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아명, 마쓰다이라 다케치요) 줄거리 요약
제1부 대망
1권 - 동트기전(1542~1543)
나고야성 동남쪽에 있는 오카자키성은 서쪽 오야리에 오다 노부히데, 동쪽 도토우미에 이마가와가문의 강적에게 둘러쌓인 작은 성. 성주는 16세의 마쓰다이라 히로다타로 훗날 도쿠가와를 낳게해 준 오다이와의 혼인문제로 고심중이다. 왜냐하면 이웃한 가리야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딸 오다이)의 혼담제의를 거절할 경우 전쟁이 불가피하나 승산이 없기 때문에 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이마가와와 대립중인 오다의 힘를 두려워 하는 다다마사의 아들 노부모토(게요인의 아들이 아님)는 이 결혼을 반대하나 노련한 다다마사가 마쓰다이라와 전쟁을 막기위한 고심에서 혼담을 추진하자 노부모토는 시집가는 오다이의 납치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결혼은 성사된다.
히로다타의 부친 기요야스 시대에는 가리야 보다 오카자키가 힘이 센 시절이었고 18세의 기요야스의 강요에 따라 36세의 다다마사는 이미 자식 다섯을 둔 23세의 아내 오토미(게요인)를 빼앗겼고 오다이는 바로 게요인의 딸이었다. 오다이가 이에야스를 임신하자 노쇠한 다다마사는 마쓰다이라와 싸우지 않는 조건으로 아들 노부모토에게 성주자리를 넘겨주고, 오다이는 오카자키성 가신들의 호평을 받으며 범의 해 범의 시각에 이에야스를 낳는다. 한편 마쓰다이라를 영향력하에 두고 있는 이마가와는 오다이와의 결혼으로 오다편인 가리야와 연대를 우려하여 이혼을 권고하고 히로타다를 할 수 없이 이혼하고 만다.
2권 - 이별(1543~1549)
오다이는 이혼후 가리야성으로 되돌아가고 다다마사사후 노부모토는 히로다타에 앙갚음을 하고자 오다이를 히로다타보다 낮은 신분인 이구이의 히사마쓰에게 재혼시킨다.
오다이와 이혼후 괴로워 하던 히로다타는 자신의 경호무사 하치야의 약혼녀인 오하루를 취중에 오다이로 착각하여 강제로 관계를 맺고 하치야는 몹시 괴로워 한다.
히로다타는 가신들의 건의로 도다단조의 딸 마키히메와 재혼하고 가리야에서 오다이를 히사마쓰에게 재혼시킨 것에 대한 분풀이로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대의 영토였던 안조성을 탈환코저 공격하나 오다 노부히데의 부대에 크게 패하여 가신들의 신망을 잃는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마쓰다이라 가문이 배반치 못하게 하려고 이에야스를 인질로 자신의 슨푸성으로 옮겨오게 하나 오다의 습격을 받아 오히려 이에야스를 오다측에 빼앗긴다.
한편 히로다타의 정실부인 다와라(마키히메)의 미움을 받은 오하루는 성밖으로 쫒겨나 아이를 출산하나 그나마 출산한 아기를 빼앗긴 충격으로 미친척 행동하자 하치야를 주군을 위해 오하루를 살해하지만, 모든일이 오하루의 의도된 행동임을 알게된 하치야는 크게 상심하고 울부짖는다. 히사마쓰와 재혼한 오다이는 아들 이에야스를 만나기 위해 오야리의 나고야로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오와리 영주의 아들 노부나가로 부터 인질로 와 있는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경호무사 하치야는 오다이마저 죽이려는 히로다타에게 크게 실망하고 가신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불쌍한 성주 히로다타를 기어이 살해하고는 본인도 죽음을 택한다
3권- 주인없는 성(1550~1554)
히로다타 죽음후 이마가와는 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오카자키성을 빼앗고 전투시마다 마쓰다이라의 가신들을 선봉으로 세우고 가혹한 세금으로 인하여 가신들과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해지나 어린 이에야스에게 장래의 희망을 기대하며 참고 살아간다. 이마가와의 가신 센사이 선사는 안조성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의 또 다른 아들 노부히로를 사로잡아 이에야스와 인질교환을 성공하고 이마가와는 슨푸에 이에야스가 거처할 저택을 짓고 저택안에 작은 암자를 지은후 암자에 게요인을 머물게 해주며, 이에야스의 스승이 되어 열심히 가르친다.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는 바람둥이로서 쓰루히메를 농락하고 쓰루히메는 이에야스를 유혹하나 이에야스를 가메히메를 만나서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주인 없는 오카자키성의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데려오기 위한 고심 끝에 이에야스가 14세가 되면 관례를 올린후 조상참배를 구실로 오카자키성으로 데려오고자 이마가와 가문과 교섭을 진행한다. 한편 노부히데는 첩과 동침중 급사하게 되고 노부나가는 유언을 날조하려는 가신의 음모를 물리치고 영주를 계승하며 불안해 하는 가신들로부터 차츰 신망을 얻으며 착실히 기반을 다진다
