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기독성자 썬다싱의 명상
1.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기도하려고 숲 가운데 들어갔다. 바위 위에 앉아 나의 깊은 요구를 내어놓고 도와주시기를 구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한 가난한 사람이 나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고 아마 구차한 사람이 나에게 빌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담요 하나밖에 없다. 그대는 이 가까운 동리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번개와 같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물 붓듯 하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주고 문득 사라졌다. 아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나같이 가련한 피조물에게서 아무것도 얻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고 부요 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인 줄 밝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하고 통찰력 없음을 슬피 울며 그곳을 떠났다.
2. 나는 눈물로서 기도하며 주께 나의 영을 바쳤다. "나의 주이신 신이여! 나의 생명의 생명, 나의 영의 영이시여! 긍휼로서 나를 살피시며 성신으로서 부어주소서. 나의 마음은 당신을 버리고 달리 받칠만한 사랑의 전당이 없나이다. 생명과 일체의 부여자인 당신 자신 외에는 당신에게서 아무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안의 보배와 하늘까지도 요구하지 않나이다. 다만 당신을 사모하며 또 구하옵니다. 당신이 계신 곳 거기가 천국이므로 내 마음의 기갈은 다만 이것을 지어주신 당신에 의해서만 만족할 수 있나이다. 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다만 당신을 위하여서만 지은 것이요 다른 아무것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마음은 당신 안에 있는 외에는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 나를 창조하시고 또 평안을 구하는 욕구를 주신 당신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심중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없이하여 주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며 이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3. 내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 한 빛나는 모양을 보았다. 그는 광휘 찬란한 아름다운 모양으로 내 앞에 섰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 나의 눈은 눈물에 젖어서 밝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광선과 같은 빛이 몹시 힘있게 나의 마음에 부어들어 올 때 나의 영혼은 그 중에 잠겨들어 갔다. 그때 곧 나는 사랑하는 나의 구주가 내 앞에 선 것을 알았다. 나는 곧 나의 섰던 바위에서 내려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손으로 친히 내 마음의 열쇠를 잡았다. 그리고 나의 열쇠로서 나의 내부의 실을 열고 그의 거룩한 임재로서 내 마음에 충만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을 보나 밖을 보나 어디든지 다만 그만을 보았다.(천사나 성도나 악마나 다 우리 마음의 자물쇠를 열 권리와 능력이 없다. 또 우리 자신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 신의 보좌요 성인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그가 들어온 때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천국이 열리었다.
4. "나의 참된 아들아! 참된 행복은 육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없다. 그것은 영의 눈을 뜰 때에야 아는 것이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수천 인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모두 참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썩어질 육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썩어질 물건밖에 없다. 육안으로는 영원하신 영적 실재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네 자신이 네 영혼조차 볼 수 없거든 어떻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느냐.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때에는 너는 확실히 영인 그를 볼 수 있다. 또 지금 네가 나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요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안으로 나를 보았다. 또 썩어 없어질 인간으로 된 줄 생각하였다. 내가 죽을 육체를 취한 것은 이로써 세상 죄를 소멸코저 함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업이 완성될 때에 죽을 육체는 죽지 않는 영광 중에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한 후에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영적 시각을 받은 자뿐이다.
5. 이 세상에 나에게 대하여 아는 자는 많으나 나를 아는 자는 적다. 그것은 저들이 나와 개인적으로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 이해도 없고 나의 안에 있는 신앙도 없고 나를 저들의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치 소경으로 난자가 붉고 푸르고 누른 여러 가지 빛깔에 대하여 말은 하나 그 미와 관상적 희열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눈을 뜨기 전에는 참 빛깔을 알 수 없다. 비록 박학한 사람이라도 그 영안이 뜨이기 전에는 나를 알 수 없고 나의 영광을 볼 수 없으며 내가 신의 화신인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많은 신자들은 저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 하는 것이 영적 생명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다. 그것은 옳으나 직접 나를 볼 수는 없다. 마치 사람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눈약 한 방울을 그 눈에 떨어뜨리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나 눈약이 눈 안에 있으므로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같이 나의 내재가 그의 내적 광명의 눈을 밝히고 시력을 증진케 한다. 참 평화는 내가 신자의 마음에 임재 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나를 볼 수는 없고 다만 그 힘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행복하게 된다. 또 나의 현재에 의하여 그들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 감정의 본체인 정신이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나는 영이기에 나의 사랑하는 무리에게 숨긴 만나가 되어 생명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6. 병중에는 입맛이 없어진다. 비록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도리어 맛이 나쁘게 느껴진다. 그와 같이 죄는 영에 관한 미각을 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아래서는 나의 말이나 은혜, 나의 임재도 죄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7. 아무리 아름다운 꽃동산도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울며불며 보채던 그에게 어머니가 다가와 품에 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고 다시 그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여유롭게 뛰노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마음을 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8. 석탄의 한 조각을 취하여 그것을 아무리 씻어도 검은 것을 씻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불 가운데에 넣으면 검은색이 변하여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와 같이 죄인이 성령을 받을 때 그는 불 세례로 인하여 검은 죄의 더러운 것은 소멸되고 그는 세상의 빛이 된다. 석탄 속의 불과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 안에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있어 나는 저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세계 중에 나타낸다.
9. 내 아들아! 만인의 심중과 그 형편은 내가 잘 안다. 나는 각 사람들의 중심의 요구에 응하여 나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인데 이를 모르고 사람들은 전 세상에 다시 나를 나타내주기를 바라며 그리하면 나를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바른 길에 돌아오게 함에는 나만이 아는 적절한 시기에 그때 나를 계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인간을 위하여 나는 인간이 되었다. 즉 그들에게 신을 알리기 위함이다. 무서운 자나 또는 이상한 무엇이 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그들 자신과 같은 자가 되었다. 인간은 신의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인간은 자기의 믿고 사모하는 것을 보고자하는 자연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볼 수가 없다.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를 이해함에는 그와 동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을 조금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은 사랑인고로 인간에게 자기와 같은 사랑의 동질성을 부여하였다. 이 인간이 가진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체를 취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고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인간으로 있을 때 나는 아들이라 불렸으나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아버지이다.
10. 나와 아버지와 성신은 하나이다. 마치 태양 중에 열과 빛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은 빛이 아니요 빛은 열이 아니다. 그 나타남은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 그와 같이 나와 성신은 아버지께로서 나와서 세상에 빛과 열을 준다. 불 세례를 주는 성신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태워 없이하고 그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한다. 참 빛인 나는 모든 암흑과 악한 요소를 쫓아버리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마침내 영원의 본향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개의 다른 몸이 아니요 하나이다. 마치 태양이 하나인 것과 같다.
11. 신앙이 믿음으로 나타나지 않고 죄에 의해 부서지면 의심으로 모양이 변화한다. 사람들은 이 의심이 풀리면 믿을 수 있다고 여기나 의심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풀린다. 의심은 인간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일이기 때문에 신을 믿을 때 그의 감화로 의심이 풀리는 것이다. 상처가 나아야 통증이 가시는 것처럼 믿음이 있어야 의심은 사라진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 생기는 의심은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 죄로 인해 인간과 신과의 연락이 끊어진 때 영의 통증인 의심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과의 연락을 갱신할 때 마음에는 의심 대신에 평화가 깃 든다.
