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4. 주일설교. <사32:15-20. 광야가 변하여 옥토 되는 날>
[2019.02.19. 백일도 안 된 애기를 뉘여 놓고 밭 매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점심을 내갔다. 그 사이 애기가 똥을 싸고 우는데 강아지가 와서 그 똥을 먹다가 애기 고추와 고환을 모두 먹었고 애기는 자지러지게 울다가 지쳐 실신한 것을 돌아온 할머니가 발견했다. 난리가 났다. 아이는 명랑하게 크다가 사춘기가 되자 친구들과 자기고추가 다른 걸 보고 절망했고 이어 방탕한 청년이 됐다. 할머니는 모두 내 잘못이라며 교회에 나가 “이 죽일 년을 용서하시고 우리 귀한 손주에게 복을 달라”며 빌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기도로 손주는 분노와 절망을 딛고 혼자 사는 신부나 중이 되겠다는 걸 차라리 성당에 가서 신부님이 되라는 할머니 뜻대로 신부가 됐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거품을 문 미친개에게 물릴 수 있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해명되지 않는 불행이 여기저기 지뢰처럼 숨어있다. 아무도 미래 일을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어떤 정황에서도 냉철히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그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열리고 혹시 미숙한 결정으로 고통할지라도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사랑과 대단하심을 노래한다면 그 결과는 인간의 부족과 세상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만한 일들로 바뀌게 된다.]
우상숭배로 인해 나라와 민족전체가 부패하고 음란하여 그 죄의 대가로 성한 곳이 없는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경고 후 다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메시아강림의 놀라운 복음은 비단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뿐 아니라 작고 큰 모든 구원의 때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소망의 복음으로 유효한 것을 믿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소식은 범 우주적인 역사적 예언의 실현뿐 아니라 개인의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간섭하는 능력이 됨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여정은 우리들의 삶 어디든 모두 적용되어 부활을 위한 모든 아픔과 죽음의 과정까지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로 부활의 영광에 대한 소망의 말씀입니다. 한절씩 읽으며 함께 말씀의 능력을 붙잡기 원합니다.
15절을 함께 읽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여기 ‘마침내’는 끝내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그때를 말합니다. 작고 큰 모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악하고 부조리해서 서러운 이 땅에 그리고 우리 몸에도 오십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미 수없이 많은 주의 영을 경험하여 장차 이루실 구원의 확신과 그 능력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 믿음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는 성령은혜는 모든 하나님의 복된 일에 필수적 조건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광야처럼 메마른 우리의 심령들이 변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밭이요, 성전이 되어(고후3:9) 복음의 씨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하늘의 향기를 내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받기 전, 옛 삶은 사건사고로 가득할 뿐 씨 없는 수박처럼 생명 없는 잡초가 산을 덮듯이 그렇게 어둠의 울창한 흑암이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편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될 때 아름다운 밭은 아무 쓸모없는 잡초 밭이 된다는 것은 눈에 뵈는 모든 양끝의 뒤바뀜을 뜻합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초라할지 몰라도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가치와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 순간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35:7b절입니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사막이 풀밭 되고 풀밭이 사막 되는가 하면 높은 봉우리가 계곡 되고 계곡이 솟아오르는 날을 본문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잠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히 받아 회개할 때 그 백성에겐 멈춤 없는 구원이 임하는 것을 오늘 기쁨으로 받으시기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 본 16절의 주제는 정의와 공평입니다. 세상과 인생은 불공평과 부조리가운데 죄로 인한 피와 눈물의 역사를 끊임없이 반복해 가고 있습니다. 다툼과 복수의 칼이 멈추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는 회복과 치유와 구원의 역사입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예레미아가 비통한 마음으로 지적한 2,700년 전의 이스라엘 모습은 온 인류가 살아가는 나라와 개인의 역사를 한마디로 보여줍니다. 즉 평화와 풍성은 정의와 공평을 기초로 삼아 시작되는 것인데 정의와 공평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악한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님을 인류역사가 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다시 오시는 겁니다. 먼저는 각자의 삶과 인격에 찾아오시기를 원하고 가정과 나라에 임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관계 속에도 초청해 모셔야 합니다. 직장위에 오시기를 원하고 교회를 지도해 주십사 간구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한다는 이 말씀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말씀하나 더 봅니다. 시104:29-30절엔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 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주의 영이 임하신 곳에 정의와 공평이 모든 것을 보장하실 줄 믿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굳게 잡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 저와 여러분이 다스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17절을 함께 읽습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 인간은 누구나 사랑의 하나님만 소망하며 공의의 하나님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뿐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공의라는 법으로 화평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공의의 열매는 화목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인데 인간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회복된 에덴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간 땅에서 떠나 갈 인간의 샬롬과 소원은 죄가 사라진 에덴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에덴의 복구는 그 어느 것으로도 불가능하며 오직 골고다언덕의 어린양 보혈로만 가능합니다. 이 믿음 단단히 붙잡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볼 때 화평과 안전과 영원한 생명이 위로부터 보장되는 줄 믿기 바랍니다.
18절을 읽습니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 믿는 성도들은 육신을 벗은 뒤 영원히 살게 될 평강의 천국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얻은 심령의 화평으로 쉼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살이는 항상 염려와 불안과 근심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실질적인 성도의 능력인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어떤 믿음의 분량과 체질로 놓이느냐는 매우 중차대한 영적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의 말씀능력이 그대로 왜곡 없이 여러분의 삶에 능력과 권세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과 교회와 가정들 위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 절대의 신뢰를 보내시고 순간마다 고백하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익숙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순결을 이루시는 주님을 특별히 실패의 현장에서 만나는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19절입니다.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15절의 말씀처럼 과거 예수님을 몰라 생명 없던 잡초의 삶이 우박에 모두 깨져 버리고 자신만이 품고 있고 누리고 즐기던 자기성곽이라는 좁은 우물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후에 그 변화와 거듭남에 감사와 찬송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한모금의 물이 귀한 갈급한 생명에게 생수 한 잔은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러나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차가운 심령으로 물리칠 때 그 생수 한잔은 얼어붙은 분노의 얼음파편이 되어 모두를 해롭게 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복음을 전달받아야 할 전도대상자는 특정한 사람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 들고 나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고치고 전해야 할 대상자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들처럼 마음이 완고하여 전도자를 조롱하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소와 나귀 같이 죽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밭, 몸 된 성전으로 인도하는 자는 정녕 복된 인생이라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잡초로 우거지고 바람 불면 그 속에 각종 짐승과 벌레가 발견되는 그런 생명 없는 쓰레기더미가 아닙니다.
성령의 동행을 경험한 우리 이제 여호와의 물댄 아름다운 동산입니다. 거기 생명의 과실들이 66권을 통하여 잠시도 쉼 없이 공급되고 영광의 노래가 그치지 않습니다.
사막과 광야 한가운데서, 타들어가는 가슴을 촉촉이 적시고 채우실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뿐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가운데 오늘 설교제목처럼 “광야가 옥토 되는 성령의 날이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이어지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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