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조선 조총수 5,000인 -제 1 편-
17세기 초, 조선은 참으로 형편이 고달팠다.16세기 말 정신 상태가 온전치 않은 일본 도요도미히데요시가 자행한 조선 침략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야했다.
남쪽의 침략군에 치명타를 당한 조선은이제는 북 대륙에 요운(妖雲)처럼 일어나는불길한 기운에 다시 한번 불안에 떨어야했다,
명(明)이나 조선 공[共]히 야만족으로 경멸했던여진족이 누루하치라는 영걸을 만나 그 야성이폭발하여 민족 무력이 엄청나게 결집되었던 것이다.
반면 상국(上國)이라 불리던 명은 왕조의 말기적 증상을 점점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여진족장 누루하치를 이렇게 만주의 대 실력자로 길러준 사람은 만주주둔 명군의 총 사령관격인요동 총관 이 성량[李 成梁 ]이었다.
[먼주라는 명칭은 나중에 생긴것이고 이때는 요동, 또는 여진땅이라 불렸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죄를 짓고 만주지역으로 도주하여 명 군대에 입대했던 조선인이었다. 그는 이민족이지만 타고난 능력에 성실함으로명나라 군대에서 인정을 받고 진급을 거듭해서만주 지역의 실력자가 된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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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량의 비호로 중국과의 무역권을 쥐게 된 누루하치는그 조직과 재력을 동원해서 세력을 불려갔다,그의 세력이 불온하게 커진 것에 놀란 명 조정은 무역축소,농경 방해등으로 그를 압박했다.이에 참지 못한 누루하치는 반기를 들고 명군이 장악하고있던 무순을 공격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누루하치는 한발 더 나아가 조상 여진족 아골타가건립했던 금나라를 잇는 후금국 개국을 선포하고황제의 칭호를 썼다.
반면 명의 국력은 많이 피폐해져서 그간 깔보아 오던 변방의 오랑캐를 토벌할 대부대 동원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대부대 동원이 어려웠던 여러 이유중에 명나라 황제신종의 황당하기 짟이 없는 수전노 근성도 한몫했다.
중국 역사 최고의 왕소금 구두쇠인 그는 국가 비상의상태를 당해 응당 활짝 열어야 할 궁중의 금고를인색하게 연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먼 옛날 흉노족이나 몽골족의 토벌에 50만명까지 병력을 동원했던대명국의 위용은 간데 없었다.그러나 소문은 50만 병력을 동원했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동원 가능 병력은 단지 그 10분지 1에 지나지 않았다.병력 부족의 난관에 봉착한 명나라는 조선과 누루하치와 적대 관계에 있는 다른 해서 여진족, 즉 예혜족에게병력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에 병력파견을 요청한 것은 요청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에게 다 망해가던 너희들을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상국[上國]인 우리가 아니었더냐 ? 너희들이 금수(禽獸)가 아니라면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명(明)이 임란 때 조선을 도운 것을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고 불렀다.
명나라는 이참에 단단히 조선의 덕을 보겠다는 바랬다.
한편 파병의 요청을 받은 조선의 내부 사정은 그렇게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광해군 조정의 주권을 쥐고 있는 이 이첨을 중심으로 한대북파들은 명분론에 사로 잡혀 상국(上國)의 지시를 따라 냉큼 파병하자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명분을 따라 냉큼 파병할 수 없는 속앓이가 조정에 있었다.
북에 파병하기에 실질적으로 큰 문제는 파병에 소요되는경비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광해조에도 임진왜란의혹독한 후유중을 극복을 못하고 있었다.파병에 필요한 경비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짜 내야 하는데 이 피폐한 농촌 사정에엄청나게 무거운 부담이었다,무거운 재정 부담은 광해군 실각의 한 원인이기도 한두 궁궐의 무리한 건설 때문에 더욱 힘들어져 파병을 한층 난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파병을 주저하게 만든 조정의 신중함 중심에광해군이 있었다.
그는 백성이 죽건 말건 명분이나 내세워서 파병하자고하는 권신들과는 달리 휠씬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은 왜군에 쫓겨 선조가 북으로 피난할 때 급히 서두르는 정황에서 왕세자가 되었지만 의주에들여 박혀서 여차하면 중국으로 도주할 생각만하고 있던 아버지 선조보다 더한 전쟁 수행의 역할을 했었다.