12.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자기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에 사랑의 성질을 부여하였다. 우리에게 생명과 이성과 사랑을 주신 이유는 이 모두를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과 그의 뜻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피조물 사이를 불화시킨다. 나는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지만 특히 가까이 생활하는 자들이 이웃이다. 이 이웃을 잠시 사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날마다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기면 자기와 같이 남을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다.
13. 내 말은 나의 현존과 같다. 진심으로 나를 구하는 자에게는 내 말을 통하여 나를 나타낸다. 이는 마치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내가 인간의 육체로(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다. 내 말은 사람의 언어로 나타나기에 사람들은 인간적인 이성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기에 성령의 영감에 의하지 않고는 육체로 나타난 나를 이해 못하는 것같이 내 말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두뇌와 지식은 나에 대해 희미한 빛은 얻을지언정 나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육체의 작용에 불과하기에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나를 알아볼 힘이 없다. 생명은 영에 있고 영은 영으로 분별한다. 진실로 내 모습을 보고 내 말을 이해하려는 자는 영에 의해 움직이는 마음(육에 영향 받지 않는 마음)으로 느끼고 만지고 지각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성서의 의미도 영적이다.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모국어인 성신의 감동으로 씌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믿음을 이성의 빛으로 만들어내려 하나 그것은 생명 없는 육체의 작용일 뿐이다. 믿음은 영의 기능이고 생명은 영에 있다. 정신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14. 자연도 나의 의해 쓰여진 언어이다. 그것도 하나의 성서요 계시이다. 나는 자연 가운데 내 자신을 자유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자연을 읽는데도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영의 눈이 열리는 자는 자연 가운데서 나를 만난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사는 자는 마치 소경이 손끝으로만 더듬어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아 이로서는 현존하는 세계의 참 형상을 알 수 없어 모든 것이 의혹 투성이다. 이런 자가 세상을 평하는 것은 아직 미완성인 그림이나 건축을 보고 그 결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보이는 세계보다 안 보이는 세계가 더 본질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안 보이는 세계로부터 온다. 안 보이는 세계는 내 뜻과 내 마음으로부터 지어졌기에 나를 만나는 자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다.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는 이유는 전 창조물이 아직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하루에 이 모든 것을 지은 것이 아니요 또 하루 사이에 완성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인간이 저 멀리 앞에서부터 신과 같이 결점 없는 장래의 완성될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그는 신 앞에 꿇어 엎드려 오히려 신을 찬양할 것이다.
15. 사람의 영혼이 육체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은 병아리가 껍질 속에 알로 있는 것과 같다. 껍질 바깥에는 모든 세계가 있으나 그 껍질을 깨기 전까지는 도무지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또 병아리의 눈과 날개는 그 세계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니 때가 오면 볼 수도 있고 날 수도 있으나 껍질을 깨기 전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신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미래에 대하여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껍질과 같은 육체를 초월하여 높이 볼 수 없고 날개 같은 고상한 사상도 두뇌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약한 눈과 이성은 신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영원히 썩지 않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려면 육체로 있는 중에 신앙에 의하여 성령으로부터 생명의 힘을 받아야 한다.
16. 죄는 사람이 자신의 요구를 만족케 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신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와 같이 행하는데서 참 행복을 가질 수 없다. 죄는 그 자신 독립적이지(그 스스로는 존재 못하고 타의 존재 곧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못하기에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상태나 조건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선이시기에 선만을 창조하신다. 사단은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다. 그는 이미 피조된 것을 악하게 할 뿐이다. 죄는 다만 존재의 허위요 선이 없는 기만적 상태일 뿐이다. 예컨대 빛은 실제 존재하는 어떤 물체이나 어둠은 물체가 아니요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선이 없는 이 악의 암흑상태는 가장 무서운 것이다.
만약 내가 인간을 일률적으로 기계와 같이 지어 타락을 막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아담과 이와는 죄 없는 상태에 있어 거짓과 속임(이는 사단 속에만 있었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이 거짓과 속임 역시 사단 이전에는 없던 것으로 바로 사단에 의해 처음 생기게 되었다. 사단도 교만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은 사단 이전에 교만이 없던 까닭이다.(우리는 미지의 세계의 모든 사물을 잘 알 수는 없으나 빛만을 붙든다면 어둠 속에 빠지지는 않는다) 사단과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했을지라도 신은 가장 존귀한 결과를 취하셨다.
17. 사람이 죽는데는 모든 지체가 다 약하거나 무용하게 되어 죽는 것은 아니고 어느 한 부분이 병들었든지 혹은 정신이나 뇌에 타격을 받으면 그것으로 생명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한 죄의 악독한 결과는 생명을 파괴한다. 또 이 죄는 한 가정, 한 국가, 한 민족을 파멸시킨다. 이의 대표가 아담의 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의 한 마디 말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18. 혹시 금수나 조류가 인간가운데 오래 길들인 후에 자기 종족에게 돌아가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악인이 성도나 천사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이 죄인을 지옥으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의 거룩한 환경이 그들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선인의 무리에 들기 싫어하였는데 어찌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생애를 마치기 전에 천국이나 지옥 중 어느 편에 접근한다. 그의 선악에 따라 그의 심중에 천국이나 지옥이 건설된다. 이 땅에 있을 때 주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인 영의 몸이 형성되고 성령에 의해 생기가 전해져 선을 행할수록 그 몸은 점점 아름답게 완성을 향해 지어져 간다.
19. 나비나 벌레들은 불을 보면 자신이 타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그 환한 빛에만 미혹되어 뛰어들다 죽는다.(이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뜻을 가르친다) 사람도 죄의 파괴적 세력은 주의하지 않고 그 화려한 향락에만 도취되어 멸망한다. 죄는 한 망상이나 상상물이 아니고 인간의 악한 의지의 활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영적 암흑상태이다. 악의 씨는 그 영에 스며들어 마치 천연두가 단 시간 내에 사람의 미를 추악(곰보)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 영을 멸망케 한다. 신이 악을 짓지 않은 것처럼 병이나 고통도 짓지 않았다. 고통이나 병은 상상물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죄나 그가 일원으로 속한 가족의 숨겼던 죄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난 열매요 표상이다.
20.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정신과 이해의 눈은 참 빛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고 오직 영에 의한 마음의 작용만이 인간을 깊은 데로 이끌 수 있다. 마음은 신의 궁전이기에 이곳에 신만이 왕으로 모셔질 때 우리의 이성과 지혜는 독립적으로 빛을 찾는데서 벗어나 마음의 깊은 움직임과 함께 작용하게 된다. 이 세상의 깨달은 자들이 참 빛은 받지 못한 채 이성의 빛으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니 영의 일을 육으로만 풀려하여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서 뱀을 잘못 쥐는 것과 같다.
사단이 이와를 꾀인 때도 동물 중에 제일 영리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이와가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찾기보다 자기 이성의 빛으로만 판단하도록 유혹하였고 또 그의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여 지식의 눈은 밝히고 마음의 영적인 눈은 어둡게 하였다. 오늘날도 사단은 철인의 지혜를 쓰고 박학자의 학문을 이용하고 신자의 이성과 지식만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여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의 선이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나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고 했던 것이다.
