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좌파혁명의 꿈… 이제 북한에 대한 침묵은 양심을 버리는 것"
시위 주동 투옥, 대학 除籍… 용접공 등 14년간 노동운동, 급진좌파혁명을 이루려는 꿈
북한 주민들에 대한 原罪 의식, 봉급 80만원 받고 일에 매달려…
목이 난자된 실험용 쥐 배달돼
"영화는 나도 전혀 모르는 세계라 답답하다. 그동안 캠페인·학술행사를 하면서 정치부나 사회부의 북한 담당기자들과 만났지 이런 대중문화를 해본 적 없다. '도가니'가 사회여론을 일으킨 것처럼, 북한 인권의 심각성에 대중적 공감을 얻어냈으면 하는 것인데…."
사무실 벽에는 '북한인권국제영화제' 포스터가 붙어 있다. 10일과 11일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관람 무료. 흥행 여부는 알 수 없다. 매스컴에서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다.
"요즘 유명연예인들이 알리면 대중들이 동조한다. 대부분 진보 성향이지만 누군가가 이 영화에 관심만 표시해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우파가 북한인권을 주장하니 좌파는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좌우(左右)이념 갈등으로 이 보편적 가치가 굴절됐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80년대 골수운동권 학생이었다. 시위 주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대학 3학년 때 제적됐다. 그 뒤 용접공·인쇄공으로 바닥에서 14년간 노동운동도 했다. 우리 사회의 노동자·농민을 의식화시켜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게 그의 꿈이었다.
세월은 가끔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변절일 수도, 각성(覺醒)일 수도 있다. 그는 '급진 좌파'에서 '보수 우파'로 넘어왔다. 목이 난자된 실험용 쥐를 담은 소포가 그와 동료들에게 배달된 적도 있었다. '희대의 변절자 너절한 배신자들에게 당장 퇴장할 것을 엄중히 경고한다. 주체 89년(2000년) 12월 19일'이라는 협박과 함께.
그럼에도 그는 10년 넘게 '북한민주화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표적 이동이다.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 북한정권과 싸우는 중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사회의 둔감함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걸 안다.
―북한 주민의 참상은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걸 인식시키는 게 왜 어려운가?
"좌파는 알면서도 침묵한다. 국내의 정치적인 이해관계, 북한과의 관계, 자기를 지지하는 집단과의 관계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인권을 보다 중시해온 좌파로서는 북한 주민에 관한 한 위선과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당신은 한때 좌파 급진혁명에 빠져있었다. 어쩌다가 북한인권운동으로 옮겨갔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1989년) 때 인민해방군 탱크가 인민을 깔아뭉개는 것을 보고 좌절했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붕괴됐다. 현실에서 내 이념은 이미 무너졌다. 많은 방황이 있었고 동료들과 논쟁도 많이 했다. 그러던 중 탈북자 수기(手記)를 읽게 됐다. 믿지 못해 직접 탈북자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 '인민이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냐'고 했을 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북한에 관심만 있다면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 아닌가?
"그전까지 관심은 우리 체제 안이었지 북한은 아니었다. 학생 시절에는 북한이 좀 더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탈북자 수기를 읽으면서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의 '고통받는 민중을 위한' 마음, 아무런 이념의 옷이 입혀지지 않았을 때의 순정한 마음이 살아났다. 대체 이건 말이 안 됐다. 전두환 시절에 얻어터지고 감옥에 갔지만 북한의 끔찍한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걸 개선하는 것, 이게 내 임무임을 깨달았다. 1999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 황장엽 선생을 찾아가 공부했다."
―전환의 폭이 너무 크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사람들은 내 생각이 언제 바뀌었나를 묻는다. 오늘 깨어보니 어제와 달라 있었다는 식으로, 하루아침에 딱 바뀔 수는 없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어 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 다닐 때 그냥 멋모르고 '유행'처럼 운동을 했던 것인가? 80년대 초에는 그런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 형님을 통해 그런 영향을 받았다. 이미 '공장의 불빛'(김민기 노래)을 알았다. 재수를 하면서도 '우상과 이성'(리영희) 같은 책을 봤다. 대학가와 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을 때 재수생 신분으로 차마 참여는 못하고, 새벽 일찍 학원에 나와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칠판에 몰래 적어놓았다. 연세대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준비된 운동권이었던 셈이다. 탈춤반 입회원서에 '민중의 고통을 함께하는…' 식으로 적었던 걸 기억한다. 그러니 서클 선배들이 '물건 하나 들어왔다'며 술을 엄청나게 먹였다. 일본어로 된 좌파이념 서적들을 읽고는 내 동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대학 1년 때 문무대(대학생 병영훈련) 입소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데모 주동자로 잡혀가 하루 만에 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이 사실을 통보받은 그의 부친은 "하라는 공부는 않고 데모하겠다면 너 죽고 나 죽자"며 식칼을 들고 나와 집안이 난리가 났다. '운동을 해도 앞장서지 않는다'로 무마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 대학 3학년 때 교내 시위를 주동해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부친은 감옥에 한 번도 면회를 오질 않았다. 그해 5공 정권의 유화조치로 징역 6개월 산 뒤 나왔다.