4권 - 발걸음의 조절(1555~1561)
14세의 다케치요(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린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할머니 게요인과 스승 셋사이선사가 세상을 뜨고, 쓰루히메와 결혼하여 딸이 태어나자 오카자키로 성묘가 허락 되었다. 이에야스는 오카자키성으로 성묘를 가던중에 가신 도리이 다다요시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 창고에서 다다요시가 마쓰다이라 가문의 재기를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해둔 엄청난 군비와 무기를 확인하고는 크게 감동한다. 한편 노부나가는 토목공사와 상업융성을 꾀하여 오와리를 번창시키고, 길거리에서 원숭이 얼굴형상의 도키치로라는 천재적인 책사를 얻게 되는데 도키치로는 노부나가에게 이마가와의 교토상경 의도와 상경시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택할것이며 충성심을 시험코저 소규모 도발할 것이라고 현정세를 보고하고 노부나가의 신임으로 첩자를 풀어 정보를 모은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동쪽의 강적 다케다 신겐이 이웃의 우에스키와 대치하는 상태가 되어 동쪽방비를 안심하게 되자 쇼군이 있는 교토로 올라가기 위해 3만 병력을 이끌고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오와리로 진격하게 되나 오와리 접경에서 도키치로를 통하여 요시모토의 주둔지 정보를 입수한 오다 노부나가군의 기습으로 어이없게 목숨을 잃고 이로 인해 오카자키성을 지키던 이마가와의 성주대리가 몰래 슨푸성으로 철수하는 것을 알게 된 이에야스는 무혈입성함으로써 성을 되찾게 되고 가신들과 백성들은 크게 기뻐한다.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화친을 맺자 요시모토를 승계한 아들 가쓰요리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 하여 이에야스를 공격하나 크게 패퇴하고 보복으로서 슨푸성에 억류된 인질들을 대부분 살해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와 결별하게 된다
5권 - 형제의 술잔(1562~1572)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기요스성(나고야 근처)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와 오랜만의 우애의 술잔을 나누고 미카와와 오와리의 경계를 확실히 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노부가나의 배려로 히사마쓰와 어머니 오카자키로 모셔온 후, 이와가마의 성을 공격하여 그곳의 고위직 포로와 슨푸성에 억류된 아내를 상호 교환하여 오카자키성으로 데려온다. 이에야스는 거듭된승전으로 오카자키성주변의 미카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히마마쓰성을 개축하여 동쪽경계의 교두보로 삼는다. 1570년 노부나가의 지원을 요청받은 이에야스는 5천의 병력으로 오다와 접전중인 아사쿠라 본진 8천명을 물리침으로써 노부나가에게 자신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1572년 다케다 신겐도 3만병력으로 교토로 상경하기 위하여 미카와로 진격하게 되고 이에야스는 미카다가하라에서 싸움의 천재인 다케다 신겐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히마마쓰성으로 간신히 돌아온다. 한편 이에야스의 정실부인인 쓰루히메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시녀 오만을 심하게 매질하며 가신 야시로와 놀아나고 또한 의도적으로 접근한 가쓰요리의 첩자이며 의사인 켄케이와도 놀아나면서 가쓰요리가 이에야스를 이기게 도와주면 미카와 영지를 아들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재혼할 남편될 사람도 구해주기로 약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제2부 웅비
6권 - 운명의 별자리(1573~1574)
다케다 신겐군과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못하던 이에야스는 신겐이 미카야의 노다성을 공격중 피리소리에 취한 암살위기 충격으로 급사하여 철수하는 큰 행운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쓰루히메는 이에야스의 소실이 된 오만의 임신소식을 듣고 여자자객을 보내지만 실패하면서 가신들의 신망을 잃는다. 노부나가의 딸로서 이에야스 아들 노부야스에게 시집온 도쿠히메는 오야리에서 시녀 고지주등을 데려왔는데, 쓰루히메가 가신 야시로와 놀아나는 것을 목격한 고지주로 인하여 알려지게 되어 야시로는 노부야스의 의심을 받게 되고 결국은 가쓰요리와의 밀약이 탄로나서 살해되고 만다.
