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를 깨우는 설교자, 설교에 대해 외치다
목회와 신학 2012년 8월호
작은 회상: 포효하던 한 설교자
문득 아주 오래 전 좋은 설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미국 유학 길에 올랐을 때가 기억났다. 한국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치고 갔지만, 그 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설교의 새로운 흐름들을 소개받으면서 첫 학기는 흥분 속에서 지냈다. 당시 사역하고 있던 교회 강단에 매주 그것들을 새롭게 올리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70년대 이후 형성된 현대 설교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 흐름이 가진 설교 형태론적 차원과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탁월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필자는 그것을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심중히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함께 생성됐다.
설교학의 새로운 경향들의 강점과 약점을 함께 배우며 고민하고 있을 때, 설교의 또 다른 차원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월터 브루그만(Watter Brueggemann) 박사였다. 물론 성서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세계적 명성을 가진 대가(大家)의 클래스 하나는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얕은 생각으로 그의 ‘예레미야’ 강의를 신청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같은 생각은 그의 수업을 듣는 순간 깨져버렸다. 이후 필자는 그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 학기 그분의 강의를 수강하는 열성 제자(?)로 변신했다.
설교학도인 필자가 월터 브루그만 박사에게 매료됐던 이유는 성서신학 연구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선포(proclamation)’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나, 그의 연구의 최종 귀결점이 언제나 설교학이었다는 점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설교가 가져야 하고 수행해야 하는 특성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성경에서 찾아내 제시한다는 데 있었다. 달랑 히브리어 성경과 영어 성경 두 권만 들고 강의실에 들어와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포효하듯이 외치는 그에게서 학문적 열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열정은 설교에서 더욱 강하게 제시되곤 했다. 어떻게 저 본문에서 저런 메시지를 도출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만큼 말씀의 신비를 맘껏 드러내 보여주며 예배를 경축의 자리로 바꿔놓는 그분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분명 ‘설교자를 깨우는 설교자’였다.
월터 브루그만은 필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그것을 통해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고 들려지던 당시의 삶의 자리를 사회학적으로 조망하는 방법을 통해 성경 텍스트를 새롭게 보게 했고, 당시에 그것이 어떻게 들려졌을 지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수사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 메시지의 깊이를 드러내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성경 본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때론 역사 비평학과 문학적 연구 방법을 포함한 다양한 성경 연구 방법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게 도출된 메시지가 오늘의 시대에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지 고민할 것을 요구했다.
젊은 설교학도에게 그는 거침없이 텍스트의 중요성과 설교의 신학적 특성, 그리고 설교가 수행해야 할 기능과 오늘의 삶의 자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강렬한 외침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텍스트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것을 선포하는 설교가 가지는 전복시키는 힘과 그 기능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포효하듯이 외치고 있었다.
월터 브루그만이 한국 설교자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유는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들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은 군사 독재 시절 잠시 금서(禁書)가 되기도 했지만, 예언적 설교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제시하는 책으로 널리 읽혔다.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된 이래 구약학과 설교학 관련 책들이 꾸준히 번역돼 소개됐다. 그는 미국의 유니온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교인 에덴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미국 애틀랜타의 컬럼비아신학교에서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윌리엄 마셀루스 맥피터즈 석좌교수로 있었다.
대안 세계의 선포인 설교의 신학적 특성
이번에 한국어로 출판된 월터 브루그만의 책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The Word Militant)는 그의 주된 관심인 성경 텍스트의 바른 연구와 설교가 수행해야 할 신학적 기능에 대해 선명하게 제시한 책이다. 원서는 2007년에 출간됐다. 이 책은 주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신학연구지인, 유니온 장로교신학대학원의 신학연구지인, 컬럼비아신학대학원의 설교연구지인 등에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게재했던 11편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쓰인 책이 아님에도 거의 완벽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그가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성서신학과 설교학 연구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방법론과 연구의 핵심적인 부분을 함께 묶어 놓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과 형식이 사용된 다른 저작들도 있으니 함께 참고해서 봐도 좋겠다.
이 책은 구약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출애굽기와 왕정 시대와 포로기를 중심으로 한 예언서를 성서신학적으로 깊이 탐구하는데, 그 중심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교는 세상에 대해 대안적 메시지와 대안적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선포하는 행위다. 설교는 상상력을 통해 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세계를 다시 그려주는 행위(reimagination)이며, 그것을 통해 신앙을 재조직해 주는 행위다. 여기에서 그는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고보다는 드라마 중심의 사고, 즉 내러티브 사고가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설교는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줘 그 이야기를 살려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그런 점에서 설교는 대담한 행동이면서도 위험한 일이며, 세상을 다시 세우는 중요한 사역이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설교 상황은 비상사태(emergency)다. 설교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브루그만은 설교는 대담하면서도 “어리석고 위험한 행위”라고 규정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들으려 하지 않고, 싫어하는 메시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자는 성경 본문(텍스트)과 현대 세계의 텍스트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선 전자를 위해 설교자는 성경의 텍스트를 한두 가지 명제로 축소하지 말고, 마땅히 신실한 자세로 들어야 하며, 텍스트의 세부 사항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텍스트 전체를 상호 연결된 기호들의 시스템으로 보는 것과 텍스트 안에는 역사적 설명과 신학적 확실성을 뛰어넘는 일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후자는 인간의 삶을 세워주면서도 왜곡 변형시키는 축으로의 현대 세계인데,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텍스트를 가진다. 설교는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텍스트의 허위를 드러내면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행위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는 무엇보다 텍스트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구된다.