소위 분조(分朝)라는, 조정의 전방 사령부 비슷한 것을운영하며 한반도 북부를 직접 돌면서 백성들을 격려하고 의병들을 지휘하였다. 그는 병을 얻으면서 위험한 접적지구까지도 방문하면서 전화(戰禍)를 겪은 백성들의참혹한 현상을 똑똑히 보았었다.
이 현장 경험은 그에게 또 다시 국토를 전쟁 속에 몰아넣어 백성들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다는 군주다운 결심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는 명나라의 강요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야인(野人)이라는 한 등급아래의 야만인으로 보았던여진인의 무서운 성장을 그는 누구보다도 냉철한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기본적 교양인 공맹(孔孟)의 도(道)는 커녕문자도 없는 주제에 기껏한다는 짓이 조선 국경의 마을들을 노략질이나 해대는 여진인들을 인간으로 보지를 않았다.
오죽했으면 명군 세종(世宗)조차도 야인들을사람이 아니라고 평했을까.
그런 좀도둑들이 가공할 군사력으로 성장했어도조선의 사대부들은 좀처럼 현실을 인정하려 들려고하지 않았다.
1792년에 북경을 방문한 영국 외교 사절이 황제를 배알하는 장면을 그린 영국인 화백의 그림. 청의 황제를 돼지같은 야만인으로 그린 그들의 시각이 나타나 있다.
여진의 야만성이 그때까지도 느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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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광해군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무수한 정보를 모으며 사태를 지켜보았다.
면밀한 검토 끝에 얻은 그의 결론은 이 야만인들의 집단이 조선은 물론 중국도 패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의 존재로커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정보판단에 더해서 광해군은 답답한 신료(臣僚)들과는달리 명에 대해서 감은(感恩)의 기분 같은 것은없었다. 명은 두 번째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에앉는 것을 여러 트집을 잡으며 막으려 했었다.
더구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향촌 곳곳에서 갖은 행패를부리는 명군(明軍]들의 만행도 똑똑히 보았고,아버지 선조에게 함부로 대하는 명의 행패도 잘 보았었다.
그에게 재조지은 같은 명분은 한갓 코웃음 대상이었다.오직 그가 추구했던 것은 조선의 현실적 이익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이 야만인들을자극하지 않으려는 양다리 외교애 전력을 다했다.그런 판에 터져나온 명나라의 협박 섞인 파병요구는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했다.
그렇게 대국(大國)의 강요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어 왔지만 드디어 명나라 조정 내부에서 겁주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재조지은을 모르는 저런 배은망덕한 나라를 그냥 둘 수는없다. 여진보다 조선부터 손을 보자하는 소리로 마구 나올만큼 명나라 조정의 민심이 험악해졌다.마냥 미루다가 후금에게 당하기 전에 명나라에게 침범할 구실을 줄 수도 있었다.여기에 더해서 현실감각은 없으면서 명분론에는 집착하는대북파 신료들이 명나라의 요청을 빨리 받아 드리지고 더욱 아우성을 쳤다.
이들 정 인홍과 이 이첨등이 이끈 대북파는 광해군몰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전횡을일삼았는데 이때도 심할 정도의 채근이 있었다.
현실주의자며 정보 맨이었던 광해군은 밤에 잠을자지 않고 고민하다가 결국에 파병하기로 결심했다.그 결심은 복잡한 것이었다.명군이 탐날 만한 정예 부대를 광해군은 가지고 있었다.임진왜란 현장에서 왜군 전투력의 피해를 누구보다도생생하게 체험했던 광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군사력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그의 눈은 임진란이후 검은 회오리처럼 커지는 북방의 여진족이었다.
현실주의자이며 실리주의자였던 광해군은 도요도미가문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막부가 수교를 요청을해오자 주변의 신료(臣僚)들의 맹렬한 반대를무릅쓰고 수교에 동의하였다.
