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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는가?

by 설렘심목 2010. 2. 7.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는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이유로 그토록 큰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원인만 생각하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혹스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善)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작정>

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그리스도)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0절).
그런가 하면 기독교의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하나님)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로마서 8장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로마서 3장 25절).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발생한 이 사건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끔찍한 죄와는 어떻게 연관됩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 대답을 제시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예루살렘)에 모였나이다” (사도행전 4장 27,28절).

헤아릴 수 없이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는 숨이 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주권이 동시에 우리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작정하셨고,
악한 사람들을 쓰셔서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한 선(善)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토라(모세오경, 즉 창세기~신명기)의 구절을 풀어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예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창세기 50:20).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선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원인을 찾아 맴돌기를 그치고 하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의 핵심은 ‘원인’(cause)이 아닌 ‘목적’(purpose), 곧 "의미’에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에 복을 주실 목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작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신 뜻은
사실상 그 깊이를 재려고 해도 다 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얄팍한 책에서 그 뜻을 50가지로 제시하는 것도
실은 표면을 조금 긁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목표는 성경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 성경입니다.

지금까지 짚어본 몇 가지 점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이루려 하신 큰 뜻을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수난(受難)이라는 말의 의미>

"수난’에 해당하는 영어 ‘passion’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적어도 네 가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성적(性的)인 욕구, 일에 대한 열정,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오라토리오 「마태수난곡」,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다른 종류의 욕구와 열정, 고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깊게 만들고, 마음에 선율이 흐르게 하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의(大義)를 품고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얼마나 독특한 것이었는가?>

로마의 권좌를 노린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의 수난과 죽음이
이후 3세기 동안 로마제국을 바꿔놓았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감내해가며 서로 사랑하게 하여
세계를 형성해나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첫째로,
예수의 수난이 인류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독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이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으로 성취된 바를 옳다 인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이 인류 역사에서 독특한 사건이었던 이유는
그분이 단순한 인간을 넘어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랬습니다.
니케아 신조(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교회 회의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신조 - 역자 주)의 진술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 그분에게 배웠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3절, 14절).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한 죄뿐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해 무죄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람은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詭詐)도 없으시며”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

이렇게 죄 없이 고난을 당하신 사실에 또 한 가지 사실이 더해지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절대 권위를 발휘하여 죽음을 자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남기신 굉음과 같은 진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요한복음 10장 17,18절).

과연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논쟁은 이 말씀 앞에서 옆으로 밀려납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의 수난은 부활로써 그 고귀한 뜻이 입증됨>

예수의 수난은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 일은 그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발생했습니다.
주일 새벽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쉽게 믿는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이자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달라 하여 드시기까지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9-43절).
가사(假死) 상태에서 소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인(神人, the God-Man)이 영원히 멸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주(主)이심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믿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수하셨으며,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가 수행한 일에 만족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수난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성취했는가 하는 점을 상고한 책입니다.

<기독교는 반유대주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가
유대인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와
모슬렘들을 겨냥한 십자군 원정에 촉매 역할을 한 것은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합당하게 처신하지 못한 많은 조상들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러한 몹쓸 역병의 잔재가 우리 자신의 영혼에도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 서양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많은 기독교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 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생각을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요한복음 18장 36절).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자신이) ‘죽으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 세상 앞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이 사랑이야말로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 앞에 유일한 구원의 길로 천거하게 해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그러나 미리 분명히 밝혀둘 게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한 차별이나 학살이나 십자군 원정이나 유대인 강제 수용소 같은 방법으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경멸하거나 박해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두려운 불순종입니다.
예수께서는 후대의 많은 추종자들과 다르게 십자가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21세기 들어 가장 폭발적인 정치적, 개인적 화두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지난 세기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 사건이 너무나 처참하기 때문에 수긍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종교적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떠나 역사적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신 뒤에 죽으셨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아우슈비츠의 비극>

갈보리와 유대인 강제 수용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유대 민족의 고통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닙니다.