―부친께서는 얼마 전 별세한 걸로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부자간 화해는 2003년쯤 했다. 당시 내가 '이라크 파병' 찬성론자로 방송 토론에 나갔다. 아버지가 우연히 보고는 '우리 아들이 이제는 좋은 일을 하는구나' 생각하신 것 같다."
그는 대학에서 제적된 뒤 용접기술을 배워 인천에서 용접공을 했다. 노조운동을 하기 위한 위장 취업이었다. 그 뒤에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을지로 골목 인쇄공장에서 일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간사를 맡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조직의 대표를 맡거나 앞에 나설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하층노동자로서 살고 싶었다. 러시아 혁명을 할 때 한 달 내내 지하에서 등사기로 삐라를 인쇄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삶에 공감을 많이 했다."
- '따뜻한 이웃'의 한 장면.
―본인은 어떤 노선을 갖고 있었나? 북한체제를 추종하는'주사파'에 빠져있었나?
"주사파는 서울대 82학번인 김영환(당시 운동권 유인물 '강철서신'를 만들고 월북해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음)씨 등의 주도로 나왔다. 나는 체질적으로 '수령론'과 '우상숭배'는 안 맞았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공부하다가 점차 중국의 모택동 혁명에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 농민을 의식화 조직화한 뒤, 결정적인 시기에 인민봉기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꿈을 꿨다.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급진폭력 혁명 노선은 착오였음을 알았다."
―젊은 날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념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1994년 철도청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기능직 최하등급으로 들어갔다. 그게 마지막 공장 활동이었다. 그때는 이미 민주화되고 노동자들의 자체 역량도 올라가 있었다. 더 이상 지식인이나 운동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점점 나도 일반 직장인처럼 되어갔다. 그때 김영환씨 등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외국에 공부하러 나갔을 것이다."
―소위 '전향한 주사파'인 김영환씨 등과 어떻게 만나게 됐나?
"허인회(고려대 운동권)씨 등이 1996년 '푸른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100명 이상이 모였다.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이 단체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현실 정치를 지향하는 쪽과 사회주의를 대신할 사상을 모색하는 쪽이었다. 정치 지향하는 친구들은 속된 말로 장사가 안 되니까 다 떨어져나갔다. 결국 새로운 사상을 만들려는 김영환씨 등 10명도 채 안 된 사람만 남았다."
이들은 잡지 '시대정신'을 창간(1998년)하고, 이듬해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앞에 나서서 하는 일에는 취미가 없다는 그가 대표 관리직을 맡았다.
―당신은 북한전문인터넷사이트 '데일리NK'의 발행인도 맡았다. 빚을 많이 졌다고 들었다.
"올봄에 발행인을 그만두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집안(부모)에서 많이 끌어다 썼다. 직원들은 말도 안 되는 봉급을 받는다. 미혼은 80만원, 기혼은 110만원, 아이가 있으면 수당 10만원을 더 준다."
―그런 직원 처우로 어떻게 조직이 굴러가는가? 모두 현실적 생활이 있을 텐데.
"스무명쯤 되는 직원 중에는 한총련 계열 운동권 출신이 다수다. 이들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원죄(原罪)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대학 시절 '주사파'에 물들어 북한 정권의 탄압에 동조했다는 반성을 하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책임감이 '데일리NK'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생활을 위해 각자 부업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데일리NK'는 함북 회령에서 발생한 공개총살 동영상, 북한 화폐개혁 등 세계적인 특종을 했다. 이런 정보력은 어디서 나오나?
"우리는 정보기관과 숨바꼭질하는 지하운동을 해봤다. 이 때문에 비밀사업을 하는 노하우가 있는 셈이다. 중국에 사람을 보내 탈북자를 지원하고 북한 내부에 망(網)을 많이 만들었다."
―북한 내 휴대폰 보급이 늘어나면서 정보 수집도 용이해졌나?
"북한에 휴대폰이 60만대쯤 보급됐다고 하지만, 이는 북한 안에서만 터지고 도·감청이 된다. 그러나 중국 휴대폰은 압록강 국경 30㎞ 안까지 터진다. 중국 휴대폰과 선불카드를 북한 정보원에게 넣어준다. 약속된 시간에 통화한다. 중국에 나가 있는 특파원이 직접 통화하고, 서울에서도 직접 가능하다."
―본인은 이제 우파(右派)가 된 것인가?
"나는 자유주의자다. 좌파 혁명가에서 온건한 좌파로, 다시 자유주의자로 서서히 건너왔다. 이를 한국 기준으로 보면 우파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과거에는 끔찍이 싫어했지만 지금은 긍정적으로 본다. 산업화가 있어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제 자유주의 가치를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좌파가 양심이 있다면 북한 주민의 문제에서는 눈감아선 안 된다."
―당신 활동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김정일 정권만 몰락하면 북한 주민들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이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면 된다. 끔찍하게 막혀 있다. 물론 내가 하는 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는데 가만있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북한인권영화제는 10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한다. 북한 주민이 직접 내부에서 촬영한 필름을 일본인 이시마루 지로가 편집한 'North Korea VJ'와 납북자 가족의 문제를 조명한 '외로운 메아리' '선처' '두만강' '인사이드' '량강도 아이들' '겨울나비' '크로싱'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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