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훌륭한 아버지를 왜 버렸는가 ?
1) 1968년 1월 21일, 김정일은 김신조가 이끄는 31명의 특수부대를 청와대로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다.
2)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문세광은 박대통령을 저격하려다가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여 살해했다.
문세광은 일본에 형성된 한민통소속이며, 이 한민통은 1973년에 김대중이 간첩들과 함께 일본에서 결성한 반국가단체였다.
3) 2002년 5월 11-14일간 김정일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공동선언을 반드시 이행하자는 약속을 하고 왔다.
그 후 박근혜는 김정일이 약속을 잘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 시원시원하게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이라고 칭찬했고,
2005년 5월 16-22일에는 6박 7일간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과 우리 애국국민들의 정서와는 반대되는 발언들을 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북한 핵에 대한 김정일 입장을 지지한 것이다.
김대중이 늘 주장했던 포괄적 접근을 주장했고, 핵을 포기시키려면 북에 마셜 플랜과 같은 반대급부를 주어야 하며
미국이 북한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며 북한 편에 섰다. 국보법의 수정입장을 지지했고,
특히 정부참칭 조항의 삭제를 주장했으며,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4) 2004년 8월 12일, 박근혜는 역적 김대중을 찾아가 아버지가 김대중에 지은 죄가 있다며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SBS는 8시 뉴스에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박 대표가 오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유신을 사과했지만 이것으로 유신과 관련된 논란이 해소될지 주목됩니다.”
5) 2005년 1월, 박지만 역시 “아버지가 독재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사죄했다.
이어서 박근혜는 “나를 누구의 딸로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필자는 박근혜가 오늘의 박근혜로 대접받는 것은 그가 박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그가 그만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박정희가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김대중을 치켜 올리고
박정희를 매우 초라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박근혜는 아버지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고, 아버지를 방어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하는 자들은 대부분 빨갱이들이다.
독재자는 자기의 호강을 위해 백성을 학대-학살하는 폭군을 의미한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이 바로 독재자의 전형이다.
그런데 빨갱이들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는 위대한 수령동지라 하는 반면,
밤잠을 자지 않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고 빨갱이들에게도 호의-호식하게 만들어 준 박정희를 향해 독재자라 하는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탄압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탄압받을 짓을 한 자들 뿐이다.
김대중과 같이 빨갱이 영혼을 가지고 속으로는 국가를 파괴하고 겉으로는 양의 가죽을 쓰고 국민을 선동하는 인간들,
김영삼과 같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라는 요구까지 할 만큼 3류 건달의 영혼을 가진 인간들뿐이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영혼을 가진 자들은 탄압정도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 추방돼야 할 인간들이었다.
박근혜는 이런 논리를 펴 아버지를 적극 방어했어야 했다.
그런데 논리가 없었는지 신념이 없었던지 영혼의 군번이 달랐던지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는 갑자기 아버지를 버렸다.
빨갱이들은 유신과 박근혜를 동일선상에 놓았다. 이재오는 박근혜를 유신의 딸이요, 독재자의 딸이라 몰아쳤다.
입만 열면 연좌제를 외치면서 연좌제를 폐지케 했고, 그래서 연좌제 폐지의 덕을 보고 있는 빨갱이들이 어째서 멀쩡한 사람들에게 친일파 자손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멀쩡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자 하는가?
연좌제 폐지를 그토록 주장했던 자들이 어째서 박근혜에게는 유신의 딸이라느니 독재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씌워 마타도어를 일삼는가?
박근혜를 이렇게 악랄하게 공격하는 빨갱이들의 수장 이재오를 보자.
이재오는 남민전이라는 남녀가 혼숙하는 더러운 반역단체에서 ‘한국주’라는 암호명을 가지고 폭탄 운반책을 수행했고,
밤마다 몰 래 다니면서 삐라를 살포하던 인간이었다.
박근혜는 왜 이런 인간에 대해 공격을 하지 못하는가?
박근혜가 만일 필자의 소신과 유사한 소신으로 아버지를 방어했다면 지금 그는 이 나라의 영웅이 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중요한 국가적 문제를 놓고 긴장이 고조돼 있을 때마다 그는 번번이 야당 편에 섰다.
심지어는 용산폭동에 대해서까지 야당 편을 들었다.
2005년 1월은 노무현 떨거지들이 한참 반일감정을 유발하고 있을 때였다.
노무현과 열우당 패거리들은 연일 민감한 외교문서들을 공개하면서 박근혜에게 엄포를 놓았다.
특히 한일협정에 대한 핵심문서가 공개되면 마치 박정희를 부관 참시할만한 굉장한 내용들이 공개될 것처럼 으름장들을 놓았다.
바로 이 때 박지만과 박근혜가 아버지를 버린 것이다. 이에 필자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이 두 남매에 대한 분노도 일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글을 게시했다. 이 글은 아고라에서도 최고의 글로 인정됐었다.
문서공개 할수록 박정희는 빛난다.
한일협정과 박정희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이었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 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 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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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 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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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싸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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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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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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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17,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만큼 감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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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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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야 할 한국인의 정신: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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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희의 선택
더러는 박정희가 청구권 자금을 유용했거나 편취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만
다른 대통령에게 맡긴 세금은 상당부분 증발됐어도,
박대통령에 맡긴 청구자금은 포항제철공장, 소양강 댐, 고속도로 등에 다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투자가 오늘날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5,000년 역사를 통해 가장 못나고 가장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 12위 경제 국가로 일으켜 세웠다.
“조센징이 뭐 하나 제대로 하겠어?”
자학과 무능에 빠진 한국인에게 우리도 하면 세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정신적 지도자였다.
- 생략 -
2011.2.6.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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