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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시사토크 판에서는 1987년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폭파한 김현희씨가 출연했다. 그동안 정부의 보호 아래 몇 차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지만, TV토크쇼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AL기 폭파 25주년을 맞아 유가족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밝힌 김현희씨는 자신이 북한 공작원으로 뽑혀 8년 동안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당시 상황과 교육 내용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이하 방송 인터뷰 내용)
Q. 얼마만의 TV 출연이십니까?
A. 결혼 후 처음이니까 15년 만에 국내방송에 처음 출연하게 됐습니다.
Q. 97년에 결혼하셨죠?
A. 네. 먼저 처음부터 국내방송에 출연하게 된 기회에 KAL기 폭파가 25주년이 됩니다. KAL기 폭파로 돌아가신 분과 유가족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 번 깊이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Q.97년 결혼, 그 이후 생활
97년에 결혼하고 사회, 정치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조용히 시골에서 참회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갑자기 좌파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그런 행상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지나갔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본격적으로 저를 두고 ‘가짜몰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늘 북한테러 때문에 경찰이 보호하고 있거든요. 보호하고 있고, 그게 가장 보안사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MBC가 습격해서 노출을 시켰습니다. 이어서, SBS도 오고 다 취재해서 방송 노출이 돼서 쫓겨났습니다. 한 밤 중에 아이들이 한 살, 세 살인데 젖 먹는 아이들을 업고 한밤중에 쫓겨났죠. 당장 갈 곳이 없으니 피난생활을 한 거죠.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서 피난생활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후에는 방송 되는 걸 보니 모든 걸 가짜로 몰고 방송3사가 편파방송을 합니다.
Q. 성장과정
A. 62년에 태어났고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은 쿠바에서 지냈습니다. 쿠바에서 4~5년 지내고 북한에 돌아와서 인민학교, 중학교 등 과정을 거쳤고 중상층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Q. 공작원 선발 경위
A. 평양외대 일본어과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외교관이셔서 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Q.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A.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 <딸의 심정>에 출연했습니다. 촬영소에서 와서 선발해서 아역배우로 했는데 그 후에도 다른 촬영을 하려는 섭외가 왔죠. 그런데 아버지가 그때만 해도 연예인을 싫어해서 반대하셔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쪽으로 갔죠.
Q. 공작원 선발 배경
A. 각 학급에 한명씩 학과실로 오래요. 면접을 봅니다. 인물심사죠. 여러 가지 물어보고 한창 유행하는 김정일에 대해서 덕성실기를 이야기해보라고 하고 면접을 봅니다. 뭔지 몰랐습니다. 당 조직에서 와서 심사를 한다는 것만 느꼈습니다. 그 후 80년 3월, 2학년에 갑자기 벤츠를 탄 중앙당 직원이 와서 사로청 조직에 적을 떼고 짐을 싸게 했고, 친구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선생님께만 인사하고 바로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딸을 잘 키워서 당에서 쓰게 됐다’고 ‘내일 아침에 올 테니 가족들과 인사를 하라’고 하고 떠나게 됐습니다.
Q. 공작원으로 선발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A. 저를 태우고 산 속 초대소에 가서 내렸습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구호판이 모두 대남사업과 관련된 교시였습니다.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사명을 다해야겠다’는 대남 관련 교시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대남공작에 왔구나’ 알게 됐습니다.
Q. 8년 동안의 공작원 교육 과정
A. 들어가면서 ‘김옥화’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서 바로 금성정치군사대학이라고 지금은 김정일군사정치대학인데 금성이 김일성을 칭하는 겁니다. 거기 입학을 해서 그 학교는 공작원 육성학교입니다. 간첩 교육기관이죠. 평양시 근교에 있는 넓은 산 속에 줄기줄기 연결된 곳에서 밀봉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두세 명씩 밀봉교육을 시키는데 강의실에 10명 정도가 들어가서 강의를 받을 때도 일체 얼굴, 음성 노출하면 안 되고 닭장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토론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노출 안 시키고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면 안 되고 서로에 대해 물으면 안 되는 게 생활 원칙이었습니다. 거기서 배운 건 첫째로, 사상적으로 대남 혁명, 남조선 혁명을 배웠고 남조선 혁명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사상 교육과 투철한 임무수행을 위한 자결정신을 배웠습니다. 임무수행을 하다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당 수령을 위해 가차 없이 자폭을 하는거죠. 수령님과 비밀을 지키기 위한 정신교육을 받았고, 육체적인 단련도 받았죠. 모래 배낭을 메고 산악 행군을 하고 격술, 수영 등을 배웠고 사격 연습...