21.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이 영혼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체 내에 있기 때문에 마음과 두뇌에 있는 잠깐 동안의 죄의 행복에 취하여 참으로 무서운 미궁에 처하여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단은 그를 삼키려 하고 죽음은 악어처럼 그를 먹으려 입을 벌리고 죄의 벌레는 육체와 정신의 뿌리를 갉고있는 사이에 영혼은 지옥의 영원한 밥이 되려고 한다.
22.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는 참 평안과 구원과 영생의 확증을 마음에 인식하지 못하고 항상 허전함 속에 산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주님) 있어 나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가 얻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최고의 극기와 선을 하면 참된 기쁨과 만족이 마음에 흐르리라고 여기나 도무지 그럴 수 없다. 본디 인간 속에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어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신을 여겼으나 마음은 늘 평안이 없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 대한 최초의 사상이 틀렸다. 그는 나를 메시야로 보고 온 것이 아니고 훌륭한 선생중의 하나로 여겨 선한 선생이라고 나를 불렀다. 하지만 세상에 선한 자는 없다. 심지어 선생이라 불리우는 자들도 회칠한 무덤과 같을 뿐 그 속은 사악하다. 그런데 그 청년은 나를 선한 선생이라 부르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선한 분은 아버지밖에 없고 그 청년이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메시야로서의 내가 아니라 선생중의 하나로 보는 그의 선생들에 대한 인식이기에 나를 왜 선하다고 부르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 청년의 잘못은 인간의 힘으로 선을 이루어 참된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배우려함에 있었다. 이런 잘못은 바울이라는 청년도 저질렀다. 그러나 앞서의 청년이 슬퍼하며 나를 떠난 것과는 달리 바울은 나를 만나 일체를 버리고 나를 쫓아 만족을 얻었다.
23. 기도는 다만 하나님께 구하여 필요한 것을 받으려는 노력뿐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분을 붙잡고 생명을 보존코저 하는 노력이다.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필요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그를 발견하고 친밀한 교제로 인해 은사 충만한 영적 생명을 받는다. 이 기도로 인해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자연히 물질적 은혜에는 생각이 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사물에 마음이 끌려 이것을 사모하게 된다. 기도는 신의 뜻을 움직여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숨은 뜻을 발견하여 변하여지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사람의 마음속 밀실에 신은 자신을 계시하고 그와 교통하며 그의 보배롭고 은혜로운 뜻이 계시될 때 인간은 불만족하게 여기던 의혹과 곤란은 영원히 떠나게 된다.
24. 기도는 성령 안에서 영이 생명을 위해 호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신은 성령을 부어주어 산 영이 되게 한다. 기도하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기도 중에 성령이 인간의 영적 폐부 속에 들어가 영이 숨을 쉴 때마다 그 영을 건강과 능력과 무한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경히 여겨 전혀 기도에 힘쓰지 않는다. 공기, 열, 물, 빛이 사람에게 필요하듯 기도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는데 이보다 금, 은을 더 귀중히 여긴다. 이런 자는 그 육체가 주리거나 마음이 갈할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25. 이 세상은 영적으로 볼 때 넓은 바다가운데 사람이 빠져 살고있는 것과 같다. 이들은 바다 속에 사는 생물들이 때때로 해면에 나와 호흡함으로 다시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인생의 바다에서도 그 표면에 나와 밀실의 기도로서 생명의 성령을 호흡함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류는 비록 그 생애를 짠물 속에서 보내지만 그 몸이 짜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생명에 의해 짠기가 몸에 배이지 않는다) 기도의 사람도 죄 많은 세상 중에 살면서 죄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로 생명을 호흡해야 한다. 바다의 짠물이 뜨거운 태양에 쪼이면 염분은 밑에 두고 증발하여 높이 올라가 천천히 구름이 된 후 아름답고 순수한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처럼 기도는 의의 태양에 쪼이어 더러운 죄악을 버리고 높이 올라 하늘에서 큰 구름이 되고 은혜의 소낙비가 되어 내려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26. 배는 바다가운데 쓰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졌으나 구멍이 나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침몰한다. 신자도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나 기도로 계속 생명을 유지하지 않으면 세상 세력이 그 마음에 들어와 멸망한다. 사람의 마음은 신을 위하여 보존되어야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 평강을 맛본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나 물에 잠겨도 죽는다. 세상 물건도 삶에 필요한 것이나 그에 빠지면 멸망한다.
27. 태양의 열과 빛은 모든 식물을 생육하고 아름답게 하나 반대로 시들고 말라죽게도 한다. 세상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지만 기도가 없어 영적 생명이 쇠하면 세상은 오히려 해를 준다.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초월하여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우리에게 해를 주지 않고 영적 생명의 진보를 돕는다. 어느 극히 더러운 장소에 꽃이 필지라도 그 꽃이 태양을 향해 있으면 빛과 열을 받아 향기가 더러운 냄새를 가시게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같이 신자도 기도로 나를 향해 있으면 나에게서 빛과 따스함을 받아 이 악한 세상의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생의 꽃을 피울 수 있다.
28. 사도들은 내가 죽은 후 즉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도로 준비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넘치는 은혜를 받았고 또 그전에 주어도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특별한 준비가 없이 은혜가 내린다면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고 이를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이를 잃지 않고 길이 보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울 왕은 그가 집을 떠날 때 성령과 왕위를 구하고 나온 것이 아니요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나온 것이다. 그는 구하지 않았는데 이를 받았으나 홀연히 잃어버렸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신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든지 우리의 필요를 알지 못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자세가 신이 주고자 하는 축복을 받기에 더욱 합당한 자세로 변화시킨다.
29. 기도의 사람이라야 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받이꽃과 같이 예배시간에만 근신하여 머리를 숙이나 예배당만 나오면 경건을 잊어버리고 전과 같게 된다. 신자도 기도를 게을리 하여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죄 가운데 멸망한다.
30. 학이 못가에나 논뚜렁에서 부동의 자세로 몇 시간이든지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신의 영광이나 맑은 물에 대해 묵상하고 있는 듯하나 실은 수면에 개구리나 송사리를 순식간에 잡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기도와 명상을 하긴 해도 신의 무한한 대양의 언덕가에 앉아 있으면서도 신의 존엄, 사랑 또는 죄에서 깨끗케 하고 기갈을 만족케 하는 신성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아침이슬 같은 세상의 문제와 기쁨과 희락에 더 관심이 크다.
31. 물이나 휘발유는 다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외형은 같으나 성질은 달라 하나는 불을 일으키고 하나는 불을 끈다. 사람들이 이 세상과 세상의 것으로 영혼과 마음의 극히 평온한 기쁨을 얻으려는 것은 일어나는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뿌리는 것과 같다. 또 아이가 파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서 무슨 선물을 얻어보려 하지만 껍질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함과 같다. 사람이 영원의 기초를 얻기까지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공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그 마음과 갈망을 지으신 신으로야만 참 만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는다.