확대일로에 있는 북방 여진족의 위협을 의식한교린(交隣)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사신 편에 은밀히 성능좋은 왜검(倭劍)과 조총의 대량 수입을 타진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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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사실이 도쿠가와의 손자이며 3대 장군인이에미쓰[家光]가 칼의대량 수출을 검토하게 했던계기를 제공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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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군사력의 중추력이 조총[鳥銃] 화력에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 다네카시마에 포르투갈로부터 최초로 전해진 조총 초기형 [처음에는 전래지 이름을 따서 다네카시마라고 불렀으나 나중에는 데포가 일반 명칭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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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원수에게 조총 구입을 시도할 정도였던 광해군은1613년 그 때까지 조총청이라 불리던 화포 제조 기관을대폭 확대해서 화기 도감이라는 새 조직으로 변환시키면서다른 비용을 줄여 가면서 조총을 비롯한 대량의 화포 제조에 온 힘을 쏟았다.
이곳이 아마도 前 서울 시청 공사중에 발견했던 화포 도감 터가 아닌가 한다.
광해군의 심혈을 기우린 노력으로 조선군은 강력한 조총대를 보유할 수있었다.
일본군은 이 조총대를 데뽀다이[鐵砲隊]라고 불렀다.그의 조총대 육성은 여진족의 막강 철기병(鐵騎兵)을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이미 그 때 적의 기병 돌격에는 화포공격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만주 평야에서 여진의 기병 돌격에 몇 번 혼쭐이 난명은 조선 조총부대가 절실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명은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조총 부대를 보내라!”
파병 결정을 한 광해군으로서 거절할 명분이없었다.
그는 조총수 5,000 명에 기타 부대를 합쳐서 일 만 병의 파병 부대를 구성했다.
이 파병에 조선은 솥 밑바닥을 긁어 밥알을 모으듯 엄청난 국고를 지출했다.
이렇게 편성한 부대는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였다. 그로부터 40여년 전 1575년 일본 전국시대에 큰 에포크가 된 나가시노 전투에서 일본 최강을 자랑하던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병대 일만여 명이오다 노부나가의 철포대에게 전멸당했었다.
나가시노 전투 - 왼쪽이 통나무로 마방진지를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 철포대다.
다케다의 자랑인 기병대의 돌격에 오다는 철포부대 세 개로 나누어 3단으로 연달아장전과 사격을 되풀이해서 대승했던 이 전투 참여 철포대 병력이 단 3,000명에 지나지 않았던 점을 생각 해 보면 광해군이 파병한 조총 부대는 가공할 화력을 가진 부대라 하겠다.
당시 조총 부대의 원조 일본에도 이런 강력한 조총부대는 드물었었다.
가히 동아시아 최강의 화력을 가진 부대가 편성되어 파병되었다고 할만하다.
만약 이 부대가 단단히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조선군 지휘관이 지휘했었다면아마도 누루하치 정예 가병단 한 개쯤은 만주 평야에서쓸어버려서 동아의 역사를바꾸어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 때 독특한 파병군 사령관 인사를 했다.
임진란을 거치면서 명성을 날린 허고 많은 무신(武臣)을다 제치고 전투 지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문신(文臣) 강 홍립을 임명했다.
역사는 강 홍립이 임금 전속 중국어 역관인 어전통사라는직책에 있어서 중국어에 탁월하여 중국과의 연합 작전에서 그의 외교적 조정능력을 크게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차피 조선군은 명군 지휘관이 지휘 할테니까 군사적인능력은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그러나 우리는 광해군이 그 이상을 뛰어 넘는 능력을보았던 것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수도 있다.강 홍립에게 탁월한 정보 수집과 정보 판단 능력이 있었고 이 능력들을 광해군이 크게 평가했었을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이번 명과 후금의 전투를 비관적으로보았다.
조선군이 후원 할 명군이 패배한다고 본 것이다.
나중에 실패로 끝난 1차 파병에 이어 명은 뻔뻔하게도2차 파병을 요구해왔다.
철없는 조선의 신하들은 1차 파병으로 국력이 바닥에 이르렀는데도 명분을 좇아 2차 파병을 하자고 요구해왔다.1차 때와 같이 이 핑계 저 핑계로 명의 요청을 피해오던 광해군은 이런 말로 이들에게 응수했다. “과인은 명군이 패배 할 것을 알았었소!”