Q. 납치된 일본인, 다쿠치 야에코(리은혜)
A. 그 훈련이 끝나고 바로 일본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에서 다쿠치 야에코를 만나서 2년 간 같이 생활하면서 저를 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입니다. 언어 뿐 아니라 일본의 풍습, 역사지리, 사회생활 모든 것을 습득해서 어떻게 하면 일본인으로 위장하는지 훈련을 받았습니다. 한국말 쓰지 않았고 모든 걸 일본어로 했습니다. 다쿠치가 평가하기에도 ‘일본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 같다’고 했습니다. 일본어를 배운 게 공작원으로 선발된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다쿠치 야에코에게 들은 납치 일본인 현황
A. 그 분야는 모든 게 비밀에 속해있습니다. 자기 것을 말하지 말며 남의 것 묻지도 말며 그게 비밀 원칙입니다. 다쿠치도 상당히 와서 몇 년 있고 한 교육을 받아서 서로가 말을 안했습니다. 저는 일체 말을 안했습니다. 다쿠치는 자본주의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이기 때문에 친 자매처럼 24시간 2년 내내 붙어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고 헤이해지면 자기 집안 이야기도 하고 아이가 보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Q. 공범 김승일과의 만남
A. 일본인화 교육 중국인화 교육을 시작됐습니다. 중국인화 교육을 일본에서 납치해 온 공영앵이라는 중국여자하고 만나서 중국인화 교육을 시작했는데, 84년에 임무가 생겼다고 김승일(폭파 공범)과 한 조가 되어서 다른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유럽을 가서 프랑스에서 김승일은 남한에 들어왔고, 같이 들어올가 했는데 처음이고 일본위조 여권이고 남한에 들어오는 걸 북한에서 가장 어렵게 생각하거든요. 해외 자본주의 실습하며 여기까지 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Q. KAL기 폭파 임무를 부여받은 시점은
마카오까지 가서 실습 끝내고 들어왔습니다. 당시 마카오에서 중국에서 넘어온 신분증 첩보가 있었습니다. 신분증 취득이 공작원에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매일 지하로 다닐 수 없잖아요. 신분증 획득 위해서 중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만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들어오니, 김승일과 배합했고 KAL기 폭파 임무를 받았습니다.
Q. 임무를 받았을 때 기분
A. 공작원은 남조선 혁명과 통일을 위해 7년 8개월을 훈련만 했습니다. 그래서 임무를 받을 대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와서 김승일과 함께 임무를 부여받을 때 부장이 직접 나와서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남조선에 타격을 주기 위해 비행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그전부터 많이 애를 썼죠. 결국 안되니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 같은데 그 임무를 받는 순간에는 첫 임무 치고 큰 임무여서 불안과 긴장이 됐고, 당에서 얼마나 저를 신임해서 큰 임무를 주는지 감격스럽기도 하고. 과연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김승일이라는 노련한 공작원이 있고, 거기에 저는 보조역이고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공작 임무가 나섰는데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일본인 위장 교육으로 준비 돼 있었고, 김승일도 일본 말을 잘 하니까. 김승일의 경우에는 그 전에도 남한에 들어오기 위해서 일본에 있는 실제인물 ‘하치야 신이치’ 여권을 그대로 도용했죠. 위장하기 좋고, 저도 준비돼있으니 우리를 같이 배합했고 부녀지간으로 북한이 임무를 주었죠.
Q. ‘비행기를 재끼라’고 했을 때 기뻤나요?
A. 기쁘다기보다 내가 신임을 받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감정, 인간성이 마비된 상태인거죠. 북한 전체가 다 그렇지만 공작원은 더합니다. 오로지 인간폭탄이 되어 내 몸을 받쳐 수행해야하는 게 공작원입니다. 당을 절대적이고 신과 같기에 의심을 받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게 공작원입니다.
Q. 친필비준?
A. 제가 직접 받는 게 아니고, 북 상황은 대남공작은 김정일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이라는 사회는 원래 전체주의입니다. 김정일의 싸인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총 한 방 쏘고 해외를 나가도 개인이 함부로 못합니다. 대남공작 같은 큰일은 김정일 비준에 의해서 합니다. 비준은 싸인이고요. 최고승낙이라는 것이죠. 담당 과장 지도원들이 같이 앉아서 노선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연구하면서 김승일은 ‘노선이 불합리하다’고 했습니다. 비엔나에 가서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거쳐서 아부다비 거쳐서 남한에 오는 건데 아랍지역이 전쟁 국가여서 상황이 경비가 삼엄하다고 김승일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담당 과장이 ‘이미 친필 비준이 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고 불만이 있었지만 그대로 하게 된 겁니다. 친필비준이 없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Q. ‘친필 비준’을 받은 날짜
A. 87년 10월 정도. 87년 10월 7일에 임무를 받고 한 달 간 준비를 했습니다. 폭파 방법, 노선준비를 하고 11월 12에 평양 순환비행장을 출발했습니다. 유럽을 와서 헝가리에 와서 준비를 하고 외교관 공작부서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때 헝가리까지는 북한 여권을 사용했습니다. 헝가리에서 비엔나는 육로로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북한이 이용을 했습니다.