32.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진실한 구도자가 그 영혼의 기갈을 만족케 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나 만나는 것마다 실망뿐이다. 생명수는 인간이 만든 통이나 기구 중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활천의 근원이기에 내게만 참 기쁨과 만족이 있다. 순결한 마음의 기도로 나에게 나오는 자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한 어린아이가 어미 품을 떠나 벼랑에 있는 꽃을 꺾으려다 굴러 떨어졌다. 유혹하는 꽃은 이 땅위의 짧은 향락들이다. 이를 위해 내 품을 떠나는 자마다 멸망으로 굴러 떨어진다.
33. 어린아이가 젖을 직접 빨지 않고는 젖을 먹을 수 없듯이 나의 자녀도 구함이 없이는 영혼의 양식을 받지 못한다. 아이가 젖 먹는 것이 본능이듯 세상의 철학이나 지식으로 배우지 않고도 나의 자녀는 본능으로 내게 기도한다. 나는 본디 인간성 속에 기갈을 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이 큰 자요 신인 듯 생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마음의 기갈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찾고 하루 하루가 그 조물주에 의해 지탱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사람은 인간의 결함과 필요를 깨닫게 됨으로 인하여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는데서 얻는 행복과 희열을 영구히 맛보게 되는 것이다.
34. 기도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교제하여 내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나와 같게 변화하는 것이다. 생물들이 보호색을 띄듯 기도로 나와 교제하는 자는 나의 성질의 분량을 가지며 나의 형상을 모방하여 나와 같게 된다.
35. 한 번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내 영광의 몇 분을 보이자 그들은 마음이 끌리어 그곳에 거처할 장막 셋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니 만약 오래 바라던 천국에서 무수한 성도들과 함께 완전한 나의 영광의 몸을 받고 영원히 변치 않는 기쁨으로 사는 자의 행복은 얼마나 놀라웁겠느냐. 기도의 사람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의 성도들이 저와 함께 영구히 있을 것이다.
36. 자연력을 지배하는 기적의 능력보다 세상과 사단과 자기의 욕심을 정복하는 힘이 더 큰 능력이다. 만일 이것을 이룬 자가 있다면 그는 지상에서 나와 함께 천국생활을 하는 것이다. 기도 속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나 바로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런 자는 사단보다 월등히 높아져 사단이 주는 두려움을 능히 물리치고도 남는다. 사단과 자기와 세상을 제어하는 사람은 자유로이 영원한 천국생활을 지금부터 할 수 있다.
37. 벌이 각처에서 각색 꽃의 꿀을 모아 밀방에 저축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은 피조물의 모든 부분에서 그것을 지은 신의 아름다운 사상과 감정을 모은다. 그는 세상을 달리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창조자와 교통하는 가운데 심중에 진리의 꿀을 받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신이 함께 하는 평화와 기쁨의 꿀을 맛볼 수 있다. 기후에 따라 식물의 자라는 습관과 꽃의 모양, 빛깔이 다른 것과 같이 나와 교통을 계속하는 자는 영적 습관, 용모, 거동에서 낡은 옛사람을 벗고 나의 영광으로 썩지 않는 모습으로 동화되어 간다.
38. 때때로 사람들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나 내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내 이름을 입과 혀로만 나타내고 마음과 생활로는 하지 않아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이를 모르고 계속 같은 식으로 기도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기도하려면 기도하는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평소 그들 신앙의 자세 곧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얻을 것이다. 참 예배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그의 영안이 열려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쫓아 기도하게 되어 결과로 과거의 위선자라도 그 영안이 열려 참 신자가 되고 진실한 형제가 되어 심중에 희열이 가득하다. 그러나 입술로만 예배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혹 기도하되 그 마음에 진실함이 없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39. 기도는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법칙과 질서를 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법칙에 붙들리지 않고 법칙을 지배하는 주재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위대한 법칙의 부여자의 뜻은 알기 어렵다. 신의 의지와 목적은 만물의 축복과 번영에 있는 까닭이다. 이를 깨닫기 힘든 것은 영의 일은 영으로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적을 경험한 자는 다른 모든 것이 가능케 된다. 거듭나서 기도 중에 그 영적 생애를 보내는 자와 세상의 물질 생활에만 몰두한 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40. 기도로서 영적 생애의 축복을 신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자는 의심 없이 순종하여야 한다. 한쪽 손 마른 자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펴라고 명하였다. 그런즉 그는 믿고 순종하였다. 그 때 그의 손은 다른 손같이 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즉시 순종하기 전에 이론을 하였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내가 손을 펼 수 있습니까? 만약 손을 펼 수 있다면 왜 당신을 찾아왔겠습니까? 먼저 내 손을 고쳐주시오 그러면 나는 손을 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그러나 그의 손은 펴지지 못하고 말 것이다. 손을 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는 믿음으로 해야한다. 그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일이나 이는 인간의 의지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식물의 참 생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식물이 보이는 세상에서 물과 햇빛을 받아먹지 못하면 그의 외부 생명도 끝이나 버린다.
41. 신은 인간들이 신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무도 단독으로 살 수 없고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남을 위한 봉사는 곧 자기가 사는 길이지 신을 위한 봉사라 생각지 말라. 바로 네가 서장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어느 몹시 추워 얼어죽을 것만 같은 날 한 사람이 눈 속에 묻혀 죽게된 것을 보고 너는 그 곳에 가서 그를 일으켜 업고 갔다. 그로 인해 네 자신의 몸이 더워지고 그에게도 온기가 통하여 둘 다 살아나게 되었다. 사람이 신께 받은 재능과 힘을 신과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기 전에는 신이 주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인간 자신이 본분을 다할 때 신은 그것을 완성시킨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제거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나의 일이다. 돌을 옮기는데 신의 특별한 힘은 필요가 없다. 나는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의 능력을 나타낸다. 나사로의 수의를 풀어주는 것도 인간의 일이다. 죄로 죽은 자들도 이와 같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일이나 이에 장애가 되고 곤란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또 영적 생명을 받은 후에도 어떤 이들은 묵은 습관과 악한 영의 세력에 묶여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 끊어버리고 자유를 주는 것은 내 자녀들의 책임이다. 이와 같은 봉사는 그에게 끊임없는 각성을 준다. 빛을 비추이는 것은 나의 사랑이 하지만 그 빛을 인간이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는 계속 어두울 수밖에 없다.
42. 성신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내린다. 수영을 잘하려면 설명과 교훈만으로는 안 된다. 친히 물에 들어가 연습하고 자주 숙달해야 한다. 처음에는 얕은 물에서 점차 깊은 곳까지 들어가 마침내 기술상 달인이 된다. 실제 신학교인 나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비결이다.
43. 어떤 이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나님의 일에 겁을 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약한데서 강한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은 병이 낫고 자양분을 먹으면서도 허약한 병신 같은 사람이니 이는 적당한 운동과 활동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44. 고통은 인간의 사곡한 반역적 성질에서 일어나 온다. 차고 더운 것은 지구가 태양에 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같이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신과 조화 혹은 부조화의 상태를 가지게 된다. 신의 도리는 인간에게 영적 건강과 행복을 주려는 것이나 인간이 신에 배반하면 영적 고통과 번뇌가 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신은 그 뜻에 반역하는 모든 상태를 제거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상은 길이 살 곳이 아니요 이방 땅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다.