모르는 소리만 해대며 조르는 신하들에게 모르면 입 닫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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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북쪽 한구석의 한 작은 부족이었던 누르하치가 흥기해서 이룬 정복사업의 결과 - 전왕조 명나라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넓혀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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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군이 열심히 싸웠다면 명군이 대패한 뒤에조선군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이 이상하게 된다.즉 조선군이 후금국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하는 것도후금국에게 큰 보복을 가할 앙심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결론은 명군에게는 파병의 생색만 내고 후금군에게는원한을 사지 않고 눈치만 보다가 생명을보존해서 귀국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에 조심했지만 조선군이 최악의 상황에 몰리면?강 홍립이 상황을 판단해서 알아서 하라는 비밀 명령이 있었다. [이것에 관해 다시 말한다]
즉 기회적인 현명한 처신을 해야 하는데 이런 처신은 전투의 선택권이 자신들에게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그러나 조선군은 명군, 그것도 패배가 예견된무능한 명군이 내모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광해군이나 강 홍립의의지와는 반해서 사지(死地)로 내몰릴 가능성은아주 컸다.
근세 조선 말의 포수들과 화승총- 조선의 조총도 기능은 변한것이 없지만 모습의 변화가 있었다. 한국 병기사에서 아주 귀중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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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적을 필시 격멸하라는 순수군사적목표가 아닌 아리송한 목표를 가진 부대가 군사 전문가도아닌 사람의 지휘를 받으며 추운 먼 북쪽으로 출발했다.
광해군이 강 홍립에게 했다는 말을 보면 이 조총부대주력의 조선군이 얼마나 알토란같은 부대였는지 알 수가 있다.
“원정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하지만 위의 조건에 억매인 부대가 아무리 정예 부대이며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라 해도 아무런 실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예 파병 부대원들인 젊은 조선 병사들은 조선 역사 500년에서 민초들에게 가장 혹독했던 임진란과 그 후의 세월에 태어난 불쌍한 세대였다.
젊은 병사들은 기아와 질병 때문에 영아 사망률이 하도 높아 인구가 격감하는 힘든 세월에 태어
나 부모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으로 살아남은 각 가정의 귀한 복덩이들이었다.
이런 조선의 젊은이들이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한 나이에 강대국의 강요로 죽음의 땅으로 향했으니 참 기구한 운명이라고 하겠다.더구나 이런 젊은이를 사지로 보내는 광해군이나 끌고 가는 강 홍립의 심정인들 오죽했겠는지 짐작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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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 조총수 5,000인 -제 2 편-
파병 부대는 행군을 계속해서 그 선발대가 1618년 2월1일 압록강을 건넜다. 후속하던 강홍립의 본대는 2월 23일 도강을 완료했다. 두만강을 건너서 조선군은 3대로 나뉘어 기다리던 명군들과 합류하여 행군을 계속했다.
명나라군대와 칙사의 출발
조선이 알토란같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조총부대에 침을 흘리는 명군의 작태가 이때부터 나타난다.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조선군이 도강을 하기도 전부터 조총부대부터 들여 보내라고 난리를 친다. 이 자는 임란 대 울산성 공격 지휘관이기도 했다.
좌익 중로군 대장 두송도 침을 흘리며 다만 일부라도 좋으니 조선 조총수를 달라고 사정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군을 지휘하게 된 우익 남로군 유정은 조선군 조총부대만 믿는다고 말했다. 조선군은 도강을 완료한 후 대기하고 있던 명군과 합류하여 진군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미 광해군으로부터 지시도 있었고 강홍립자신도 적의 전장에 되도록이면 늦게 도착해서 결전을 피해 보자는 속셈이어서 최대한 행군 속도를 늦추었다. 더구나 날씨도 안좋았고 여러 개의 강을 건너면서 물에 젖은 병사들 중에는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때론 말이 다니기 힘든 밀림을 통과해야 했다. 아울러 부대의 문제점이 금방 드러나기 시작, 평안감사가 책임진 조선군의 보급부대 운영에 압록강 도강에 필요한 선박준비가 미비했다. 이래저래 행군자체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될수록 늦장을 부려 전투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조선군의 심중을 읽은 명나라 장수 유정은 행군 속도조절을 요청한 강홍립의 요청을 거절하고 독전관적이니 두명의 명군장수를 파견하게 된다.
교일기[喬一寄]와 우승은[于承恩] 두 명이었다.
두 사람은 명군 사령관 지시에 불복하면 목을 치겠다고 칼까지 빼들고 강 홍립을 위협하며 조선군을 몰아부쳤다. 더구나 조선군과 같이 행군하던 명군은 기병이 주력이었다.
