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고려 11월호에 실린 컬럼인데 그곳 지면관계로 일부 편집되었기 원문을 올립니다.)
미국 등 유럽에선 이미 목회자가 목회 외 다른 직업을 갖고 있어서 2-job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퍼져있다고 한다. 그 뿐인가? 영국의 4만7,635개 교회가운데 1,315개 교회가 뮤직바, 슈퍼마킷, 심지어 캬바레, 나이트클럽으로 팔려나간 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무임 중에 있는 목회자가 전국에 걸쳐 약 4만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그들은 결국 호구지책을 찾아 여기저기서 간신히 견디고 있는 것으로 보도는 밝히고 있다. 미국의 2-job과 북한개방시 요구수치에 예비하신 주의 뜻으로만 자위하기엔 우리의 개척현실이 심각하고 안쓰럽다. 누가 그랬다. 이제 목회는 사양산업에 접어들었고 아마도 3D직종으로 분류할 날이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라고,... 어이없는 말이다.
그러나 보리고개를 냉수 한 사발로 달래던 시절, 멍석깔고 부흥강사의 쉰 목소리에 “♬ 불길같은 성신여..” 목이 터져라 찬송하던 교회부흥은 빛바랜 추억의 수첩속으로 사라졌다.
6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1962년 6층, 6개 동, 642가구의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도시건축의 붐을 일으킨 집합주택단지의 문화생활은 반세기동안 편의주의와 신속하게 합의되어 이제 아파트문화코드가 현대인의 생활 구석구석 깊이 들어왔다. 수려한 외양과 주부의 동선(動線)의 거리가 짧고도 편의적인 디자인이 아파트단지와 내부설계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가 분양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서글픈 얘기지만 교회부흥의 주요한 점검리스트 가운데 대형할인매장과 꼭 같은 체크사항이 80%가 넘는다. 접근용이성과 주차의 편이성, 인구밀집도, 쾌적한 실내디자인과 건축미학적인 외관, 유아시설, 개척과 재정부담의 여부, 심지어는 그 교회에 대출금까지 알아본다고 하니 이야말로 아파트문화가 신앙의 순수성까지 잠식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제헌국회는 당시 이승만 임시의장이 동의, 재청을 받아 지명한 감리교목사 이윤형의원의 기도로 시작한 이래 국민모두가 국가 주요행사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불러 하나님을 고백하는 나라로 문을 열었다. 누가봐도 영국, 미국에 이어 이젠 제사장나라의 황금촛대가 대한민국으로 옮겨져 영광스러운 선교의 불을 밝히고 있는 것, 인정한다. 하지만 작은 개척교회의 현실은 선교일등국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아니 어쩌면 선교일등국답게 잔혹하다. 그럼에도 교회를 통한 구속사의 맥이 인류역사의 현장 어떤 정황과도 무관하게 오늘도 모든 역사의 축을 이루며 진행되고 있는 것 우린 알고 있고 또 실제 인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것을 핑계할 수 없다.
항상 강대상에서 선포하지만 생의 수레바퀴 어떤 축간(軸間)의 사슬도 “받는 자의 몫‘이 아닌 것 없다. 질식할 것만 같은 개척현장의 암담함을 합동측 개척교회교역자모임 기도회에서 강의한 ’개척목사의 애환’이란 것을 인터넷에서 접해 읽어보았다.
대를 이어 물려받은 가난과 물질고통, 사람없음의 애환, 목표와 비젼상실, 자기관리부실, 영적침체, 소명감퇴색, 골병드는 아내와 아이들의 퀭한 눈동자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구구절절 가슴쓰리게 이어졌다. 그 아래 어느 사모의 댓글이 선한 도전을 주었으나 역시 딱 집어낼 수 있는 대안제시는 아니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도 작년 5월 건축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1년간 겪은 풍화(風火)로 십년 이상의 값진 수업을 한 덕분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종을 단련하시는 주님을 한껏 찬송하는 영적포만감과 눈물과 기쁨이 있었다.
그렇다. 감동적인 좌우명의 찬란한 휘호아래서도 여전히 현실은 현실이다.
“목회는 목회자만큼 된다. 그리고 목회자는 목회자부부이다.”라는 말에 짓눌려 아무리 힘을 써도 지워지지 않는 열등감과 수치심과 현실적 고통이 소명감과 정체성에도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선포한 말씀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흔들릴 수 있다. 거기다 주변은 모두 자기잣대들 들이대어 쉽게 말해버림으로 더욱 개척자를 웅크려 들게 한다.
함께 길을 가던 나그네와 스님이 한잔 술에 노독이 퍼져 곯아떨어졌다. 아침 일어나보니 스님과 나그네의 노잣돈뭉치가 함께 안 보인다. 그런데 살펴보니 자신이 삭발에 승복을 입고 있었다. 나그네가 주인에게 묻는다. “주인장, 스님은 여기 있는데 난 어딜 갔수?” 자신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난 과연 누구인가? 운전중 핸들을 놓치듯 목회자가 자기를 잃으면 끝장이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15:8)” 누군가 개척의 현황이 어찌나 힘든지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더니 지하실까지 내려가 보고서야 비로소 하갈을 찾아오신 하나님음성이 들렸다고 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나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1:12)
모두가 나 때문인 것을 자인하면서 사망의 바다에 자원하여 내침을 받을 각오로 십자가를 진 채 주님 앞에 얍복강의 씨름을 할 수는 없을까?
현재 남아도는 목회자 4만 여명은 분명히 주님의 계획가운데 언젠가는 귀하게 쓰임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속히 들어 요긴하게 쓸 자를 찾고 계신 주님, 그 주님 마음에 합하고 주님 눈에 드는 자, 누구인가?
십자가의 도는 변함없이 죽음 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
구스타프 마알러가 제 2번 교향곡악보를 인쇄소에 보내면서 표지에 부제를 이렇게 달았다. “부활, 그것은 먼저 죽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어린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아비의 단장(丹粧), 마알러는 주님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그 아픔을 심포니로 절규함으로 딸을 향한 사랑이 다시 선율 속에서 살아나는 감동을 전한다. 이 곡에 취해 생과 사의 능선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십자가를 묵상하던 영혼의 유희, 젊은 날의 추억이 한낱 꿈이 아니었다. 개척의 동지들, 소리없이 삭아 가는 육신과 영혼을 부여안고 오늘도 사막같은 개척현장에서 한 모금 생수를 찾아 피눈물을 흘리는 주의 종들...
주는 사랑이시니 주의 눈은 끝내 개척현장에 꽂혀 있으시고 개척 중에 흘리는 목회자부부의 눈물은 생명을 살리는 사막의 생수가 될 것이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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