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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그림&좋은글

백정 해방 운동의 선구자 박성춘

by 설렘심목 2012. 5. 22.

백정 해방 운동의 선구자 박성춘

이 땅에서 기독교의 공헌 가운데 하나는 하층민 전도로 인한 인간 해방 운동이었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빛이요 해방이었다. 이러한 혜택의 선구지는1862년 서울 관자골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춘이었다. 당시 백정들은 백정들의 공동체에 속하여 백정의 딸과 결혼해야 했고 그 아들도 백정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또한 백정은 칠천반(七購班)이라 불리는 포졸, 광대, 백정,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호적도 민적도 없었고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되었다. 주거 또한 제한되어 백정들만의 특수부락에서 살아야만 했다. 남자들은 상투를 올릴 수 없었고 망건이나 갓도 쓸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조금의 희망이나 절망을 뚫고 갈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박성춘에게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외동아들이 있었다. 박성춘은 자신의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찾아 가서 이들을 입학시킨 곳이 곤당골에 있는 예수교 학당이었다. 이 학당은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무어(S. F. Moore) 목사가 운영하던 학교였다. 봉출이는 학당에서 언문 산술 등 일반학문도 배웠지만 주기도문, 성경도 배웠다. 박성춘은 아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백정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그런데 봉출이가 열심히 학당을 다니던 1895,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북쪽에서 발생된 콜레라가 남한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박성춘이 바로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죽음 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의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 아들 봉출이가 낯선 외국인 2명을 데리고 백정마을에 왔다. 한 사람은 곤당골 교회의 무어 목사였고 또 한 사람은 당시 제중원 의사였던 에비슨(O. R. Avison)이었다. 당시 에비슨은 고종 임금의 주치 의사였다. 임금의 시의가 백정을 치료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것은 박성춘에게나 백정마을에 큰 화제거리였다. 이후 박성춘은 깨끗이 치료가 되어 나음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박성춘은 지금까지 서양인에 대한 편견의 벽이 무너지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고 마침내 전 가족이 곤당골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박성춘 일가가 정식 교인으로 등록하자 지금까지 잘 출석하던 교인 몇 명이 돌연 교회 출석을 중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더구나 안 나오는 교인들은 양반교인들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 양반교인들은 천한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로서는 양반이든 백정이든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결국 양반교인들 모두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교회는 박성춘의 가족만 남게 되었다. 교회를 떠난 양반들은 이웃에 홍문수골이라는 양반교회를 세웠고 곤당골교회는 상민(常民)교회가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박성춘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적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자신을 지지해 주는 무어 목사에게 보답할 길을 찾았다. 그것은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박성춘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 그의 전도로 교인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백정교회로 소문이 났다. 결국 교회는 그의 전도로 인해 점점 성장하여 3년 후에는 홍문수골 교회와 다시 합동하였고 초대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 교회가 바로 지금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이다. 그러나 박성춘의 활동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두 가지 운동을 통해 이를 실천했는데 하나는 정부를 상대로 하는 사회적인 운동이었고 하나는 백정들을 상대로 하는 계몽운동이었다. 그는 정부의 내각총서인 유길준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내용인즉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갓과 망건은 인간됨의 상징이었다. 그 결과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마침내 백정들이 갓과 망건을 쓰게 되었다. 박성춘은 500년간 쓰지 못했던 갓과 망건을 제일 먼저 쓴 인물이 되었다. 이때 어떤 백정들은 너무 기뻐하여 밤에 잘 때도 갓과 망건을 벗지 않고 쓴 채로 갔다는 얘기도 있다. 이 같은 영향력을 배경으로 박성춘은 1898 10 28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관민공동회에 민중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연설도 했다.

살펴본 것처럼 박성춘은 백정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돌파구가 없었다. 사회적 멸시감이 그를 포위하였고 죽음만이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복음은 그를 천민에서 민중의 지도자로 올려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종교요, 신분을 넘어서는 상승의 종교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종교이다.

황명길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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