Q.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된 폭탄, 공항 검색대에서 적달
A. 라디오에 배터리가 들어가 있는데 특수조작 된 겁니다.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배터리와 반은 폭발물을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화학품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시한폭탄을 어느 시간을 밑에 것을 누르면 9시간 후오, 임의 시간 조정 훈련을 받고 술병은 액체폭약이었습니다. 그동안 유럽을 여행할 때도 무사통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술병 같습니다. 그게 액체 폭약이라 항상 같이 두어야 점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Q. 검색대에서 적발 당한 순간의 심정
A. 바그다드에서 검열이 심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배터리를 회수한 적이 있고요. 그런데, 그걸 돌려줘서 다행이었는데 바그다드 공항 검색대에서는 뽑아서 버리더라고요. 아찔했습니다. 작전 실패죠. 그래서 저도 마음이 급해서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다시 끼워서 김승일에게 주었더니 그가 항의했습니다. 라디오를 틀어 보이며 항의하자 통과시켜주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노인이 항의하니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KAL 858기를 폭파 대상으로 고른 이유
A. 제가 직접 한 게 아니고 저는 보조 역할로 따라갔고 김승일과 담당 조직원들이 결정 한 겁니다. 당시 그때 남조선 비행기에 외국인이 타지 않은 비행기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외국인이 탔으면 국제적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외국인이 타지 않은 비행기를 골랐고, 그 당시에 노선을 연구한 결과 그 노선이 가장 시기에 적합했습니다.
Q. 폭탄을 비행기에 두고 내렸을 때의 기분
A. KAL기에 남한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많이 떨렸죠. 긴장하고요. 강심제도 먹고 탔는데, 긴장을 했고 탄로 나서 쫓겨 가지 않을지 긴장했고. 폭탄을 선반 위에 놓고 계획된 대로 내리면서도 그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은 ‘이 사람들이 희생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워낙 혁명가 훈련을 받았고 남조선 혁명과 통일에 기여한다고 당에서 말하니까 나도 필요하면 죽어야 하고 이만한 희생은 감수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Q. 비행기 실종을 알게 된 시점
A. 전혀 예상 외로 바레인으로 가게 됐습니다. 원래는 내리면서 탈출하기로 한 비행기로 타서 로마로 멀리 도망갔다가 비엔나로 가기로 했는데 내리는 순간 공항 분위기가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직원이 타고 온 항공권을 회수하니까요. 아부다비 공항은 비자 여권을 안주고 통과여객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김승일이 내리면서 의심받을까봐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 바레인으로 가는 쪽으로 위장용으로 해 둔 바레인 표를 제시한 거죠. 수속을 하려는데 공항 직원이 수속을 대행해줬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달갑지 않았죠. 바레인으로 가게 됐거든요. 결정적 실수는, 북한 공작 부서가 이 공작을 하려면 사전 루트 연습을 해야 하는데 탁상 연구만 했고 아랍에 대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바레인에 도착해서 당황했고, 호텔도 겨우 찾아갔습니다. 아랍에서 일요일에 쉬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거든요. 공항 나와서 호텔에 갔고, 그날이 일요일이니 항공사를 다음 날 찾아가니 로마 가는 티켓이 없답니다. 다음날 아침 출발이 있다고 했는데, 사건이 나면 수사가 진행 될거고 추격 당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건 바레인 호텔에 묵고 있는데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영어 자막으로 KAL기 관련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바레인 주재 한국 대사관이 직원이 찾아와서 김승일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폭파 임무가 완수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Q. 대사관 직원이 찾아왔을 때의 느낌
A. 많이 긴장됐고, 의심 받고 추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루트가 삐끗해서 잘못 왔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대사관에서 찾아와서 떨렸고 모른 척 하고 저는 잠을 자는 척을 했습니다. 김승일이 대사관 직원과 필담을 하더군요. 영어와 한자로요.
Q. 체포 당시의 상황
A. 공항을 가서 여권 심사대를 지나는데 일본 대사관 직원이 저희 여권을 보더니 회수했습니다. 따로 불렀습니다. ‘마유미 여권이 위조 되어서 이 상태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겁니다. ‘일본 대사관에 가서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비행기 탑승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공작 실패를 깨달았습니다. 각자 분리되어서 몸수색을 당하고 묶여있게 됐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일본으로 보내져도 탄로 나는 거죠. 그때 김승일 할아버지는 ‘일본에 끌려가서 살아있어도 고통만 받다 죽게된다. 자결하는 게 맞다’ ‘앰플을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깨물자’고 제안했습니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김승일 할아버지 말이 ‘나는 살 만큼 살아서 괜찮은데 마유미한테는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앰플을 깨물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다니고, 혁명가지만 그 순간에는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아직 경험이 없어서 김승일에게 앰플을 깨물 때가 되면 신호를 보내라고 했고, 내가 먼저 깨물겠다고 했습니다. 바레인 경찰이 핸드백을 회수하고, 담배까지 빼앗았습니다. 담배에 앰플을 넣어두었거든요. 앰플을 빼앗기면 안되니까 빼앗기는 순간 앰플을 깨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앰플이 작은 유리에 액체가 깨지며 자연히 기체가 되어 즉사하게 되는데 더러 흡입이 되고 더러 흡입이 안되었나봅니다. 그 사이에 김승일은 조용히 앰플을 깨물어 사망한 뒤였습니다.