이에야스는 난공불락의 다케다군의 가메야마성주 오쿠다이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나가시노성을 함락시키나 1574년에는 가쓰요리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다카덴진성에 대하여 잦은 전란으로 기근상태에 있는 백성들의 농업생산량 증진을 우선시하여 원군을 보내지 않음으로서 성을 잃게도 된다. 1575년 가쓰요리는 만오천 병력을 이끌고 미카에의 나가시노성을 공격해 오는데, 나가시노성은 이에야스의 사위인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불과 500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으나 천연요새를 활용하여 적잖이 버텨내고 있었다. 그 무렵 성주의 부친 미마사노카미는 이에야스의 사신으로 노부나가를 찾아가 군사지원을 재촉하고 단시일내 전투를 끝내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총포를 모으는 중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7권 도리이 스네이몬(1575~1582)
나가노성에서 농성중이던 오쿠다이라의 가신 도리이 스네이몬은 이에야스에게 위험을 알리고 노부나가와 연합군의 지원병력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봉화로 알려주었지만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나가노성으로 돌아가던중 붙잡히게 되고 자기편에 큰소리로 봉화내용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주고 처형되는 모습을 다케다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지가 “참된 무사의 최후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현재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을 공격하기위한 준비로 총포병력을 500에서 3천으로 늘려 확보한 후 천하에 용맹을 떨친 다케다 기마군단을 목재방책 설치와 총포병을 3교대로 배치하여 사격함으로써 다케다군 만오천중 만이천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어 위세를 크게 떨친다.
1576년부터 3년간은 노부나가의 전성기로서 영토는 5백만석으로 늘어나고 정2품 우대신으로 승진해 있었다.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와 오다 노부가나의 딸 도쿠히메의 불화가 계속되고 오다쪽을 원수로 여기는 스키야마 마님(이와가마 요시모토의 딸 쓰루히메)의 행태를 보고받고 고심하던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여러 죄목을 들어 노부야스와 스키야마 마님의 처단을 요구하고, 이에야스는 노부야스를 해변마을 오하마에서 근신토록 조치하고 가신들중에서 누군가가 노부야스를 몰래 탈출시켜주기를 희망하나 이루어지지 않자 하마나 호수변의 호리, 마지막으로는 다케다와 경계인 후타마타성으로 옮기도록 하고, 스키야마 마님은 가신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자결한 것으로 처리된다.
1581년 이에야스는 7년전에 잃었던 다카텐징성을 회복하고, 1582년에는 가쓰요리의 매제인 기소의 요시마사가 노부나가와 연합하자 가쓰요리는 출병하나 가신들은 잦은 출병으로 지치게 되고 아버지 신겐이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것을 점차 잃게 된다.
전의를 상실한 가쓰요리는 본고장 고후로 철수하나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대군을 막아낼수 없어 도망다니다가 덴모쿠산에서 최후로 남은 91명과 집단자결로 가문이 멸망되고 만다. 이에야스는 이번전공으로 옛날 이마가와를 능가하는 3지역인 미카와, 도토우미, 스루가를 지배하는 큰 다이묘가 된다. 아즈치를 본거지로 하는 노부나가는 이에야스를 초대하기로 하고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호화로운 접대를 맡긴다. 미쓰히데는 가문의 많은 재물을 투입하여 저택을 짓는등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임무를 완수하나 비품등이 너무 격이 높았다는 이유등으로 마지막 단계에서 해임되고 쥬코쿠로 출병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히데요시의 후군으로 명받고는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8권 - 落日의 전후(1582~1584)
노부나가와 대면한 이에야스는 사흘간의 성대한 연회대접을 받고는 사카이로 돌아와 머물던중, 혼노사에 머물던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군의 반란습격으로 할복자결 소식을 듣고는 폭도들을 설득하며 길을 우회하여 미카와로 간신히 돌아온다.