사정없이 내몰리며 헐레벌떡 뛰어야 하는 것은 조선군의 또 다른 고통이기도 했다.
무리한 행군은 조선군의 식량부족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져왔다.그 식량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그러나 한국전쟁중 중공군이 경량 식품인 미숫가루나 콩가루를 최대로 휴대시켰지만 닷새가 한계였었다. 그러니 조선군이 열흘 분의 식량을 휴대하게 한 것은 엄청난 무리였다고 하겠다. 보급이 여의치 않을 것을 내다본 조선군은 평북 창성에서 도강 전에 각 병사에게 열흘 분의 식량을 휴대하게 하였다.
조선병들은 이 식량을 지고 헉헉대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병인 조선 병에 동행하던 명군은 거의 말을 탄 기마대들이었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조선병들은 조금씩 식량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 식량 유기는 곧 수일 후 전 부대의 식량부족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전을 앞둔 조선부대는 여진 부락을 털어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부심하여야했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보급이 끊어진 부대는 전투력이 크게 저하되기 마련, 식량 마련으로 시간을 보내며 겨우겨우 전진하던 조선군 부대는 그해 3월2일 심하에서 후금군과 조우했다. 적은 비교적 소규모라 할 수 있는 600명의 후금국 기병이었는데 조선 조총수의 분전으로 패주시켜 버렸다. 서전의 작은 승리에 기뻐하기 전 조선군은 곧 역사의 결전에 떠밀려 들어가게 된다. 3개부대로 전진하던 명군의 중로군이 성급히 진격하다가 살리호라는 지역에서 3만이 넘는 여진 기병대에게 기습을 당해서 전멸해버린 것이다.
후금국의 후신 -청국의 건륭황제 시절 근위병의 부장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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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두승은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두승의 중로군을 전멸시킨 여진족 부대는 밤을 지새는 장거리 기동으로 조선군이 배속된 유정 부대를 강타했다. 이 후금국 부대는 누루하치의 둘째 아들이 지휘하는 정예부대였다.
이 정예 부대가 바람 같이 덮쳤을 때 유정 군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근처 여진족 부락들을 약탈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무방비 상태에 있던 명군은 역시 대패의 참혹한 운명을 맞이하여야 했다.
한편 기병 위주의 유정 부대를 도보로 후속하던 강 홍립의 조선군은 전방에서 들리는 포성에 놀라 행군을 정지하고 서둘러 주변 고지를 점령하고 방어선구축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급히 이의 실시에 들어갔다.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조선군
강 홍립은 중군을 이끌고 좌측 언덕으로 올라가고 조선군 우영은 남쪽 언덕을 점령해서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다. 조선군 좌영 역시 강 홍립 점령 언덕보다 전방 고지에 오르도록 지시를 내려놨었다. 적의 폭풍 같은 기습은 바로 이 좌영이 벌판에서 고지로 이동중에 가해졌다. 좌영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지며 살육을 당했다. 강 홍립은 우영에게 신속히 이동해서 좌영을 구출하도록 지시했다.
두 부대가 겨우 합류해서 엉성하나마 그런대로 총격을 위한 위한 제대[梯隊]정렬을 완료했을 때 돌연 일진광풍이 요동 벌판의 먼지를 구름처럼 몰고 와서 조선군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불행의 신은 조선군을 농락 해버렸다. 떠밀리다시피 전쟁터에 내몰린 조선군은 광해군이나 강 홍립의 간절한 희망했던 부대의 온전한 보존 가능성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쟁에 익숙한 후금국 부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금국의 철기병은 이 먼지 구름 속을 뚫고 조총부대를 강습했다.
조선 조총대는 겨우 한번의 일제 사격을 했을뿐, 진에 난입한 여진족에게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총의 재장전이나 재 사격 같은 것은 염두내지 못하는 기습적인 난입이었다.
실탄을 쏴버린 조선군의 총은 한갓 쇠몽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조총수들은 후금 부대가 휘두르는 창과 칼의 세례와 화살의 세례까지 받고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조선군의 좌영과 우영이 난타를 당하고 있을 때 명의 독전관 우승은이 명군의 전멸을 보고 했다. 이 보고가 강 홍립의 최종 판단[투항]을 유도하는데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좌영은 거의 전멸해버리고 우영도 심한 타격을 받고 후퇴 했음에도 일부 장졸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선천부사 김 응하는 수하 장졸들과 함께 버드나무 아래로 몰렸지만 후금부대의 항복 권유를 일축하고 적을 쏘고 베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칼을 휘두르던 그는 오른 팔에 화살을 맞아 쓸 수 없게 되자 왼팔로 칼을 휘두르며 분전(奮戰)하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광해군은 후에 그를 호조 판서로 추증했다.