엘리 위젤(Elie Wiesel, 아우슈비츠 학살에서 생존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보스턴 대학교 교수 역임 - 역자 주)은
마음을 쥐어짜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마저 산산이 부숴놓은 채 입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밤」(Night)]이라는 소설에서,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 부나, 부켄발트 같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은 헝가리의 시게트라는 마을에 살던 열여섯 살 소년이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후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 역자 주).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별’의 공포가 유대인들을 짓눌렀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가려내 처형하고 화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한 시점에서, 위젤은 딱 한 번 갈보리와 수용소를 연관짓습니다.
그는 노인 랍비 아키바 두머에 관해서 말합니다.
아키바 두머가 ‘선별’의 희생자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랍비는 얼마 전부터 우리들 사이를 하염없이 배회하고 다니면서 눈빛으로
“난 더 버틸 수 없어요 … 이젠 끝입니다”라며 자신의 약함을 모든 이들에게 알렸다.
용기를 북돋워줄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끝났고,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수 없으며,
힘도 믿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말하는 동안 문득문득 넋이 나간 듯 눈의 초점이 흐려졌는데, 두 동공이 마치 벌어진 상처 같았고, 공포의 수렁 같았다. 1)

그런 다음 위젤은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발언을 합니다.
“가엾은 아키바 두머,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다면, 만약 이 갈보리에서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볼 수 있었다면 ‘선별’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2)
나로서는 엘리 위젤의 말을 넘겨 짐작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솔직히 나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갈보리와 강제 수용소가 어떤 점에서 연관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지울 길이 없습니다.

내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미와 희망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당한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원인이 아닌 최종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아우슈비츠를 이해하는 데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해하는 데로 이어지는 아우슈비츠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갈보리와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잇는 고리가 깊고 깊은 공감의 고리일까요?
아마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유대 민족이 공포로 가위눌리던 ‘어느 기나긴 밤’3)에
발생했던 일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대(先代)에 미증유의 고초를 당한 유대 민족의 어떤 세대는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압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세운 가짜 ‘그리스도인들’(나치 독일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보리로 향하도록 움직인 사랑을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 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의 아리안족 문화를 살리기 위해 인명을 살상했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수난에 마음이 상하고 겸손해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유대 민족이 당한 고통을 이해하고
적어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여왔다는 게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예수님과 그분의 초기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계층 사람들(유대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방인들까지)이 예수의 십자가형에 연루되었으며, 모든 계층 사람들(유대인들을 포함하여)이 십자가형에 반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의 죽음에 주역을 맡으셨으며,
따라서 주된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인류에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 신자들, 불교 신자들과 힌두교 신자들, 종교가 없는 현세주의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이런 점들을 두루 살피고 나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당한 수난으로 무엇을 성취하셨을까요?

왜 그토록 큰 고통을 견뎌야만 하셨을까요?

세상을 위해 발생한 갈보리 사건이 도대체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 질문들을 다루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50가지 이유를 신약성경에서 추려보았습니다.
50가지 원인이 아니라 50가지 목적입니다.

"어떤 자들이 예수를 죽였는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01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해

02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03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시기 위해

04 몸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

05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기 위해

06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07 나를 사납게 짓누르는 율법의 요구를 도말하시기 위해

08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09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10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시기 위해

11 나의 의가 되는 순종을 이루시기 위해

12 내가 정죄함 받지 않게 하기 위해

13 구원의 조건이던 할례와 모든 의식법을 폐지하시기 위해

14 나로 믿게 하고 나를 끝까지 보존하시기 위해

15 나를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16 나에게 깨끗한 양심을 주시기 위해

17 나에게 선한 모든 것을 확보해주시기 위해

18 나의 도덕적 신체적 질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19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20 나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

21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22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23 나를 그리스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24 내가 지성소에 담대히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25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처소가 되기 위해

26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27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는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28 나를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29 나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30 내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도록 하기 위해

31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32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시려고

33 십자가가 나의 큰 자랑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34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5 결혼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36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

37 겸손히 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려고

38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해

39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40 내가 죽을 때 즉시 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41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도록 하기 위해

42 사탄의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43 복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해

44 민족 간의 적대감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45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46 전 세계에서 자신의 양들을 불러 모으시기 위해

47 나를 최후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48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

49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기 위해

50 아무리 악한 상황도 선으로 바꿔놓으신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


: The Passion of Jesus Christ - 예수가 못박힌 50가지 이유 (존 파이퍼) / 규장 / 20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