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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시사.

한명숙남편 박성준은 간첩이었다.

by 설렘심목 2012. 3. 2.

한명숙남편 박성준은 간첩이었다.

http://blog.daum.net/chunchugag/21   글 : 골프로 패가망신  2012.01.24 12:39

 

 

“나는 감옥에서 몇 해 사는 동안, 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 나갈 것 같습니다. 아주 멋지고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산악인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나 자신을 닦습니다. 이 경험 속에서 당신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마터면 가장 가까운 생의 동반자를 아주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여성운동 및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 1979년 구속됐던 한명숙 의원(일산동구. 통합민주당)이 자신보다 11년 먼저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있던 남편 박성준 교수(성공회대)에게 보낸 옥중서신의 일부다. 부부가 모두 옥살이를 해야했던 암울한 시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서로를 존경하고 격려했던 단면을 볼 수 있는 문구다.

 

사실 신혼 6개월만에 박 교수가 구속, 13년 간 매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옥바라지를 해 온 한명숙 의원의 사연은 이미 유명하다. 이후 한명숙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장관으로서, 또 총리로서 일을 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됐던 사람이 바로 남편, 박성준 교수다.

 

그는 이번 선거운동 기간동안 잠자는 아내가 깰까 조심하며 아침이면 몸에 좋다는 ‘마’를 썰어주고 또 멸치볶음 같은 간단한 반찬이기는 하지만 도시락도 준비해 주는 자상한 남편이다. 또 아내의 선거운동을 도와 유세장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하며 함께 명함을 돌리는 일에도 분주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면 집 근처 뒷산을 함께 오르며 시간을 보낸다는 박 교수는 “세상에서 존경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내”라며 “예전에는 아내가 내 영향을 많이 받았다지만 이제는 내가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동반자로서의 아내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다.

 

 

민주쓰레기당 대표인사로 국립묘지 참배에 김대중전대통령에게만 참배 하였다는 사실에서 요런 조부랭이가 어떻게 이 나라에 장애가 아닐가?

 

     

 

 

국립묘지엔 6.25전쟁 참전 용사 그리고 8.15 광복 인사등 애국애족선열이 계신곳인데 그런 어른들을 무시한 한명숙은 빨갱이가 아니면 그렇게 못할짓인가 합니다.

 

둔천동 보훈병원에 가 보십시요.

 

그 많은 6.25참전용사

 

그 많은 월남참전 용사

 

그 분들이 계셨기에 밥 잘 먹고 등 따시게 세계10위권에 경제대국에 살아서 김명숙도 남편은 교수로 자기는 당대표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아니 한가

 

 

역시 평양출신에 남편인 성공회대 선생인? 남편(경남 통영)과 너무도 같네. 빨갱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거든. 명숙씨는 아무리 감추려도 진실은 남거든. 놈현과 스승인 대중이가 절러도외눈 모두를 싫어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거든. 오로지 홍어를 진상하면 공천을 받았으니까. 따라서 그 수족들(한화갑, 박지원, 권노갑등등)

박성준씨는 1940년 경남 통영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자신의 妻 한명숙, 박경호, 김국주 등을 포섭한 혐의 등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朴씨는 1981년 출소 당시 해방 후 당시까지 가장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다 출소한 한명숙남편 박성준은 간첩이었다.

최장기수로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출소 후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神學)을 공부한 박성준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맑스주의자” “평화주의자” “퀘이커”등으로 소개해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기존 언론에 보도된 관련내용을 가감 없이 게재해본다. 

 

 

“...朴 선생(박성준氏) 순서가 돌아오자 자신은 지나온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기독교인, 맑시스트, 퀘이커, 불교에 막 눈을 뜬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 살아온 내력으로 사람들과 소곤소곤한 만남을 갖고 싶어 마이크를 쓰는 모임, 인터뷰, 텔레비전 출연은 가급적 사양한다.(週刊기독교 2003년 11월 1509호 인터뷰기사 中)”

 

 

朴씨는 季刊 ‘새길이야기’2001년 겨울(3호) 인터뷰에서도 ‘출소 후 신학(神學)수업의 이유’에 대해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보자.

 

“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 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맑시스트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처음에 일주일 코스로 펜들 힐 영성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朴씨는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戰*이라크戰*북한제재 등에 반대(反對)하는 소위 반전평화(反戰平和)운동을 벌여왔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전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侵掠)(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전은 “최첨단 신무기를 대거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21일 著‘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등)”으로, 91년 걸프전은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등)”며 反美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는 특히 미국의 대북(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김정일 정권의 不法행위를 어떠한 형태로도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는 글을 일부 인용해보자.

 

“설마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民衆)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경각심을 드높여 예의 주시하자. 부시 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평화음악회, 평화단식*농성 등 행사를 벌이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산하자”

 

그는 같은 글에서“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외세*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를 내 건 박성준씨의 반미(反美)주의는 인류보편의 범죄로 규정되고 있는 ‘테러리즘’에 대한 우호적(?) 판단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슬람의 지하드[소위 ‘성전(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며 심지어 9*11테러에 대해“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논문 中)”고 말했다.

 

 

같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박성준씨의 반미(反美)주의는 반전론(反戰論) 또는 평화론(平和論)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테러행위나 김정일*후세인 등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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