Q. ‘자살연기’
A. 좌파 정부 때 연출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앰플 깨무는 연기를 누가 합니까. 너무 심하지 않은가요.
Q> 자살에 성공했다면
A> 이 사건은 영원한 미궁에 남았습니다. 북한이 의도한대로.... 누가 했는지 모르고 저와 김승일이 누군지 모르니 일본과 남한의 갈등이 더 생겼을거라고 생각합니다.
Q. 김승일의 사망을 알았나
몰랐습니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경찰과 간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괴로웠습니다. 시신도 못봤습니다. 간호사들이 ‘남자는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왜 내가 살아있나...비밀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그 생각 뿐이었습니다.
Q. 자백을 하게 된 계기
A. 바레인 경찰에서도 수사를 받았습니다. 중국인, 일본인으로 조사 받다가 한국의 외교력으로 앰플을 깨무는 방식은 북한 밖에 없다고 설득을 당했습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이 위조여권이라는 것도 밝혀내서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한국말이 들리고, 범 소굴처럼 무서운 곳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남산 지하 수사실에 수사를 받는데, 처음 8일 동안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를 했습니다. 잘 때 한국말이 튀어나올까봐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조사에서 자꾸 막혔습니다. 과학적 사실 앞에서 거짓말로 버틸 수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거 얘기를 하는 걸 듣는데 자유롭게 선거를 하고 후보가 여럿이고 한 집에서도 갈라져서 선거를 한다는 걸 들으면서 자유로움을 알게 됐습니다. 외출을 해서 명동을 돌아보게 된 날이 있는데, 북한에서 해외 실습을 해서 자본주의 실상을 알았지만 그때는 ‘다른 나라 이야기’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족이고 분단된 같은 조건인데 너무도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북한과 차이가 날까... 통일을 위해 했다고 자부했는데 통일에 기여되는 게 뭔가...’ 지도자가 잘못된 게 아닌지, KAL기 사건에 대해서도 통일을 위해 한 일이라고 자부했는데 이곳에 와서는 ‘동족 살상’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 유가족에게 진실을 알리고 죽으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Q. 심경의 변화
A. 8일 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와서 실상을 보면 가슴과 머리를 가진 사람이면 보는 순간 아니라는 걸 다 느낀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느꼈습니다. 저는 많이 걸린 경우라고 합니다.
Q. 북에 남겨진 가족
A. 가족을 가장 걱정했는데 얼마 전, 탈북자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많이 고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5년 만에 가족 소식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Q. 어머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순간
A. 87년 4월 15일에 북한에 있을 때 KAL기 폭파 임무 받기 전에 명절이라고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도 해외에 나가계시다가 휴가를 받고 오셔서 가족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가졌습니다.
Q. ‘살고 싶다’는 생각
A.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앰플을 깨물 때도 오로지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와서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당연히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유가족과 직접 대면을 하니 그 심정이 이해되거든요. 개인하고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그들이 원한다면 빨리 죽여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어머니가 떠오르더군요. ‘어머니가 곱게 키워주셨는데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인간이니까 맥이 풀렸다고 할까요. 죽는 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인간이니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주저앉았다고 하더군요.
Q. 사면 후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
A. 대한민국이 저를 살려놓은 건 KAL기 사건에 대해 북한이 아직도 인정을 하지 않고 뒤집어씌우려고 하니까 이 진실을 증인으로서 증언하라고 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KAL기 사건의 진실을 지키는 게 제 사명입니다.
Q. 사면 받았을 때의 심경
A.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하나님께 감사했고, 보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최·박의 시사토크 판' 김현희 편은 내일 밤 2부에서 더 이어진다. 2부에서는 김현희를 꾸준히 인터뷰 해 온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함께 해 김현희 ‘가짜몰이’에 대한 진실을 상세히 털어놓는다. 전 정부에게 받았던 이민 압박, 경찰 협박, 방송 출연 강요 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했던 심경도 밝힌다.
-출연자 :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
-방송일시 : 2012년 6월 18일 (월) 밤 10시
-진행자 : 최희준 취재에디터,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
[최·박의 시사토크 '판'] 114회
19일 시사토크 판에는 어제에 이어 1987년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폭파 한 김현희씨가 출연했다. 1997년 안기부 수사관과 결혼한 뒤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김현희씨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국정원까지 나서 자신을 '가짜'로 몰고 신변 위협까지 받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방송에는 김씨를 꾸준히 취재·인터뷰해온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도 출연해 최근 정치권 종북문제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이하 방송 인터뷰 내용)
Q. 최초로 김현희를 인터뷰한 기자
A. 조갑제: 그렇죠. 1989년 한창 재판 받을 때 안가에서 인터뷰했습니다. 그게 저로서도 기자생활 하는데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 관심 없었는데 김현희씨를 인터뷰하면서 북한 생활상을 들으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가 자릴 비운 사이에 김현희가 수사관에게 ‘저렇게 고참 기자가 어떻게 북한에 대해 저렇게 모르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북한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김현희 통해서 북한 알게 되고 한국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알게 된거죠. 김현희씨가 살아서 북 정권이 망한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2008년 이후에는 김현희씨가 좌파 때 당한 이야기 듣게됐고, 그것을 기사로 쓰면서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Q. 인터뷰 내용의 신빙성, 어떻게 검증했나
A. 조갑제: KAL기 사건은 세계 항공기 테러사상 완벽히 조사된겁니다. 다국적으로 조사했고 범인이 살아있는 유일한 경우였습니다. 이게 진실이라고 확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하기 위해 별도의 조사를 했습니다. CIA요원이 와서 김씨를 인터뷰 하고 결론을 낸거죠. 김정일이 2002년 일.북 정상회담에서 인정한 사건입니다. 세계가 인정한 사건을 노무현 정부 때 김씨를 가짜로 몰려는 게 진행되었고 3대 방송, 종교계, 좌파 시민단체도 관여해서 북한이 뒤에서 밀어줘서 한 개인을 한반도의 좌익 권력이 잡으려고 한 것 아닙니까? 외롭게 버틴겁니다. 김현희 씨가 두 번 목숨 버린겁니다.