한편 빗추의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서거소식을 듣고는 다카마쓰성주와 급히 강화를 맺고는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를 명분으로 교토로 신속히 진격하여 아케치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하는데 어둠속에 포위망을 탈출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폭도로 변한 백성들에게 살해된다.
한편 이에야스는 동부지역의 발판을 굳히기 시작하여 다케다 가신들을 회유하고 가이와 시나노 지역을 평정한다. 한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3살짜리 아들 산포시를 후계자로 내세우며 권력을 장악하고 이에야스는 사신을 보내어 히데요시를 축하해 주려고 하지만, 히데요시는 찾아오는 사신들이 자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교묘히 퍼뜨려서 사신들의 주군들이 의심케 하여 반목하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어 측근 사쿠자에몬과 사신선정을 고심끝에 상의하여 가즈마사를 사신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미 세력이 커진 히데요시는 사신 가즈마사를 맞는 자리에서 옛주군의 동맹군인 이에야스의 호칭을 낮추어 부르고 사신이 히데요시밑에 들어온다면 10만석의 다이묘로 삼겠다고 유혹의 미끼를 던져 가즈마사가 자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에야스측에 퍼지도록 계략을 꾸민다.
1584년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이 완성되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쓰의 중신 3명에게 찾아오게하고는 내통소문을 퍼뜨려 결국은 노부카쓰가 중신들을 의심하게 하여 살해시키도록 한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중신들의 살해 소식을 듣자 즉시 출병하여 노부카쓰의 나가시마로 진격하고, 노부카쓰의 지원요청을 받은 이에야쓰도 출병하여 이누야마성근처에서 첫전투에 이에야스군의 승리로 이어지고, 7만군사의 히데요시측을 미카와에서 패퇴시키지만 이에야스는 아직은 자신의 힘이 히데요시보다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즈사마를 보내어 히데요시와 강화를 교섭한다
9권 - 정략(1585~1590)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요리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이에야스의 가신들의 아들들을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자신의 본거지인 오사카에 오게하는 조건으로 강화하고도 이에야스의 세력을 확실히 붙잡아 두기위하여 이미 결혼한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 이혼시키고 이에야스의 정실부인으로 결혼동맹을 제안한다.
이에야스는 아들 나가마쓰의 활쏘기 연습장에 나타나 대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가르쳐 주는데-가신이 쌀밥을 먹으면 너는 보리쌀을, 가신이 아침에 일어나면 너는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대장은 부하가 반하도록 즉 심복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던 중에 이에야스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인간의 생애에 3가지 큰 위기(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될 무렵의 무분별한 색정, 장년기의 혈기에 찬 투쟁심, 불혹의 나이가 지나서는 자기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자만심)를 측근들에게 이야기하고, 과감한 침뜸의 효험으로 병이 완쾌된다.
1585년 7월 히데요시는 최고관직인 간파구에 오르고 이에야스는 우선 동쪽의 호조와화친을 맺어 동측의 안전을 공고히 한후에 히데요시의 결혼동맹 제안을 몇가지 조건하에 받아들인다.(1. 서로 후계자나 기타 가신에 관한일 간섭안하기, 2.히데요시가 서쪽으로 출정해도 동쪽방비 때문에 같이 행동할수 없음, 3.동쪽일을 처리할 때 쌍방이 서로 상의하여 독단적 행동금지). 이에야스가 교토로 상경하여 머물던 숙소에 히데요시가 예고없이 찾아와 서로 속을 털어 놓고 대화한 며칠후 오사카에서 정식으로 대면하여 히데요시의 위신을 세워주고는 돌아온다. 그후 큐슈정벌을 마친 히데요시는 간토지방의 호조공략을 계획하고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한 호조는 뒤늦게 히데요시의 힘이 강력한 것을 깨닫고 이에야스에게 중재를 요청하나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대답을 듣는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간토 공략후 영지교환 책략을 간파하고 간토로 이전을 위한 만반의 사전준비를 한다.