넷째, 설교는 세상과 제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대안적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는 공동체로서의 비전과 소명을 제시해 대안공동체로 불러내는 것으로 양자택일을 촉구하는 특징을 가진다. 세상의 지배적인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흡수되지 않도록 돕는 해독제와 같은 것이 설교이며, 이러한 일을 위해 찬양과 순종의 공동체를 형성해 그들에게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게 된다. 설교자는 이 일은 위해 증인으로 세움 받은 존재이며, 회중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존재다. 그들의 손에는 성경 텍스트가 놓여 있으며, 설교자는 그 텍스트가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다.
다섯째, 설교는 새로운 공동체를 소집하고 사회를 재편성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행동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에게 교회와 사회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여기서 설교자는 사회학적 현실을 고려해야 하며, 공동체가 사회 현실을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 위해 재묘사(redescribe)를 통한 세계 형성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복음은 다른 세계에 대한 소식이며, 다른 세계를 설명하다 보면 현 세계를 비판하고 도전하는 일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에 복음의 선포인 설교는 위험하고 대담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사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세계를 겨냥하는 사회학적 행동이다.
여섯째, 설교자는 오늘의 설교 사역이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시대 속에서 복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외면해버리고 싶은 대상이다. 여기에서 그는 ‘포로기’의 메타포를 통해 설교자의 세계와 복음 인식을 요구하며, ‘증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선포적인 기능보다는 동의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포로기 메타포는 설교자에게 안정된 기반과 믿을 만한 세계를 상실한 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알려주며, 소중히 여겨온 의미와 상징들이 조롱당하고 외면당하는 곳에서 설교 사역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여기서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의 부재 경험이며, 뿌리 없음의 상황에서의 절망감이다. 설교자에게 설교는 고향을 잃어버리고 뿌리가 뽑힌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세상 안에서 세상에 대해 거리두기와 연결되며, 귀향의 주제로 연결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자다.
일곱째, 설교는 기존의 지배적인 관점에 대해 늘 전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방을 선포하는 원시적 행동이다. 설교자는 지배적인 문화와 관점에 대해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대안적인 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복 행위자이며, 저항자다. 여기에서 그는 전자를 묘사하기 위해 ‘지배적인 해석판(dominant vers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후자를 묘사하기 위해 ‘하부 해석판(sub-vers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 의미는 ‘전복(subversion)’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 폭력과 불의, 억압과 탈취, 상호관계의 붕괴 등으로 이어지는 지배 문화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저항하고 해방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전복적(subversive)인 특성을 가진다. 그는 설교가 가지는 이러한 특성을 이사야와 예수님에게서 찾아내고 있다.
설교에 대한 성서신학적 해석
월터 브루그만은 무엇보다도 설교의 힘, 특히 전복시키는 힘을 믿었던 사람이고, 그 중요성을 선명하게 알았던 학자다. 이 책은 그러한 특성을 성서신학 연구를 통해, 특히 출애굽기와 예언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설교가 가지는 이러한 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설교의 자리에 대해서도 탁월한 성서신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그는 설교자가 알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의 신학적 특성, 성경 텍스트의 중요성, 그리고 설교가 행해지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특히 오늘날 설교가 행해지는 현장에 대한 분석과 설교가 가지는 신학적 특성에 대한 그의 제시는 탁월하다.
모던 이전 시대와 모던 시대,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로 구분해 이해하는 그의 해석은 설교의 자리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제시한다. 모던 이전 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무신론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던 시대에는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신론에 대한 견해도 허용됐으며,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오히려 그 목소리들이 보다 강해지면서 종교가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피터 버거가 말했던 타당성의 구조는 와해되고 말았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설교자들은 모던 이전 시대의 사고, 혹은 모던 시대의 사고에 머물러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목소리가 시대를 변혁시키는 목소리가 되지 못하고, 설교가 가지는 신학적 특성도 온전히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복음에 대한 왜곡과 말씀에 대한 왜곡 현상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왜곡시키는 시대에 설교의 능력을 살려내는 방법은 시대의 특성을 바로 알고, 성경 텍스트를 바로 이해하며, 바로 선포하는 것뿐이다.
본래 월터 브루그만은 새로운 개념과 용어를 많이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자는 저자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전달하고 있다. 신조어나 특정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메타포적으로 사용된 용어를 직역하게 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의역해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제시한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 본문(텍스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책으로 오해할 수 있게 책 제목이 잡힌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저자는 이 책에서 텍스트를 설교하는 방법론이나 설교학적 제시를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텍스트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성경 텍스트)으로 왜곡된 세상을 밝히는, 설교가 가지는 신학적 특성, 특히 전투적 특성(the Word militant)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터 브루그만이 그 누구보다 성경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이고, 성경 본문 중심의 설교를 하고 있는 설교자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대안적 사고를 가지고 담대하게 일어나 모든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향해 대안 세계(공동체)를 제시하기 위해 서 있는 그곳에서 세상은 다시 하늘의 신비를 누리며 노래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며(상상력과 시적인 언어), 성경이 말씀하는 대안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를 통해 세상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며, 불의로 점철된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통해 전복될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의 꿈이자, 간구의 내용이 돼야 한다.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 월터 브루그만 지음 | 홍병룡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펴냄 |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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