45. 이 세상은 영원의 본향에 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다. 종종 일어나는 타격과 번뇌가 그의 영혼을 각성케 하고 돌이키게 하여 하늘을 향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심하고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 이 망하여 가는 세상과 함께 파멸할 것이다. 그는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와 마음을 바치게 되고 이 유수 같은 생애의 고통과 비애를 해탈한 후 영원의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하늘로 가는 것이다. 고통과 번뇌는 독과 같이 쓰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독을 소독하는 것도 독이다. 그같이 나도 내 자녀의 영적 건강과 힘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고통과 번뇌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고통은 없어진다.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으로 내 유일의 목적인 그들을 영원히 선하게 만들려는 까닭이다.
46.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는 것은 극히 필요하다. 그때 호흡이 시작되고 폐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울지 않으면 울기까지 두드려 주어야 한다. 나도 나의 자녀들을 고통과 번뇌의 매로 때려 울게 한다. 이는 그들의 기도를 통한 호흡이 영혼의 폐를 통하여 자유로이 사용될 때 그들이 새로운 힘을 얻고 한없는 생명을 얻어 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필요를 느끼지 못해 울지 않는 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7. 이 세상에서 내 안에 있는 자에게 나는 십자가의 고통을 안겨준다. 비록 그들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들은 한 몸이다. 마치 육체와 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나 육체 중 가장 적은 부분이 상처를 입으면 영이 곧 그것을 느끼는 것같이 나는 내 자녀들의 생명이요 영이며 그들은 내 지체와 같은 자들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기쁨과 번뇌와 고통을 담당하고 또 적당한 때 그들을 구원해낸다.
48. 만약 세상이 너를 욕하고 박해해도 놀라지 말라. 이 세상은 안식할 장소가 아니요 전장인 까닭이다. 세상이 너를 칭찬할 때 화로다. 대개 그것은 네가 이 세상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할 수 없다. 신을 버린 세상이니 너를 치욕스럽게 하기란 당연한 것 아닐까.
49. 신자와 불신자의 생활은 그 시초는 같으나 종말은 전혀 달라서 배암과 누에와 같다. 배암은 여러 번 그 껍질을 벗고 변하나 역시 배암으로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나 누에는 보기 싫은 껍질을 벗어버리자 새로운 생명이 되어 아름다운 나비와 같이 공중을 날아다닌다. 그같이 신자는 이 육신을 벗어버린 후 영계의 영광 중에 들어가 영원히 천계를 날아다닌다. 비록 누에가 고치 속에 갇히어 압박과 부자유 중에 있는 것이 십자가에 비할 수 있으나 이 분투와 곤란의 상태가 그 날개에 힘을 주고 장차 오는 세상에 적당케 된다. 그같이 나의 자녀들도 육체에 있을 동안 영적 분투와 고통 중에 있어 탄식과 갈망으로서 그 구원을 바라나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중에 얻어 생활할 무한한 생명을 위하여 충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50. 순교는 오히려 쉬우나 매일 그 몸을 산 제물로 받치는 것은 어렵다.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 그것은 신자의 생활은 나날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고통과 곤란, 비애와 번뇌가 구름같이 일어나서 눈앞의 의의 태양이 숨기워 지는 것 같을 때에도 혼란스러워 말라. 재앙의 구름은 드디어 은혜의 단비가 되어 네 머리 위에 내려올 것이다.
51. 천국과 지옥은 영계에 있는 두 개의 상반된 경지다. 이는 인간의 마음에 그 기원이 있고 그 기초는 세상에서부터 정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을 볼 수 없고 또 그 영혼 가운데 있는 천국과 지옥의 모양도 볼 수 없으나 그 징조를 조금은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매를 맞은 후 그 타격으로 받은 상처가 점차 더하여 마침내 죽음과 파괴에 이르기 전 먼저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고 또 과자를 먹은 후 이것이 소화되어 마침내 힘을 더하기 전 먼저 단맛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같이 한 깊은 죄행의 고통과 선행의 행복이 곧 어느 정도까지 이 세상에서 보응 되나 죄의 결과나 선의 결과는 마침내 영계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들어 나게 된다.
52. 사람이 한 가지 일로 언제까지든지 만족할 수는 없다. 항상 경우와 환경의 변화를 요구하여 세상에서 만족을 못 얻는다. 사람은 자아의 취미와 요구를 만족케 할 그 무엇을 구한다. 무상한 이 세상에서 사람은 불변의 확실성 있는 실재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이 실재가 되기에 내게 와서야 사람은 만족을 얻게 된다. 그때는 변화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고 신과 인간의 교통 속에 받는 행복으로 피곤함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영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사람이 혹시 그 마음에 아무 요구가 없는데도 문득 어떤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천계나 음부의 영계에서 오는 감응이다. 저 세계로부터 오는 방사 감응을 받는 그의 마음은 점차 영적 습관이 되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자기 마음에 적합한 것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같이 하여 천국과 지옥의 기초가 지상 생활에 있을 때부터 벌써 그 마음가운데 자리하게 된다. 그래서 사후 그가 세상에 있을 때 마음에 준비한 바대로 요구와 희망 곧 영혼의 성질에 따라 적합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3. 기갈이 있는 것은 이를 고칠 물이 있다는 증거다. 그같이 영혼의 요구가 있는 것은 참 행복과 평화가 있다는 보증이다. 영혼은 그 속에 갈망을 부여한 하나님을 찾아낼 때에 영혼의 만족 곧 천국을 얻는다. 세상의 사람들은 사랑의 대양 중에 있으면서도 마치 바닷물이 짜서 마시지 못하고 갈증으로 인해 죽는 것같이 신의 순수한 은총의 물은 그들의 반역과 죄로 인해 써서 마시지 못하고 갈증으로 죽게된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나에게 돌아오는 자는 그 쓴 사랑의 대양이 달콤한 물로 변하여 만족을 얻게 된다.
54.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이 놀랄만한 평화가 나의 마음속에 있어 내 가슴을 헤치고 이를 보이고 싶다. 그러나 이 나라는 숨긴 나라라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놀랄만한 평화를 지닌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가슴을 해부하고 그 안에 무엇이 있나 검사해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55. 사람을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품성, 감정, 능력은 인간마다 다르다. 이는 세상 꽃의 자태와 향기가 모두 각기 다른 것과 같다. 의의 태양이 이 지상과 천계를 비칠 때 신자는 신이 부여한 그 품성을 통하여 무한한 신의 영광과 사랑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에 그들은 내 안에 있어 영구의 희열을 맛본다.
56. 사람의 마음에 이는 희열과 위안은 내가 임재함으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영적 희열을 상상이라고 보는 것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가 겨울날 태양을 향하여 따뜻함을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 따스함은 태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의 열에서 생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나는 사람이 성신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창조하였다. 이래야 사람은 하늘의 생명과 희열을 받을 수 있다. 석탄은 자연적 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소가 없으면 불은 옮지 않는다. 그같이 성신의 산소가 인간의 영혼 중에 입구를 발견하기까지 사람은 암흑에 잠겨 영속적 평화를 즐길 수 없다.