제3부 천하통일
10권 - 인간으로서의 합(1590~1600)
결국 히데요시에 의하여 호조는 망하고 영지를 간토지방으로 교체한 이에야스는 1590년 8월에 에도로 들어간다. 황폐했던 에도에 시가지가 완성되어가지 도적이 횡행하는데 이에야스에 우호적인 승려 즈이후(덴카이)의 적극적인 활약으로 이에야스의 적이었던 호조의 가신 이타쿠라등이 에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변화로 안정을 찾아간다.
1591년10월 일본을 평정한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나고야성을 건설하게 하고 조선출병의 본거지로 삼는다.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에 대해서는 가신들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히데요시의 고집으로 결정되고 전쟁초기 3개월은 우세하였지만 조선수군에 의한 대패와 군 보급로 차단으로 병사들이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히데요시는 차츰 조선출병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1593년 소실인 요도기미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낳았고 이는 히데요시로부터 이미 간파쿠의 지위를 넘겨받은 아들 히데쓰구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일이었다. 히데쓰구의 불안한 심정은 거친행동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모반으로 비춰짐이 커짐에 따라 결국에는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받아 히데쓰구의 할복과 처자식의 몰살을 가져왔다.
1598년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화려한 꽃놀이를 개최하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마음속엔 자신이 사후문제가 불안으로 가득찼다. 히데요시는 소실인 요도기미의 여동생과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와 혼인시키고 거기에서 갓태어난 젖먹이 딸마저도 자신의 후계자인 히데요리와 결혼시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을 꽉묶어 놓으려고 추진중에 63세로 생을 마치고 조선에서 퇴각토록 한다.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히데요리가 15세가 될 때까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의 정무를 보게되나, 히데요시의 심복 5부교의 한사람인 이시다미쓰나리가 요도기미와 손잡고 권력을 잡으려한다. 그러나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등은 히데요시의 정실 기타노네네와 손잡고 미쓰나리와 대립한다.
1598년11월에 조선에서 철수한 군대가 하카다에 도착하고 그동안에 미쓰나리와 이에야스간의 충돌을 저지시켰던 원로 마에다 도시이에가 1599년 3월에 죽자 가토등 7무장파에 위협을 느낀 미쓰나리는 자신이 그토록 견제하던 이에야스에게 어쩔수 없이 도움을 청하고 이에야스는 자신이 보호해주는 대신 미쓰나리를 사와야마성으로 보내어 사실상 권력에서 실각 시킨다.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의 내정도 맡아 세력이 커지자 미쓰나리는 동쪽에 영지를 갖고 있는 5대로의 한사람인 우에스키를 부추겨 전쟁준비를 하자 이에야스는 신속히 정벌에 나서지만 에도에 가까워짐에 따라 유람하듯 천천히 행군하고는 에도성에 들어가 버린다. 이틈을 노려 미쓰나리는 후시미성을 점령하는데 이는 이미 이에야스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11권 - 돌풍전야(1600~1614)
이에야스는 오야마에서 제후들을 불러놓고 상황을 설명한 후 제후들이 미쓰나리쪽이든 이에야스쪽이든 자유롭게 택하라고 했지만 모두가 이에야스를 도와 오사카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번 전투는 평화를 이룩하려는 자들의 의지로 싸우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지않고 다른제후들이 나서도록 유도한다. 이에야스는 9월이 되어서야 3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에도를 출발하는데 세기가하라에서 벌어진 동서군 의 전투는 당초 서군편 이었단 만오천군사가 동군쪽에 가담함으로써 동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미쓰나리는 이부키산중에서 체포되어 효수된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아직까지 도요토미가문의 은혜를 생각하고 있는자와 실직한 무사 즉 낭인들이 넘쳐나고 있어 이들처리에 고심하고 조정에서 생각하는 섭정이나 간파쿠를 사양하고 오직 세이이다이쇼군(무사의 총대장) 직함만을 받아 에도에 바쿠후를 개설한다. 그리고 가신 다다치카의 추천을 통하여 다케다 신겐의 가신이었던 토목, 광산에 밝은 오쿠보 나가야스를 중용하여 금광을 개발하고 이로 인하여 나가야스는 큰 부를 축척한다.