Q 조갑제 기자를 만났을 때 소감
A. 김현희: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조사 받을 때인데 북한에 대해 물어보시는데 ‘이렇게도 모르는가...’놀랐습니다. 북한을 너무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Q. 90년 사면 뒤의 삶
A. 김현희: 사면 이후에는 제가 이 사건에 대해서 책도 썼고, 전국을 다니며 진상을 알리는 안보 강연을 하고 종교활동 간증도 했습니다.
Q. 유족들과 화해는
A. 김현희: 97년 12월에 유가족들 만났습니다. 그 계기는 제가 수기를 쓴 인세를그분들에게 전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걸 드리면서 사죄하는 만남이었는데 그들도 서로 많이 붙잡고 울고, 고생했다고 잘 살라고... 그런 자리였습니다.
Q. 김현희와 북한정권
A. 조갑제: ‘KAL기를 제끼라’는 김정일의 명령은 서울올림픽에 대한 질투심이었죠. 만약 성공했으면 ‘KAL기 폭파는 일본 사람이 했다’고 해서 한국에서 반일대모가 일어났을 거고 일본이 한국에 ‘서울올림픽 참여 할 수 있냐’고 해서 미궁으로 빠지며 한일 관계 나빠졌을 겁니다. 그런데, 살아 계셔서 서울올림픽이 성공했어요. 그래서 북방정책으로 가서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며 그때부터 북한이 고립되기 시작했고요. 국제사회로부터 테러지원국이라는 오명 쓰며 또 고립되기 시작했어요. 김정일로서는 김현희 말살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겁니다. MBC가 방송에 김현희가 살고 있는 집을 노출시켰어요. NHK가 이런 기사를 했다면 NHK 사장은 그 다음에 그만둬야 했을겁니다. 그 후에 국제적 움직임이 있었죠. 노무현 정부는 김정일 정권의 대리인인지 모를 정도로 미국에 대해서 테러지원국가를 해제해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무현 정부는 위조 달러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주도해서 북한에 대해서 금융제재 할 때 부시대통령을 2005년에 경주에서 만나서 그것도 안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서 부시 대통령으로 부터 싫은 소리 들었어요. 그런 사회, 국제적 분위기에서 2003년부터 김현희씨를 ‘이 사건을 김정일이 지시한 게 아니다, 의문투성이다’라는 쪽으로 만든 이유가 있는거죠. 거기에 알든 모르든 하수인 역할을 한 방송3사가 한 번도 사과 안하고 그걸 만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사는 게 끔찍합니다.
Q. 합리적인 의심일 수 있는데
A. 김현희: 저는 정부가 1988년 1월 15일에 안기부에서 진상 발표 후에는 의심하면 안되죠. 발표가 워낙 완벽하고, 간단하게 이렇게 질문하면 됩니다. ‘김현희가 북한 사람이 아니면 한국사람이란 얘기고, 교포라는 이야기인데 김현희씨가 북한 말고 옆집에 살았다고 본 사람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세요. 지각이 있으면 의심할 수 없습니다. 기자나 변호사는 배운 사람이에요. 배운 사람은 판단력이 뛰어나야죠. 배운 사람들이 김현희씨를 가짜로 모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거고, 상당 부분은 북한과 연결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Q. 김현희를 둘러싼 의혹
A. 김현희: (사진 설명)결정적으로 어려서 제 사진이 이 사진입니다. 이 사진도 제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사실 여기 와서 진술하는 과정에서 남북에서조절위원회가 있을 때 드린 적이 있다니 찾아냈어요. 처음에 이 사진이 나온 게 아니고 일본 기자가 북한 특파원으로 갔을 때 찍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발표를 했는데, 저는 그때 머리가 가려져있었습니다. 숙이고 있는 사진이 잘못 찍혔어요. 비슷하니까 ‘이건가?’해서 잘못본거예요. 그러다가 후에 다시 찾아냈어요. 요미우리 기자가 찾아내서 정확히 제 모습이 드러난 사진을 찾아서 끝났어요.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88년 그때 끝났는데,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이 의혹은 1988년 1월 15일 발표 때는 한 달 동안 조사한거라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숫자가 틀리고 그런거요. 