선천 부사 김응하의 장렬한 최후. 빗발치는 적 화살 속에서도 왼손으로 장검을
휘두르며 분전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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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 평안의 국경선 지방관은 무인을 임명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정부 인사정책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다가 총검에 찔려 전사한 어재연에 대해서 쓴 바,..그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미군 기록은 조선군들이 호랑이처럼 싸웠다고 전했다. 그의 최후가 김응하의 최후와 너무도 흡사하다. 어재연 역시 회령 부사를 지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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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에 치명타를 안겨준 후금병은 통역을 통해 항복을 요청했다. 주인 부대격인 명군이 대패해서 섬멸 되었는데 조선의 국운이 걸린 것도 아닌 이 전투에서 손님 부대격인 조선군이 마지막 한 명까지 옥쇄하는 끈질긴 전투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강 홍립은 고국을 떠나올 때 광해군으로부터 세 불리하면 후금군에 항복하는 것도 고려해보라는 강한 암시도 받았었다.
인조 반정 뒤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 무리들은 광해군이 강 홍립에게 항복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후세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군주가 그런 위험성이 큰 지시를 직선적으로 내리는 것은 통치 화법의 기술이 아니다.
광해군이 비관적인 전망을 말하고 최악의 이런 상황이 오면 당신이 통 크게 결단을 하라는 식으로 암시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군 항복 뒤에도 강 홍립에 대한 광해군의 신임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로 알 수있다. 여하튼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항복하기로 한 조선군과
후금국 사이에 교섭이 오고가고 했었다.
항복의 결심과 함께 조선군이 최초로 한 일은 조선군에 배치되어 행패를 부린 두 명의 명 독전관, 우승은과 교일기 두 명을 언덕 밑으로 밀어버린 일이었다.
기록은 없지만 눈 꼴 사납게 행패를 부렸던 두 명군 간부는 언덕밑으로 굴러 떨어뜨려놓고 뒤 쫓아온 조선군에게 처단 당했을 것이다. 후금군은 조선군의 포섭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교섭을 위해서 후금군 사령부를 방문한 조선군 부사령관 김경서는 총대장이며 누루하치의 둘째 아들인 귀영개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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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영개의 인간미 있는 적장 대우는 그 후 [1627년]정묘호란 때 그의 조카이며 청태종의 둘째 아들이 항복한 조선 장수에게 가했던 짐승같은 만행과 극히 대조가 된다.
군사 3만으로 의주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한 청군을 당할 길이 없자 정주 목사 김 진과 곽산 군수 박유건은 청나라 식으로 머리를 밀고 항복했는데도 청태종의 둘째 아들은 이들의 처와 첩을 잡아다가 장막에 가두고 난행을 저질렀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부대가 남진할 때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난행당한 아내들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걷게 하는 수모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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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관으로 종군하여 이 사르호 전투를 잘 기록한 이민환은 후금국 장수들이 조선군 장수들에게 예의있게 대해주었으며 항복하면 결코 서운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하늘 앞에 맹세하는 것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1617년 3월 5일 항복이 이루어지고 강 홍립은 심양에 가서 누루하치를 만났다.
중간 간부들은 전부 석방되어서 고향으로 가게 되었지만 되었지만 강 홍립은 심양에 억류 되었다.
패권을 잡아가던 누르하치가 건설한 심양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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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홍립은 이 억류 생활동안 광해군을 위해서 눈부신 정보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물안 개구리 격인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강 홍립의 편지도 받지 말고 국가의 치욕인 그의 집안을 모두 처단하라고 강요했었다.
광해군은 들은 척도 안하고 강 홍립의 편지로 얻은 정보로 등거리 외교를 펴 나간다.
강 홍립은 정묘호란 때 청군과 같이 조선으로 와서 좋은 조건으로 강화를 성립시키고 청군들의 만행을 예방함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인조 주변의 인간들이 강 홍립을 처단하자고 난리를 쳤으나 인조는 그를 보호했다.