한편 요도기미는 4년후 16세가 되는 히데요리에게 쇼군을 넘겨줄 것을 바라고 있었으나 이에야스는 그해에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나이인 63세에 이르자 쇼군은 자신의 아들인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자 크게 분노한다. 이에야스는 당시에 일본에 진출한 스페인,포르투칼등 구교측(남만인)과 신흥세력인 영국, 네데란드등 신교측(홍모인)이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영국인 미우라 안진(윌리엄 애덤스)을 보호하고 배를 만들어 필리핀 루손태수에게 보내어 교역을 도모한다. 이에야스의 6남 다다테루와 다테 마사무사의 딸 이로아히메의 혼담이 이루어지자 구교측의 소로테 선교사는 다테 마사무사에게 금발미녀를 소실로 바쳐가며 의지하게 되고 천하를 꿈꾸던 마사무사는 소로테가 당시 세계최강인 스페인왕을 움직일 수도 있는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보호해 준다.
이에야스는 쇼군은 3남 히데타다에게 도요토미가문의 히데요리는 우대신에 천거하여 두가문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지만 서쪽 다이묘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히데다타의 교토로 상경시 16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위용을 과시한다.
이 무렵 다다테루(이에야스의 6남)의 집사인 오쿠보 나가야스는 금광개발로 막대한 부를 축척하자 자기가 섬기는 다다테루를 쇼군으로 삼아 실권을 장악하겟다는 꿈을 꾸게 되지만 네델란드 국왕으로부터 스페인이 일본영토 침략야심이 있다는 것을 통보받은 이에야스는 구교측의 포교가 상대나라의 지배에 목적이 있다고 판단하여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기리시탄(기독교)금지령을 내린다. 1611년 오쿠보 나가야스가 갑자기 죽자 쇼군이 집을 수색중 엄청난 황금이 발견되어 몰수하게 되고 이는 모반시도로 소문이 퍼지자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간의 대립을 우려하게 된다.
이러한 이에야스의 속내를 모르는 다다테루는 해외진출이 용이 하도록 오사카성을 달라고 했다가 크게 꾸지람을 듣는다. 호화롭고 요새화된 오사카성으로 기리시탄과 낭인들이 몰려오고 언젠가 히데요리와 이에야스간의 충돌이 예견되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욕망의 성인 오사카성에서 나오도록 하고자 한다.
12권 - 반쪽만 남은 오동잎(1614~1615)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문의 중신인 가타키리 가쓰모토를 슨푸성으로 불러 에도와 오사카가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나와 고리야마성으로 옮기도록 설득하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도쿠가와 가문의 내부단속 조치를 했으나 가쓰모토는 사나다 유키무라등 강경파로 인하여 이야기도 꺼내보지 못한다. 오사카성에서 호코사 대불전 낙성식을 이유로 낭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농성을 준비하자 이에야스는 충돌을 피하고자 낙성식 연기를 요구하고, 강경파는 이를 거부하고 가쓰모토를 배신자로 치부한다. 10월에 이에야스는 오사카를 공격코저 슨푸성을 떠났으나 니조성에 머무르면서 쇼군에게도 토벌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라는 이상한 지시를 하면서 평화적 해결책을 고심하고 히데요리도 이러한 이에야스의 의도를 궁금해 한다.
에도측 토벌군이 오사카성을 포위하자 위기를 느낀 요도기미측은 10만 낭인과 강경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면서도 화의를 성립시킨다. 그러나 화의 성립으로 에도측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낭인들이 메워진 해자를 다시파고 성곽을 쌓는등 전투를 준비하나 오사카의 온건파는 강경파의 위세에 밀려 이를 제지하지 못한다.
1615년봄이 되자 전투분위기는 더욱 조성되고 위기를 느낀 노부나가 동생 우라쿠사이(요도기미의 숙부)가 이에야스에게 더 이상 평화가 불가하다며 오사카성 공격을 권유한다. 오사카측의 강경파는 현재의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으로는 화의시에도 어차피 낭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는 화의를 깨뜨리기 위하여 히데요리가 갈 고리야성을 습격, 방화키로 모의한다.