지엽적인 겁니다. 그 후에 그걸 다 보강했어요. 굳이 의혹 말하는 건 그 앞에 것을 갖고 그럽니다. 아닌 걸 내밀며 계속 아니라고 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국정원, 경찰청, 방송3사, 좌파 매체, 천주교정의구현사재단, 인권위, 등이 합심해서 이걸 뒤집기 위해서 저를 가짜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뽑아서 한겁니다. 저는 절대 그 사람들이 저를 모르고 제가 가짜라고 믿고 그랬다고 생각 안합니다. 수많은 정보 자료 중 맞는 건 감추고, 아닌 거 모르는 것만 부풀리고... 한마디로 좌파단체 보면 조작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갑제: 이것은 한국에서도 1심, 2심, 3심 거쳐 확정된 사실입니다. 국 제적으로도요. 그래서 제재가 이뤄진거죠. 그런데 갑자기 2001년부터 이 문제가 일부 좌파매체에서 거론되더니, MBC 가 PD수첩 방영하며 본격화됐습니다. 그 후 난데없이 과거사 사건 재조사를 하는데 이 사건을 끼어넣었습니다. 말하자면, 해가 동쪽에서 뜨는 사실을 재조사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부 터 문제가 생긴거죠. 조사를 하려고 하니 본인이 나와야할 것 아닙니까? 그때부터 국정원과 조사관이 15번을 찾아갔어요. 나왔으면 다른 의혹을 씌웠을거예요. ‘과거사재조사위원회’에 서는 북 정권의 테러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럼 거기서 끝나야 하는데 ‘진실 화해 위원회’로 또 넘어갔습니다.
Q. 의혹에 대해
A. 김현희: 의혹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혹을 구실로 만들어서 가짜몰기를 한 겁니다. 짧은 시간에 다 말할 순 없지만 아버지가 앙골라 에 계셨던 것도 맞습니다. 탈북자 고영환씨가 저희 아버지를 소환한 걸 보셨다고 합니다. 의혹을 만든겁니다.
조갑제 2001년 월간조선 편집장할 때 한 기자가 ‘쿠바에 있는 외교관 명단 입수해보니 부친 김원석, 모친 림명식 명단이 있다’는 기 사를 취재했었습니다.
Q. '가짜 몰이'와 북한의 관계
A. 조갑제: 조작설이 어디서부터 생겼냐면 조총련에서 시작됐고 한국 운 동권에서 퍼졌습니다. 김정일이 지시한 사건이라는 걸 김현희 씨가 폭로한 것 아닙니까? 국가적 차원에서 조사해야합니다. 이것은 국회가 청문회를 하고 국정원이 재조사를 재조사해야 합니다. 왜 이 사건이 노무현 정권적 차원에서 진행됐는지 조 사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혹이 많아요. 왜냐하면, 수사발표문 은 틀린 게 많습니다. 오자도 많고, 호텔 방 번호도 틀린 것이 있고요. 국정원이 조사하며 148건의 의혹을 재조사했어요. 앰 플을 물었을 때 가짜로 물었던 것 아닌지 ‘자살 쇼’를 이야기 했어요. 재조사를 하니 바레인 경찰서에서 소변 검사 시 ‘청산 가리’가 검출된 걸 발표했습니다. 당시 남북 상황과 연관이 있 는 것 같습니다. 김정일이 6.15 선언으로 김대중 정권을 갖고 놀며 자신이 생겼을 겁니다. 테러지원국가의 해체를 받아야 하니, 특히 김현희씨가 리은혜의 존재를 증언하며 일본 납치 자 문제가 부각되니까 일북 수교가 되지 않았어요. 북한은 100억 달러 보상금을 날리게 됐습니다. 북한을 따르는 남한의 종북세력은 모든 문제의 시작인 ‘김현희씨가 의혹이 많다’는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일북 관계, 테러지원국 해제 등에 유리 하지 않을까 하는 전략적 계산이 있었을 겁니다.
김현희: 정부가 했다는 건 국정원이 현 정부 들어서서 제가 편지를 보 내서 발표되니까 조사를 하고 ‘당시 노무현 정부가 가짜만들 기 공작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청와대가 깊이 개입했고, 청 와대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정말 비열하고 나쁜 정 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개 싸움’을 시킨 겁니다. 안기부가 KAL기 사건을 수사한 사람이 자기가 수사한 걸 뒤집기를 시 킨 겁니다. 얼마나 비열한 겁니까.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진 게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조갑제: 좌파단체에서 ‘현상금 29만원’을 내걸기도 했죠?
김현희: 저를 추방하려고 이민가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경찰대로 떠나 라고 괴롭혔습니다.