강 홍립은 고향 [시흥]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냉대속에 말년을 곤궁하게 살다가 작고했다.
이처럼 큰일을 했으면서도 오해받으면서 명을 마감했던 사람들도 조선역사에서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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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홍립만 억류된 것이 아니었다. 조총대와 기타 조선군 병사들도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선이 없는 살림에 있는 돈 없는 돈 다들여서 육성했었고 파병하느라 그 경비 마련에 농민들의 허리가 휘청했었는데 결과는 역시 조선의 많은 가정에 눈물의 비극을 안겨주었다.
1만명의 원정군은 평안도 3,500명, 전라도 2,500명, 황해도 2,000명 충청도 2,000등으로 구성되었다. 참으로 빈궁하기 짝이 없는 조선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모은 병력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그 해 안으로 조선으로 도망쳐 돌아온 조선군은 1,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죽거나 포로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은 병사들을 가진 가정은 특히 가장 많은 병사를 파견했던 평안도에 많아 고을마다 많게는 400명에서 500명까지, 적게는 100명에서 200명에 달했다.
사르호 전투가 끝나고 나서 평안도 각 고을에는 통곡 소리가 끝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후금에게 조선군들은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 보물들이었다.
후금은 조선군을 일일이 심사해서 튼튼한 자는 새로 조총대를 주력으로해서 편성한 부대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신체 조건이 부족한 병사들은 각 여진족 부락에 나뉘어져 농사일을 하도록 했다.
여진족은 원래 사냥이나 어로, 그리고 산삼 채취등이나 하고 살았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산물로 중국에 팔고 대신 곡식과 생필품을 얻는 경제구조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명과의 전쟁으로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누루하치는 농업으로 난관을 헤치려 했다.
그러나 농사는 여진족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할 수없이 중국인들을 초빙하여 경지를 주고 농사일을 하도록 했으나 이 또한 명의 훼방으로 순조롭지가 않았다. 그런 판에 수 천 명의 조선인, 즉 농업 기술자들이 생겼으니 반가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만주에 파종철이 오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누루하치의 야심 찬 영농계획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된다. 한편 후금 군에 편입된 조선인 부대는 그들을 반강제로 만주에 오게 만든 명군에게 화력을 퍼붓게 된다.
후금군은 기마전에는 매우 능했지만 이 화력전에는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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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로부터 한참 뒤인 17세기 말에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이 지금 신강자치구에 준가리아 국을 건립했다. 청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토벌군이 조직되어 파견되었다.
1690년 9월 드디어 두 군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있었다. 알탄 칸이 지휘하는 준가리아의몽골 군대는 꿇어앉힌 낙타등에 물에 적신 펠트를 씌워서 화살이나총알이 뚫지 못하게 하고 그 등위에 [러시아에서 구입한]총을 의탁하고 마구 쏘아대는 바람에 청군은 대패했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청국의 총기 사용전술이 이렇게 미비했었으니 이때인들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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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종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로 홍타이시라고 불렸다.
그의 대에 후금이라는 국명을 청으로 개칭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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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조선군을 앞세우고 명군을 공격했던 후금국군에게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해 놓은 조선 조총대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부재로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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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록은 없지만 이때 강홍립 부대에 종군했던 평안도 은산의 관노비 아들 정명수라는 매국노의 기록은 풍성하게 전하고 있다.
이 자는 청군에게 억류되자 재빠르게 여진어를 배워서 아주 능틍한 수준이 되자 청군의 수석 조선어 통역으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이 자가 청편에 서서 조국 조선에 가한 악행은 반드시 역사의 기록에 남겨두어야 할 매국과 행패의 극치에 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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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 조선 조총대의 실력과 후금군에 배속되어 어떤 활약을 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은 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인조는 목적지 강화도로 도주하지 못하고 남한 성으로 피신했다가 47일 만에 치욕의 항복을 했지만 이들 막강한 청군을 이긴 두 개의 전투가 남한산성에서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었다
하나는 남한산성에서 가까운 광교산에서 김준경이 거둔 승리다.
다른 하나는 강원도 김화에서 벌어진 탑골 전투의 승리다.
김화의 탑골 전투는 평안 병마사 유림과 팡안 관찰사 홍명구가 지휘했다. 청군은 전매특허격인 기마대로 쇄도해 왔다. 산기슭에 진을 쳤던 홍 명구의 조선군은 청군 철기들의 공격에 와해되어 전멸하다시피 했고 홍명구도 전사했다.