57. 인간의 사상과 마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성신의 자극적 고취가 필요하다. 이것이 있을 때 마음에 천적 분위기와 희열적 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천상에서나 한 가지다.
58. 인간에는 간간이 평화와 행복이 떠난 듯한 때가 있다. 이는 혹시 불순종에 기인하지 않는가 잘 살펴야 한다. 그 때 나는 그들을 떠난 듯하고 그들은 불안과 적막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은 참으로 약한 자요 마른 뼈다귀와 같은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런고로 그들은 자신의 근본적 허약함을 잊지 않고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
59. 혹시 내가 신자들 마음 가운데 성신의 충만함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비상한 행복과 희열에 넘쳐 기절하거나 혹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다. 그것은 혈육이 하나님 나라를 이을 수 없고 일시적인 것이 영구한 것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때는 고통과 비애와 신음과 번뇌와 죽음은 다 없어진 채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성신 안의 희열이다.
60. 우리가 실재에 대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내적으로 깨닫고 느낀 모든 것을 속속들이 그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영혼이 엄숙한 순간에 느끼는 일들을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는 전부 나타낼 수 없다. 이 같은 진리는 말을 통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실제 언어는 참된 이해보다도 오해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61. 하나님은 그의 창조력으로 무생물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으셨다. 우리가 피조물로부터 받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창조했으나 사람이 이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이 죄악 가운데 있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은데 이들 무수의 종족은 하나님의 무수한 속성을 일일이 나타내고 있다. 모든 종족은 각자의 양에 따라 하나님의 성질을 어느 만큼 반사하고 있다. 죄인을 통해서까지도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62. 영이 어릴 때는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나 성숙해지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신이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된다.
63. 사람은 말로서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육체도 또한 인격의 본질인 영혼의 성질이나 능력을 충분히 표현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격에 스며있는 많은 부분은 이 세상에서는 숨겨져 있으며 적은 부분만 표면적 바탕 위에 나타나 있다. 영적인 존재물은 영계에서만 완전히 드러난다. 그 때가 되면 외부는 내부와 같이 되어 상응된다. 이러할진대 영원한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그 성질을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라. 그러므로 그의 참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하늘에서 뿐이다.
64. 사람들은 볼 수도 없고 충분히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실재를 믿을 수 있는가 라고 의문한다. 나는 실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실재를 믿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식으로 실재를 알기보다 실재와의 교제로 지식을 얻는 것이 올바르다. 전자는 외적 지식으로 실재의 겉모습만을 알뿐이지만 후자는 참된 실재요 참 지식인 것이다. 곧 누구나 자신의 심장이나 뇌수를 보지 못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또 지식으로는 모르지만 느낌으로는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영이 열려 실재와 교제가 이루어지면 실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 육체의 어떤 기관은 우리의 시야에서 감추어져 있다. 이를 보는 것조차 힘들진대 이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어떤 식물의 잎이나 꽃은 태양이 서쪽으로 지면 절로 오므리고 또 아침이 되어 햇빛이 그 위에 쪼이면 다시 열리는 것이 있다. 그들은 저의 성장과 존재를 위해 필요한 열과 생명을 태양으로부터 흡수하는 것이다. 우리도 기도에 의해 의의 태양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암흑의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충만히 될 때까지 성장한다.
66.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할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수증기는 태양의 열에 의해 땅으로부터 증발하여 올라가 다시 비되어 땅을 적시며 윤택케 한다. 참된 기도도 성령의 불로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어 죄악과 싸워 이기며 내려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위를 충만케 한다.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악마의 내습, 죄의 폭풍, 세상의 환란을 예지 하면 곧 신의 사랑의 깊은 바다 속으로 잠기어 영원한 평화와 조용한 가운데 지내게 된다.
67. 이 세상의 지혜로 실재를 알 수 없고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실재를 알 수 있다. 기도 중에 놀랄만한 평화를 느끼는 것은 기도 중 자신의 사색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임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작은 힘밖에 없고 큰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만약 우리 마음이 때때로 기쁘고 우수에 잠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위치가 이리저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과 기도로 항시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 계속 밝음을 마음에 유지할 수 있다.
68. 자연의 법칙은 인류와 다른 피조물의 진화와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때에 따라 역사 하실 수 있는 수단으로 있게 한 것이며 기적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자연의 법칙이 있어 기적은 이 법칙에 의해 행해진다. 이 법칙은 기도하는 중에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최고의 기적이란 우리 영혼에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이 충만 하는 것이기에 누구든지 이를 얻으려 애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고통과 죄의 삶 속에 그런 평화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아예 찾으려 하지 않고 있다. 사과는 더운 나라에는 나지 않고 망고는 눈 내리는 추운 나라에는 나지 않으나 조건만 잘 갖추어주면 상식이 바뀌어질 수 있다.
69.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수동적인 영이 되어 있다면 복음 전파는 필요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기에 설교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기도에 의해 설교보다 더욱 뛰어난 일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이 동굴 속에서 기도하는 일이 많은 사람을 돕는다. 그로부터 감화력이 나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70. 때로는 물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는 곳에 싱싱하게 나무가 자란다. 잘 살펴보면 이들의 뿌리가 땅속으로 흐르는 물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기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비애와 죄악을 이기고 기쁜 빛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들 신앙의 뿌리가 기도에 의해 생명수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나무뿌리의 끝이 예민하여 메마른 곳과 돌멩이를 피하듯 기도하는 사람도 잘못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능력이 있다.
71. 두뇌는 미묘하고 예민한 기관이며 명상 중에 보통사람의 사상을 훨씬 초월한 보이지 않는 영계의 소식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두뇌는 영적인 높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의 통신을 받아 사람에게 알기 쉬운 상태로 번역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이는 이 같은 경험을 꿈이나 환상 또는 깨어있거나 명상 속에서 얻는다.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와 영혼의 가장 깊고 민감한 부분인 양심이나 도덕적 의식을 비추어주나 사람은 이를 육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72. 푸짐한 색채, 아름다운 음악, 놀라운 광경과 음향 등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와서 두뇌 속 깊은 부분에 울린다. 시인이나 화가들은 그들에게 오는 보이지 않는 충동의 근원을 모르면서 무의식중에 그 얻은 것을 시나 그림에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나 명상하는 사람은 그것들 실재의 내심에 닿을 수 있어서 그 명상의 세계가 바로 자신의 영혼이나 영이 실제로 사는 세계인 것처럼 느끼며 실재와 축복을 생생히 즐길 수 있어 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서 살게된다.
73. 우리들이 가끔 새로운 곳에 갔을 때 이전에 와본 일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웬일인지 그 곳과 자기와의 사이에 미쳐 몰랐던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이 있다. 이는 첫째 누군가 그곳을 방문한 후 그곳 일을 회상하는 경우 신비적으로 그 사상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어딘가 그곳과 흡사한 다른 장소를 본 일이 있기에 유사한 기억이 하나의 새로운 모양을 이루어 마음에 나타난 것이다. 셋째 보이지 않는 영계의 반응이 우리들 마음속에 내려온 것이다. 원래 우리의 영혼은 그 세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등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계의 일이 인간이나 자연을 통해 물질적인 형체로 표현된 것이 이 세상이다. 우리 마음은 이 두 세계 사이에 있어 끊임없이 양자와 닮게끔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가 명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 양자의 관계는 보다 뚜렷이 지각된다.