Q 이민 가라던 국정원, 지금은
A. 김현희: 그대로 있습니다. 당시 이민가라고 하고 했는데 노무현 정부가 저를 해외로 추방시키고 못 들어오게 하고, ‘가짜라서 도망갔다’고 했어요. 이민을 거부하고 MBC 출연 거부하니까 집을 노출시켜서 테러 해서 쫓아냈습니다. 이 정부 내에서도 피난살이합니다. 그래도 말 안 들으니까 국정원 내 과거사위원회 만들고 이 사건을 재조사 사건으로 만들어서 그 다음부터 또 계속 저를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진짜를 결론 내 놓고 저를 계속 조사하겠다고 3년 내내 괴롭혔어요. ‘이 목적은 김정일이 안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목적이다’라고 하더군요. 과거사 위원회 조사 끝나기 전해 진실 화해 위원회로 넘어갔습니다. 강제 구인법을 제출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인민재판이 아니고 뭡니까.
조갑제: MBC PD수첩에 김재환 변호사가 나와서 ‘김현희는 가짜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며칠 전에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김현희씨는 반론을 안한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현희: 그는 저를 가짜로 만드는데 아주 깊이 강요한 사람입니다. 가짜라고 주장하고 싶은거죠. 제가 가짜면 이 사건도 가짜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여기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지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고 변호사를 할거면 북한에 가서 변호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 신변의 위협을 느꼈나
A. 김현희: 많았죠. 목숨 내걸고 버틴겁니다. 사사건건 별 이상한 일 많았어요. 저를 보호해준다는 국정원이 그런 지시를 배후에서 하고 경찰이 저를 보호한다면서 가짜로 모는 공작에 가담해서 제 주변을 고립시키고. 괴롭히는데 앞장섰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사실 이거 때문에 생활이 피폐해진 정도가 아니라 목숨 위협과 살해 협박도 많이 받았거든요. 국정원 직원이 와서 그런 소리도 하고. 저는 목숨 내걸었습니다.
조갑제: 이런 일이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Q. 정권 교체 후 변화
A. 김현희: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서 제가 국정원에 편지도 쓰고 했지만 계속 침묵이었습니다. 편지를 써서 이동복씨에게 보냈고, 그게 조갑제 선생님 통해서 언론 공개됐어요. 그때 국정원 자체조사 팀을 꾸렸어요. 2009년 조사팀 중간발표라고 ‘노무현 정권 때 정부 차원에서 국정원, 경찰 등이 했다’ 인정했습니다. 그걸 검찰에 넘겨서 재조사해서 하겠다고 하고는 시간을 끌고 그냥 검찰은 국정원 눈치 보며 수사도 안했습니다. 그냥 무혐의 처벌했어요. 제가 그만큼 언론에 이야기하는데 침묵이고 국정원은‘ 인정은 하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덥고 가재요. 이런 일이 어딨습니까? 정부 시관이 왜 필요합니까? 존재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럼 폐쇄해야죠. 나라에 해를 끼치는 정부 기관은 폐쇄해야죠. 정신상태가 썪었다고 생각합니다. 정권 바뀌어서 갔을 때만해도 ‘계속 조사하겠다’고 하면서 그때까지도 협박을 하고... ‘정권 또 바뀌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이런 소리하고...저는 근본적으로 정부 관계자들이 근본적인 대 수술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조갑제: 티비 보는 분들 중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있을 거 같아요. ‘김 현희는 KAL폭파범인데 살려줬으면 고마워해야지 고통받았다 고 티비 나와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겁니다. 저도 사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언론이 ‘미모’이야기 했습 니다. 그럼 미모면 살리고 아니면 죽이나요? 지나고 보니 노 태우 정부가 살린 건 정말 잘한 일입니다. 진실을 증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사형을 했으면 지금 어떻게 됐겠어요. 저 사건은 완전히 우리가 국정원 그때 안기부가 김현희를 증거인 멸 위해 죽였다고 했을겁니다. 김현희가 살아서 115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 을 위한 이해 차원에서 말했습니다.
Q. 김현희에게 이념이란
A. 김현희: 이념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죠. 북한은 전체주의, 공동체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고귀합니까? 이런 좋은 자유 속에 살면서도 남한 젊은이들은 소중함을 모릅니다. 전체주의 동경하고, 그걸 만들려고 종북주의자가 나서고... 이념은 곧 안보라고 생각합니다. 안보가 생명입니다.
Q. 최근 정치권의 이념공방에 대해
A. 김현희: 서로 다른 이념 체제가 분단 된 상황에서는 불가피합니다. 북한은 50년 때부터 지금까지 남한을 먹으려고 계속 파괴공작, 대남공작을 해요. 저도 그 일원이었고요. 현재까지 계속 하고 있어요 북한은... 북한이 계속 하는 상황에서는 이념논쟁은 불가피합니다.
Q. 종북주의자들에 대해
A. 김현희: 저도 그런 공작 임무 받고 있던 사람인데,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종북주의자들을 배양을 했어요. 배양을 했고, 현 정권 들어와서는 너무 방치했어요. 안보를 바깥에, 북한에 관한 안보는 퍼주기식을 안하고 지켰지만, 안에 안보는 방치했어요. 그들이 너무 커져서 지하에서 불법으로 정권 잡으려던 게 합법적으로 국회도 들어가고요. 이런 체계는 공안 당국이 제대로 제 역할을 못했고, 이명박 정부가 안보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해요.
