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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그림&좋은글

토스카니니의 일화와 생애..

by 설렘심목 2012. 5. 26.

 

 

 


Arturo Toscanini
(1867.3.25 ~ 1957.1.16)
※ 생애이탈리아의 파르마 태생. 파르마의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공부했고,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재능을 발휘했는데, 1886년에 리오데자네이로 의 오페라 시즌을 위해 편성된 가극단에 첼리스트 겸 합창 지휘자로서 참가했다. 이 때 지휘자와 청중과의 말썽으로 공연이 대혼란에 빠졌는데, 급히 대역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극적인 데뷔를 했다. 같은 해 11월에 고국에서도 지휘자로 데뷔하여 1891년에 제네바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는 한편 이탈리아 각지에도 객연하여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실적을 쌓아 갔다.

1895~98년은 토리노의 데아트로 레제로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고, 1896년에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연주회의 지휘를 맡았다. 1898년에는 드디어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극장 간부진과 충돌을 일으켜 약간의 중단 기간은 있긴 했지만 1908년까지 재임하면서 공연의 수준을 높였다. 그해 말부터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1915년에 사임할 때까지 이 극장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제1차대전 중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있었으나, 20년에는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을 재편성하여 미국에 연주 여행을 한 후, 이듬해 재개된 이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어 점차 강해지는 파시스트 세력과 싸우면서 1929년까지 재임했다. 한편 뉴욕 필하모니에는 1925년부터 정기적으로 등장하고 있었으나, 1928년 멩겔베르크의 후임으로 음악감독이 되어 이 악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1930, 31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외국인 지휘자로서는 최초로 등장했고, 후에 잘쯔부르크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하였으나, 대두하는 나찌스 체제에 항의하여 그 이후의 출연을 거부했다.
1936년에 뉴욕 필하모니를 사퇴했으나, 얼마 후에 그를 위해 조직된 NBC 방송국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어 1937년부터 17년간 재임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여 그의 최후의 황금기를
쌓았다. 그가 84세 때 1954년 4월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3년 후에 뉴욕에서 생애를 마쳤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는 완벽주의로 유명하다. 원보(原譜)에 충실할 것을 모토로 하고 연주상의
엄격함과 철저성은 추호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서적인 면과는 인연이 멀고 그
결과로 태어나는 음악은 강렬하고, 그 격렬한 집중력으로 듣는이를 완전히 압도한다.

※ 업적

토스카니니가 남긴 방대한 녹음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고, 브람스 교향곡 전집 역시 귀중한 자료이다. 오페라는 베르디와 바그너가 독점, 장기였다.
전곡으로 남아있는 베르디 [오텔로]와 [팔스타프]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도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인간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그의 유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 3부작](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로마의 축제)이다.
이탈리아인의 피가 끓어 넘치는 최고의 연주로 색채감과 조형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동곡 최고
명연의 자리에서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있다. 협주곡 중에서는 사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의
역사적인 연주실황이 필수반이다. 1943년 4월 25일 카네기홀 실황인데, 77세의 토스카니니와
호로비츠의 불꽃 튀는 협연은 전설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정도다. (이상 모두 NBC 심포니).
이 외에도 로시니, 베르디 등 각종 서곡집과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슈베르트 [교향곡 9번]도 추천하고 싶다. 토스카니니의 음반들의 음질은 동시대 다른 연주와 비교해도 건조한 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리마스터링 이전의 토스카니니 컬렉션 음반을 더 좋아해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꼿꼿하고 팽팽한 열기와 군기에 비견되는 단원들의 긴장감은 50년이 지났어도 여전하게 다가온다.

 

토스카니니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