74. 깊은 명상에 들어갈 때 영혼은 어느 덧 그 진상(실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사상, 말, 행위가 결코 외부로 나타나지 않고 마음속에서 생각으로만 그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소멸되지 않고 저마다 혼에 인 쳐져 박혀지고 생명의 서에 기록되어 남는다.
75. 하나님은 무한하며 우리는 유한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대양은 망망하여 그 전체의 넓이를 볼 수 없으나 적은 혀끝으로 바다가 짠물이란 것을 안다. 이같이 하나님에 대한 적은 부분을 우리가 앎으로도 그가 어떠 하시다는 것을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76. 공포, 노여움, 또는 미친 상태에서 사람은 놀랄만한 일을 한다. 이러한 힘은 원래 인간에 주어진 것이나 그 힘은 한 가지에 정력이 집중될 때에 나타난다. 인간의 힘은 명상을 통해 하나님의 힘으로 강해지며 큰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이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어 있을 때 설사 눈을 뜨고 있다해도 꽃의 향기나 음악의 매력이나 자연의 미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때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이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실재는 존재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77. 어느 날 나는 꽃을 보고 그 향기와 아름다움에 대해 깊게 생각하다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만들어진 만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나의 영혼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나는 더욱 기뻤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시야로는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영의 임재로는 한없이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78.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제자들에게도 그의 교훈을 기록하기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 까닭이다. 생명은 생명 있는 자에게만 주입 할 수 있고 책의 페이지에 주입할 수 없다. 또 세상의 선생들은 모두 사라져 감으로 그의 제자들은 책을 통해서 교훈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는 살아있을 때의 말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만을 우리 옆에 남기고 자신은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산 음성과 임재는 영원토록 가르침을 준다.
79. 이 세상에 욕구가 있다는 것은 그 충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마름은 물이 있다는 것의 증거이며 굶주림은 음식이 있다는 것의 증거다. 영원을 향해 살고 싶다는 것은 그것을 얻을 길이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보다 높은 영의 요구를 가지고 있다. 물질계는 이에 대해 만족을 못 주고 영계만이 이를 해결한다. 영혼의 참된 요구는 이를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요구 속에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요구도 부여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양을 닮아 사람을 만드셨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원하는 영적인 성질을 주셨다. 동류가 서로 그리워하며 찾는 것은 존재의 법칙이다.
80. 마음의 창조주가 아니고 누가 병들어 깨어진 마음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를 빼고 누가 죄인을 성자로 고쳐 만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다. 공간에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중력은 영적인 중력이 물질계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력은 사랑이며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인내는 육중한 중력만큼이나 무한하다. 인간은 적은 솥과 같아 조그만 악에 대해서도 금방 노여움이 끓어오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81. 만약 두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서로 싸우고 질투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서로 시기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사랑과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사랑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용량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들 마음속에 계실 때 우리들 전체는 그리스도처럼 화하게 된다. 소금이 물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보이지는 않으나 그 물을 맛보면 소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처럼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가 우리에게 주는 사랑으로 사람들은 그를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82. 사상은 그저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오는 외측의 현상에 대한 반응 뿐 아니고 영적 감각을 통하여 오는 현상에도 응답하는 것이다. 즉 사상은 내외의 세계 모두를 연결하고 있어서 사상 속에는 육체의 일들 뿐 아니라 영의 일들도 혼합되어 있다. 사상이 일어나는 마음이 완전을 향해 전진하는 것은 내적 사정과 같이 외적 상태에도 관계가 있다. 외측의 감각을 통하여 외적인 세계를 알며 내적인 감각을 통해서 내적인 영계를 안다. 마음속에 사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저 생각하는 마음의 기능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며 그 사상의 대상물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사상은 어떤 사물이 우리의 마음에 던져질 때 그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향기 그윽한 곳에는 꽃이 없으면 안 된다. 비록 그 꽃의 모양이나 색깔이 우리의 눈에 숨겨져 있는 경우에도 향기는 꽃의 존재를 증거 해준다. 그처럼 사상은 목적물의 존재를 의미한다.
마음은 그 앞에 다가온 어떤 존재에 의해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는 흡사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 앞의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거울이 좋든 아니든 비춰진 모습은 그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거울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실체를 그 속에 다만 투영시킬 수밖에 없고 또한 그 모습을 창조할 수 없으나 마음은 생명을 갖기에 사상을 만들어내고 그 만들어진 사상에 따라 대상물이 실제로 존속하는 것이다.(사실은 존재에 따라 사상이 일어나는 것이 순서이나 마음은 사상을 변화시킴에 따라 존재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그러나 거울은 그 앞에 선 존재만을 투영할 뿐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도 마음은 거울과 흡사하다. 그 속에서 외측의 사상을 반영하고 때로는 무의식중에 그 자신이 반영하는 추상적 사상은 실재의 불로부터 튀겨나는 불꽃과 같이 근원의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의 회상은 언제나 실재와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즉 마음은 허위를 반영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각 사람에 따라 다르고 수용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상은 현재 아주 불완전하나 끊임없이 그 앞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83. 인간의 지식으로는 실재를 알 수 없고 한 가지 사물도 완전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일을 완전하게 아는 일은 전 우주를 아는 일이며 어떤 한 가지 일은 다른 모든 일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 일을 전부 알기 위해서는 관계 있는 모든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 앞에 무릎꿇고 엎디어 참된 신앙을 가질 때만 진보하게 된다.
84. 직관은 손끝처럼 예민하며 곧 그 접촉에 의하여 실재의 존재를 느낀다. 그것은 논리적인 증명을 줄 수 없지만 나는 만족하다고 밝히는 그것이 논증이다. 이런 평화는 오직 실재에서만 오는 것으로 마음(직관을 느끼는)은 두뇌(지식을 저장하는)가 모르는 이론을 갖는다. 예를 들면 꽃에 대해 배우려면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향기를 즐기는 일은 순간에 할 수 있다. 직관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85. 자연의 법칙에 의하면 완전에 도달하는데는 순서를 따라 조용히 성장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우리는 성장하며 목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할 수 있다. 갑작스럽거나 조급한 진보는 우리를 허약하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환경이 좋은 가운데만이 완전한 것이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안전한 환경에 들어가기 전에 불완전한 환경을 통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노력하고 분투하여야 강하게 된다. 이는 누에가 고치 속에서 고투하여 아름다운 나방으로 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완전에 이른 후 뒤돌아본다면 우리를 방해했던 것들이 우리를 도와 완전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6. 이 세상의 정부는 단지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하늘나라의 정치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선과 질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즉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행정자나 또는 지배를 받는 모든 인민들을 전체 지배하는 하나님이 없으면 이 세상의 정치는 멸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87. 그리스도는 치욕의 십자가를 영광으로 바꾸셨다. 지난 과거의 십자가는 치욕과 죽음을 의미했으나 그것이 지난 지금은 승리의 생명을 표현한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는 그 십자가가 그를 받쳐 안전하게 그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을 경험한다.