조갑제: 제가 김현희 오래 지켜보면서 느낀 건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가’입니다. 김씨는 불리한 상황에서 정권을 상대로 했어요. 황 선생, 김선생이 잘 버텼어요. 이념으로 무장된 사람됐기 때문 입니다. 공산주의가 뭔지 알기에 그 행동에 끈질김에 생기는 거죠. 이념은 두 가지 역할을 하죠. 공동체에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을 줍니다. ‘공동체 적과 동지가 누구냐’. 또, ‘자기 정당성 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북한을 만만히 봐서 안됩니다. 이념 공동체 플러스 광신도입니다. 김현희씨를 처음 인터뷰 할 때 명언을 남겼습니다. ‘북한은 히즈 스토리(His-story)를 가리 치고 남한은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김현 희씨가 자백했지만 김일성을 주석이라고 했데요. 김일성 미워 하게 되는데는 6개월이 걸렸데요. 김현희에게 김일성은 하나 님이었던겁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면서 신정체제구나. 김 일성이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체제구나. 북한을 제대로 보려 면 종교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학자 중에 북한을 세계10 대 종교집단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어. 주체교라는거죠.
Q 종북주의자와 자유주의자
A. 김현희: 종북주의자는 북한을 신처럼 모시는 존재입니다. 북한에 가봤자 대접만 받고 감옥입니다. 거기서 연극 세트장에서 연극보고 대접만 받고 와요. 실상을 몰라요. 요즘 아이들이 현장체험 학습도 하는데 여기에 정부가 지원해서 북한과 똑같은 현장 체험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정치 수용소도 만들고 북한하고 똑같이요. 자유가 싫고 전체주의가 좋은지 체험하는 겁니다. 한 달이든 1년이든 체험하는 겁니다.
Q. 北 체제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태도에 대해
A. 김현희: 서로 다른 이념이고 체제가 달라요. 전쟁도 치뤘습니다. KAL폭파, 아웅산 테러, 천안함 모두 다 생명을 위협 받으면서 진행됐습니다. 전쟁 안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전쟁 안하고 내내 북한한테 얻어맞고, 빼앗길 겁니까? 그건 우리 선배. 이 땅의 자유를 지켜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킨건데 그걸 포기하는 겁니다. 종북주의자들이 정말 세상적으로 존경할 것도 있지만 체험장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 다른 하나는 임수경 양의 변절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걸 버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게 왜 변절자입니까? 그게 진보죠.
조갑제: 민주사회의 가장 큰 힘은 민심과 여론입니다. 민심이 바뀌고 여론이 바뀌면 달라집니다. 여론이 바뀌도록 하는 역할을 김현희씨 같은 분이 하고 있죠. ‘지옥에서 목숨 걸고 탈출 한 사람을 천당에 사는 사람이 변절자라고 하면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야하는 것 아닙니까?’ 모친이 북에 살아 계시다는 미확인 정보를 얻었다니, 앞으로 4,5년 안에 북한에서 반드시 급변 사태가 날겁니다. 김정일은 안정적이었으나, 김정은은 권력층 내부가 장성택 후견인 체제로 옮겨가는데 반드시 권력층 안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핸드폰이 연말 되면 2백만 된답니다. 시장 확대되면서 변화가 맞물리면 다음 대통령 사태에 북한 문제가 연결될 겁니다. 종북 문제는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것으로 해결될 겁니다. 제발 김현희씨가 모친 상봉하게 되길, 그런 날이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김현희: 요즘 MBC도 공정보도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걸 보며, ‘그들이 요구하는 공정보도가 뭔가’생각합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편파 보도가 공정보도입니까? 편파 보도로 유가족 속이고 국민을 우롱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공정보도를 요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 김현희를 가짜로 믿는 사람들에게
A. 김현희: 이 사건은 이미 법원에서 1심 2심 판결 났고, 그런 사건을 좌파 정부 때 가짜로 만들기 공작을 해서 그렇게 믿는 분 많은데 엄연히 북한 지령 받고 실행한, 제가 증인입니다. 이 모든 건 일본인 납치 사건을 비롯해서 전 세계가 다 증명했습니다. 이걸 자국민이 피해당한 사건을 자기네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망국적 범죄입니다. 그런 걸 현 정부에서 인정했는데 그 사람들이 아직도 그대로 출세하고 괴변을 늘어놓고 진실을 덮으려고 합니다. 제가 가짜면 KAL기 사건도 가짜입니다. ‘김현희 가짜몰이’는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드는 엄중한 범죄입니다. 수차례 이명박 정부에 호소했지만 의지 없이 방치되어 왔습니다. 과연, 대통령께서 알고 계실는지... 반드시 그들이 어떤 의도로 이런 걸 했는지 조사받고 관여했던 각 부처 책임 관련자들이 책임을 받고, 유가족들을 속이고 우롱한 것과 대한민국 국민들 속인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연자 : , 조갑제 대표
-방송일시 : 2012년 6월 19일 (화) 밤 10시
-진행자 : 최희준 취재에디터,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
출처 :종려나무 하모니카 Classroom 원문보기▶ 글쓴이 :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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