사르호에서 철기병에게 당했던 조선군의 참패를 닮은 전투였다. 그러나 유림은 전술적으로 철기군이 활동할 수 없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 능선을 차지했는데 앞에 잣나무 숲이 있었다.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유림은 대단히 능란한 사격지휘를 했었다. 그는 앞의 그림에서와 같이 총수와 궁수가 혼합된 사격진을 갖추어놓고 적을 불과 몇십보까지 유인해서 자신의 깃발 신호에 따라 총과 활을 일제사격으로 타격을 주는 사격 통제 방법을 사용했다. 이 일사분란에 통제된 집중사격에 후금군은 되풀이해서 충격에 의한 돌파를 시도하다가 무더기로 시체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총병들에게 대어가 낚였다. 임진왜란의 전투중에도 이런 대어가 낚인 일은 없었다. 전투의 도중에 유림이 내려다보니 한 청군 장수가 말을 타고 산 위아래를 달리면서 악을 쓰며 병사들의 돌격을 독려하고 있었다. 유림은 저격병 열명을 엄선해서 적 기병을 차단하기위해 만들어놓은 목책을 넘어 숲 사이로 이 자에게 접근했다.
사거리내에 몰래 접근한 저격대는 침착하게 조준을 하고 유림의 사격명령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그는 말에서 고꾸라지며 굴러 떨어져 죽었다.
전쟁이 끝나서 그의 신원이 알려 졌는데 그는 누루하치의 매부가 되는 왕족이었다
이날 되풀이 되는 적의 공격을 총과 활의 조합된 사격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가 막대해서 그날 밤 적진에 몰래 접근한 조선 정찰병이 본 바로는 통곡소리가 진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유림이 지휘했던 조총수들은 어영청 휘하의 정예부대여서 이런 저격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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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적장이 이렇게 저격에 의해서 죽은 전투는 1254년 경기도 처인 성 밖에서 승장 김 윤후에게 고려 침공 몽골군 총대장인 살레타이가 저격당해 죽은 이후 최대의 전과였다.
치열했던 육전이 여러 번 있었던 임진란에서도 이런 거물의 왜장이 저격으로 죽은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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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장수 전투 복장- 건륭제의 왕자시절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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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 오지 못하고 후금군에 강제 종군했던 조선 조총대의 활약을 추측해볼 일은 또 있었다.
이로부터 20년 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국제관계에 무능했던 인조가 자초한 병자호란으로 청국에 무릎을 꿇고 4년 뒤 1641년 청나라가 승전국의 위치에서 조선에 요청한 것이 1,000명의 조총수였다.
조선은 할 수없이 앞의 유림의 지휘아래 일천명의 조총대를 조직해서 청에 보냈다. 조선의 조총대는 금주성 탈환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이 흐르고흑룡강을 넘어서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격멸하기위해서 청이 조선에서 데려간 조선의 조총부대들도 두번의 파병에서 큰 공을 세웠다.
청군의 요청으로 조선이 말려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조총대가 항상 등장하는 사실들은 임진란시 왜군의 조총에 호되게 당한 뒤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던 조총대가이들 후금국에 배속 된 뒤 발군(拔群)의 실력을 발휘해서 후금군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을 증명해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강탈하다시피 조선 조총대를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서구의 최신 무기로 무장했던 프랑스군이나 미군이 침공했을 때도 서둘러서 부른 것은 평안도에 상설 예비군격인 조총부대[산포대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지만]였다.
비록 신미양요에서 서구식 최신 무기에 전멸을 당했을망정 임진란 이후 조총대는 조선군의 육상전력의 꽃으로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되돌려 회고하고 싶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내몰린 전쟁터에서 어이없게 사라져 버렸지만...만약 역사의 흐름이 다르게 흘러 이 동아시아 최강의 조총대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조국 수호 전장에서 그 5,000정의 화승총이 마음껏 불을 뿜었던 승리를 거두었다면,자손들에게 살수대첩과
같이 위대한 호국 전쟁의 영웅들로 두고 두고 이야기 해졌을 것이다.
만주 땅 먼지 바람 속에 사그러진 조선 조총 부대의 비운은 이럴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쉽고 슬플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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