13권 - 전야의 결단(1615~1616)
이에야스는 마지막 총공격에 앞서 마지막 사신을 보내어 설득을 시도하지만 고리야마성 방화소식으로 히데요리는 싸우기로 결정한다. 강경파 유키무라는 자우스산에서 이에야스군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사하고 오사카성이 함락위기에 처하자 요도기미와 히데요리는 가고시마로 가기 위한 피신길에 벼창고에 잠시 머물지만 밀고에 따라 발각되고 에도측 강경파는 히데요리를 살려두면 노쇠한 이에야스 사후에 모반이 우려된다며 히데요리측 사자를 거칠게 대하여 모욕감을 느낀 요도기미와 히데요리는 할복자결을 택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오사카성이 점령되자 기리시탄들은 다테 마사무네의 진중으로 피신하나 마사무네는 자신의 야심이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모두 살해한다. 쇼군형제의 불화소문이 커지자 이에야스는 다다테루를 불러 크게 꾸짖지만, 오사카성의 낭인들 처리문제가 밀고와 모함으로 이어져 다다테루와 다테 마사누네의 모반획책 소문이 나돌자 다다테루는 이에야스를 만나 오해를 풀고자 하면서 자신이 오사카성을 요구한 이유가 유럽세력과 교제하여 40만 낭인들을 활용한 세계각지의 항구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계획이었음을 밝히나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이에야스와 전쟁이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을 밝히는 다다테루에게서 위험을 느끼게 되고 다다테루와 마사무네를 떼어 놓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에야스는 쇼군에게 몇가지 이유를 들어 쇼순을 처벌하라고 이르고는 다다테루는 큰죄를 지은 죄인인 만큼 아로아히메와 이혼하라고 명령하고 자신과의 영원한 대면금지를 명한다.
이에야스는 가신 마쓰다이라 가쓰타카를 사자로 보내 다다테루가 자결케 하고자 하나 가쓰타카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할복대신 설득하기로 하고, 후카야로 영지를 옮길 것을 명한다. 한편 다테무사는 측근 책사 이시다 마쓰나리가 죽자 힘을 잃게된다.
1616년초 75세의 이에야스는 식중독으로 자리에 눕게되고 문병차 방문한 다테 마사무네에게 생애를 통하여 각별히 고마운분 네사람을 거론한다(다케다 신겐-싸움하는 법, 오다 노부나가-믿음, 다이코(히데요시)-변화대처, 그리고 다테무사의 기량)
그리고는 유언을 남긴다. 죽거든 유해를 구노산에 서쪽을 향해 묻어라-남만인과 홍모인의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후카야에서 근신중이던 다다테루는 사흘이 멀다하고 이에야스에게 문병편지를 쓰고 이에야스는 다다테루의 모친인 자야부인의 자식면담 요청에 대하여 노부나가로부터 선물받은 “노가제”란 유명한 피리를 유품으로 주고, 유품을 받은 다다테루는 그것이 무기를 버리고 풍류의 세계에 살라는 이에야스의 가르침인 것임을 깨닫는다. 4월17일 이에야스는 슨푸성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면서 소설은 끝난다.
[유훈]
-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 인내는 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 풀잎위에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멸문지화
일본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릴 때부터 오다노부나가 밑에서 가신으로 일했습니다. 신발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했다가 노부나가가 나올 때 내놓았습니다,
이를 기특하게 본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후계자로 삼았고 마침내 일본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부친이 물려준 오사카성을 본진으로 삼아 세습정치를 꿈꾸었습니다, 오사카성은 바다와 강으로 둘러 싸인데다 2중 깊이의 해자를 갖고 있어 문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습니다, 비행기와 다이너마이트가 없던 시절,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요새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점령하기 위한 계략으로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이제 전쟁을 그만하고 평화롭게 지내자' 하고 종전제안을 했습니다.
계속되는 전투에 신물이 난 히데요리가 이를 반갑게 받아들였고,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평화협정을 맺었으니까, 2중으로 된 해자도 메워서 백성들에게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 주자" 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병력이 동원되어 밤을 새워 가며 해자를 메워주는 역사까지 도맡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략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카아라 전투에서 승리했고, 단숨에 오사카성을 함락 시켰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모친과 함께 자살했고, 그의 자손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처단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훗날 화친조약을 어겼다는 사회 비난이 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쓰 는 말했습니다.
"세상에, 적장의 말을 대책없이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나? 적장의 말을 대책없이 믿는 바보는 죽거나 멸문당해도 싸다!" 이 교훈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똑같습니다. 이때는 지배계급만 바뀌었지만 현재는 지배계급 뿐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가 바뀝니다. 지배계급은 물론이고, 서민, 중산층도 피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글:이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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