88. 어느 목자가 한 마리 양의 다리를 분질렀다. 이유는 그 양이 다른 양을 절벽으로 인도하고 목자가 먹을 것을 줄 때면 손을 물려하기 때문이다. 그 뒤 그 양은 아주 잘 훈련되어 목자를 기쁘게 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를 비애와 고통을 통해 고치신다.
89. 음악, 향기, 맛, 온도 등 이러한 것은 만약 우리들이 적당히 쓰기만 하면 즐거움이 된다. 이들이 충분치 못하거나 지나치면 괴로움을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외의 감각을 주셨다. 우리는 이것에 의하여 앞에 오는 위험을 경계하며 참된 행복으로 인도된다. 고통은 우리의 육체나 마음의 어느 쪽에 나쁜 부분이 있다는 징조이다. 안식과 행복은 실재의 법칙에 따라 순종한 결과이다. 고통이 우리 육체의 각 기관에 대한 위험경보인 것같이 영혼의 고통과 불안도 죄로부터 둘러싸여 있다는 경고다. 육체의 촉각처럼 양심도 위험과 멸망이 가까워짐을 경고하고 우리로 하여금 발을 돌이키게 한다.
90.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이며 또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인간을 보면 우주를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우주를 만든 하나님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피조물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을 닮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만이 피조물을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은 그저 침묵으로만 말한다. 대신에 사람은 자연의 언어이다. 인간은 자연의 침묵에 의한 속삭임에 대하여 말을 불어넣는다. 자연은 말할 수 없기에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 이는 사람만이 자연의 마음을 알고 그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91. 인간은 제한된 피조물이므로 그 내외의 감각도 제한되어 있다. 인간의 능력은 모든 피조 세계의 극히 적은 부분을 알아내는데 지나지 않으며 그 전부를 알기 위해서는 무수한 감각이 부여되어야 한다. 감각은 제한이 있으나 마음은 끝없이 넓은 세계를 무한히 날 수 있을 정도로 제한이 없다. 감각은 이런 제한이 있으나 마음은 지식에 의하지 않고 지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재를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의 눈은 아주 작으나 자신의 발이 이를 수 없는 먼 곳의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눈은 몇 백 만리 저쪽에 있는 별을 보며 그 운행을 알고 빛을 즐긴다. 이같이 마음의 눈도 무한한 하나님의 깊이를 판별해 알며 마음의 요구에 만족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논증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사람들을 권고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마음 속에 있는 세계는 무한히 크다.
92. 인간은 죄에 빠져 더럽혀 지더라도 진리를 존중히 여기는 것을 좋아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기는 거짓을 말하지만 남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자기는 악행을 할지라도 남이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은 인간이 무의식중에도 진리와 정의를 구하고 또 그것을 존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창조한 이가 그러한 마음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리를 거역하며 산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는 신이 지어주신 자신의 본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93. 진리의 형상은 여러 가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양에 따라 진리의 다른 각 국면을 볼 수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면 어떤 이는 열매에 다른 이는 그 꽃에 마음을 둔다. 사람들은 나무가 자기에게 주는 감상에 따라 제각기 평가한다. 철학자, 과학자, 시인, 화가, 신비가 등 모든 이는 그 수용 량과 감수성에 따라 진리의 다른 면면을 구별하고 묘사한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알아내기 위하여 다른 여러 방면에서 관찰하여야 한다. 전심 전령을 가지고 찾는 자가 실재를 만나 진리를 알게 된다. 이는 그가 진리를 구하기 전에 실재가 먼저 그를 찾아서 축복된 교통을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94. 양친의 병이 어린이에게 유전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부모가 수족이나 눈을 잃었다해서 어린이가 절름발이나 장님으로 태어나는 일은 없다. 원죄도 그와 같아서 선악의 모든 성질이 양친으로부터 어린이에게 유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의 성격은 그가 자각하여 행한 행위의 결과에 기인한다. 능력이나 성품은 적은 부분을 부모로부터 이어받는 것이지만 그들의 성장과 발달은 대부분 그들 자신의 노력에 따르는 것이다.
95. 원래 있던 어떤 사물에 의해 생긴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어둠 속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우리 속에 솟아오르는 악의 구름에 의해 우리가 의의 태양을 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96. 의지가 약해지며 무력화되는 것을 사람들은 자신의 본래의 성품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것은 죄라는 것 때문에 일어남을 사람들은 모른다. 곧 죄 문제가 해결된다면 마음은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죄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며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당하기만 한다. 적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여기 있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서는 짐승, 새들이 흰옷으로 자신을 감싸 주위의 자연과 같이 보호색이 되어 적의 공격을 면한다. 우리도 주님의 품에서 변화되어야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보호받을 수 있다.
97. 인간이 무서워 할 적은 단지 범이나 호랑이같이 큰 동물만이 아니고 미세한 균도 대상이 된다. 우리 영혼의 적도 큰 죄뿐이 아니고 작은 죄도 그 대상이 된다. 이는 나타난 죄보다 나타나지 않고 언젠가 나타날 죄가 더 근본이고 또 죄의 기원이 되는 속에 있는 악념이 더욱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악념은 마음속에 역사 하여 전 영혼을 멸망시킨다. 자기의 악한 생명을 죽이기 위해 독이나 무서운 기구 등의 고행을 사용하는 대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기도를 사용해 보라.
98. 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길이 나를 살리는 길이라 여겨 내 중심적으로 산다. 그러나 나를 돕기 위해서는 남을 돕는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 나라의 법칙이다. 스스로 나를 살리는 길은 나를 상해하는 길이요 나를 살리려면 먼저 남을 살려야 기쁨이 그 속에서 나와 우리를 살린다.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인 고통이나 불안 두려움 등은 자기중심으로부터 생긴다.
99. 죽음이 오는 때에 우리의 의식은 죽는 것이 아니고 또 먼 곳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이 시작되며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모태에서 나와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장소도 이전 세상과 별반 다름이 없는 분위기이다. 육체를 나온 후의 영이 거하는데는 육체가 살던 세계와 같다고 할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뛰어난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태 속의 어린이와 육체중의 영혼은 다같이 미래의 상태에 관해 무지이다. 이것들은 그들의 눈에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온 어린이는 그들이 나온 태를 볼 수 없듯이 육체를 떠난 후의 영은 어떤 조건 하의 경우 외에는 그가 나온 육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유는 그는 항상 영계에 살며 육의 세계는 거치른 물질을 영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아는 탯줄을 끊고 모체로부터 떨어지듯 영은 은줄을 끊고 육체로부터 떠난다. 어린이에 있어서의 모태나 영혼에 있어서의 육체는 다 같이 미래를 위한 준비의 장소이다. 영은 육체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거기서 참된 목적과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100. 만일 우리의 지식이 무한하다면 신앙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이 없으면 죽어 있는 상태를 살아있다고 여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의 지식은 무한한 것이 못된다. 신앙에 의해 우리는 성령의 불 세례를 받는다. 물세례(지상의 의식과 사물의 외관, 인간의 지식 등)만으로는 겉만 깨끗해질 뿐 속의 순결과 구원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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