞장서서 말려야 할 교회가 대형교회로 키우기 위해 빚을 얻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빚으로 지은 웅장한 교회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지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들이 방송설교로 유명하다는 담임목사도 알고 보면 방송국에 엄청난 후원을 해야 세워준다는 것도 그렇다. 물론 선교의 일환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불쌍한 이웃을 돕는 구제에는 손이 움츠려들면서 입이 떡 벌어지는 엄청난 돈을 방송국에 싸가지고 가는 모습의 내면에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워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고 싶은 속내가 자리 잡고 있지 아닌지 모르겠다. 설교내용도 통찰력에서 빚어낸 깨달음의 말씀보다 늘 들어왔던 설교를 각색해서 고장 난 레코드처럼 다시 듣게 되는 내용에다 세상적인 성공과 부를 선동하고 부추기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시간보다 외형적인 행사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이 오버랩해서 비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만 그러한가, 이번에는 교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믿음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장로나 권사의 무거운 직책을 앞세우며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사경력을 빼곡하게 늘어놓는다. 그리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으며 수요예배, 철야예배는 물론 기도원의 금식기도의 회수를 가슴의 훈장처럼 붙인다. 그리고 입만 열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해주셨다는 내용으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런 말을 듣다보면 구약시대의 선지자나 초대교회의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인 성령의 열매인 거룩하고 따뜻한 성품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불쌍히 여김, 오래 참음, 절제, 친절, 온유, 겸손함보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성격이 더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가정에서 들려오는 나쁜 평판은 고개를 가로 젓게 만든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가 없다면 내세우는 자랑거리는 껍데기일 뿐이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해야한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놀라운 능력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쫒아낼 뿐 아니라 지혜와 통찰력으로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 덕을 세우고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단지 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내면이 잘 가꾸어져서 침묵을 즐기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본이 되지 결코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는 교회에서 말해지는 축복의 조건은 성공으로 대변되는 부와 명예이다. 그래서 축복받았다고 말하면 부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장로들의 임직조건에 들어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희귀한 일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의 조건에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들어 세우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구약시대의 축복이 물질적인 부유함을 들고 있지만 신약시대에는 신앙이 성숙해져서 자족과 절제의 성품을 가꾸어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얻어진 재산은 구제와 선교 등의 의로운 열매로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생적인 기도와 신앙행위로 부와 성공만을 원하지, 수중에 들어온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무지하고 관심조차 없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은 영혼이 잘 되는 영적이 축복이 우선이고 육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자격을 갖추고 지혜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청지지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채워줄 재물이 많아지는 것이 축복의 우선순위로 삼는 것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거지 나사로가 살던 집의 부자처럼 영원한 삶에 관심조차 없다. 단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바라는 축복의 전부일 뿐이다. 그래서 이를 부추기는 목사가 높임을 받고 그러한 교회에 사람들의 수가 불어난다. 삯꾼목자의 거짓축복의 늪에 빠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으며 의와 기쁨과 평안이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상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니고 숱한 설교를 들어와서 성경내용은 잘 알지만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평안과 기쁨이 없고 신앙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갈수록 세속화되며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침체의 가파른 길로 미끄러지고 있다. 알맹이는 썩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호화찬란한 껍데기만 쓰고 있는 모습이 지금 우리가 아닐까하고 곰씹어본다. 칼럼니스트 김진혁 ( 경영 컨설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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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문제는 초심에 있다.-목회단상 g. solleim - (benabon담임)
현대교회가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따라서 물량주의를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일단일장이 있다. 큰 교회가 해야 할 몫이 있고 중소교회가 감당할 부분이 있다. 그리고 작은 교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목회자나 그 후보생들의 초심과 의식구조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와 size에 있지 않다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말씀과 십자가에 온 생애를 불태울 것 같던 초심이 어느새 대형교회의 압도적인 숫자와 수억원대의 파이프올갠소리에 눌리고 만다. 거기에 사회거물급 인사가 출석하는 날이면 담임목사는 어느새 섬기는 목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권세자가 되어간다. 이를 단호히 물리칠 신앙인격을 유지하기란 이미 눈에 보이는 허탄한 것에 점령당해 결코 쉽질 않게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대형교회목사가 1만원짜리 넥타이를 두르고 소형차를 탈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어렵긴 하나 초심을 찾아 애를 쓰면서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갈 길 가게 될 때에 그때에도 비난은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그럴싸한 양복을 목회자가 입으나 쌈직한 양복을 입으나 비난받기는 한가지인 세태이고 교회이다. “우리가 드린 헌금은 어디다 뭐하고 저따위 넝마를 입어 교회망신을 주고 다니시남?” “뼈빠지게 바친 헌금으로 저런 고급양복이나 걸치고? 잘한다 잘해 목사님이 저러면 되나?”
기분나빠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기분나쁜 길을 가면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속히 뭉치를 이룬다. 선은 죽을힘을 다해야 겨우 하나를 이루지만 악은 노력없이도 열을 쉽게 이루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큰맘먹고 머리퍼머를 예쁘게 해도 같은 반응이 두가지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한가지이다. "무슨 탈렌트라고, 사례비가 넉넉한가.." "드린 사례비는 다 뭐하고 머리가 저모양이야. 저게 다 교회망신이지 뭐야.." 인간이란 나남없이 육신이나 집이나 한편 구석에 사라지지 않는 화장실이 있듯이... 사라지지 않는 죄성을 품고 산다. 이래도저래도 말이 나오는 것이라면 정결한 신앙고백적인 삶으로 굳건한 버팀목은.. 항상 주앞에 홀로 서는 것..
일부이겠으나 대형교회지도자가 고급승용차를 타고 고급주택에서 사절하기 어려운 부를 이땅에서 누려 이미 하늘의 상급을 까먹으며 세간의 비난앞에, 어느새 아류가 된 자신앞에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다. 한편 개척의 샘을 파는 개척교회 목회자는 당장 먹을 쌀이 없어 허기진 배를 잡고 강요된 금식을 밥먹듯 한다. 교회나 세상이나 한쪽은 너무 먹어 터져죽고 한쪽은 배곯아 죽는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지만 진정 이 시대 진정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초심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꿈꾸던 때묻지 않은 순결한 꿈이 설령 참담한 목회현장에서 박살이 난다 하더라도, 소명과 자신의 정체성에 성령이 순간마다 점고하셔서 매일매일 타오르는 번제단의 제물되기를 원해야 한다. 거듭되는 심방덕에 어느새 복부살이 두터워진 것처럼 둔감해진 영의 감각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소식을 듣고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가 목이 부러진 우리의 사사, 엘리선지자. 그는 잘먹고 잘살면서 "내가 이렇게 잘먹고 잘살아도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비대한 몸에게 얼마나 했을까? 아들들이 제물을 가로채 먹고 자신처럼 비겟살이 피둥피둥해지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괴로워 했을까?
교회가 크고 작은 것이 문제는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초심을 향한 몸부림과 통증이 살아있냐는 것이다. 그 순결한 신부의 젖내나는 적삼이 더러운 세상 것들의 손때가 묻지 못하도록 죽을 힘을 다한다면 아마도, 더이상의 교회싸이즈나 교인숫자에 흔들리지는 않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한몸 미련없이 바쳐서 그나라위해 살아가리란 초심을 북돋아야 하리.. 그 방법은 그사람의 길이다. - g. solleim - (benabon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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