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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02.17.주일예배<창24:1-9. 아브라함의 며느리구하기>

by 설렘심목 2019. 2. 17.

2019.02.17.주일예배<24:1-9. 아브라함의 며느리구하기>

[2019.02.07. 영화 빠삐용에서의 교훈이 아니더라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깝고 안타까운 것을 들라면 단언(斷言)코 함부로 흘려보낸 아까운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어리석어 놓쳐버린 사람들과 기회들이다. 모두가 내 부족함이다. 행여 이 시간에도 훗날 안타까워하며 아쉬워 할 일은 없는지 부단히 살펴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붙들 것 붙들고 내려놓을 것 내려놔야 한다. 그렇게 애를 써도 나남 없이 인간들은 모두 후회하는 존재들이란 것을 어쩔 수는 없지만,

아침 일어나면 의례히 날고구마를 한입 깨물며 예배당을 향한다. 하나님께 이런저런 걸 아뢰며 내게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과 통한다는 그 한 사실이란 점에 새삼 놀라 감사했다. 얼마 후엔 흔적도 없을 내 육신, 그리고 또 좀 지나면 모두에게 잊어져 갈 존재, 인생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무언가? 다 허망허탈해도 단 하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귀고 주를 높이며 선전하며 자랑할 수 있다는 그것은 피조물의 더 없는 존재감이요, 사라질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신령한 능력이요, 복음입니다. 복음 중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시며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죽음과 무관한 영원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최고의 복음은 예수님 소식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면 오실 그리스도, 땅 끝은 어디입니까? 지구촌 구석구석이요, 끝 중의 끝은 우리들 마음과 몸 구석구석입니다. 오늘 받는 말씀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아홉 개 구절에서 노년의 성도 모습과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복음인지 함께 듣습니다. 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본문에서 밝히는 말씀의 첫 주제,

 

1.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곧 범사에 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늙었음을 먼저 밝힌 뒤 결국 늙은 아브라함의 인생이 범사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인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오늘날 이 땅을 지나는 모든 나그네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복인 것을 믿습니다.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마땅히 받을 보상이라고(22:4) 밝히는데 그 완성된 복은 예수구원으로 끝납니다.

 

구약시대 제사를 통한 회복과 행위언약은 인간에게 언제나 한계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십자가구원은 오직 믿어 받는 단번의 구원입니다. 제사의 완성으로 예배가 시작되고 행위로 이룰 수없는 의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과 의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른바, 칭의와 구원입니다. 이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은 그러므로 인간에게 최고의 복된 소식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우리가 받은 복과는 다릅니다. 십자가로 받은 복은 대가를 치르지 않은 선물이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모리아산을 통과한 시련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모리아산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골고다언덕을 통과한 주님과 그 십자가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이 늙었고 그가 범사에 복을 받았다는 것은 모리아산을 비롯해 젊어 초년에 귀한 믿음을 위해 많은 시련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이 기근에 견디지 못하고 남방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때까지는(12:12-16) 심하게 가난했습니다. 가난과 공포심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했고 이 때 아브라함은 아직 아브람이란 이름의 초년기, 궁색한 살림에 신앙인격도 천박한 상태였습니다. 아내를 아내라고 밝히지 않음으로 바로가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그 이유야 어찌됐든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밖에 안 되나?” 이런 아브라함의 젊은 날 그 상처들은 후에 돕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신앙성숙을 이루고 끝내 귀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까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로 성장해 갑니다. 열등감이 있습니까? 그것을 퇴비삼아 부쩍 자라는 신앙인격이길 축복합니다. 이토록 부족한 아브라함 인생여정에 있어서 범사에 복을 받는 원천적 이유가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놀라운 약속이 아내를 누이로 속여 팔아넘긴 파렴치하고 황당한 사건에도 하나님이 간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습니다. , 믿음은 있으나 그 믿음을 지키기엔 역부족인 인간의 허물은 예수피로 인류의 죄를 덮듯 하나님의 약속이 덮어주지 않고는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아 늙어 거부가 되었는데 성경은 마침내 거부가 됐다.”로 적고 있습니다. 여기 마침내 라는 말은 기어코. 드디어. 하나님의 뜻과 약속대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거부가 된 아브라함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말할 때 보통 하나님의 약속을 중시합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생명을 건 믿음에는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과 명령 앞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의지적인 노력이 좌시돼선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르고 복된 신앙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장기는 잘 두는데 마지막에 꼭 궁이 잡힌다는 말을 기억합니까? 진정한 의미의 승리는 마지막승리입니다. 아무리 멋지게 싸워도 끝이 비참하면 패자입니다. 젊었을 때 온갖 세상영화 다 누리고 늙어 우상숭배로 망한 솔로몬과는 반대의 삶을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사막 길은 가는 동안 험악한 많은 일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 고달픈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행이 증거되는 것은 성도의 노후입니다. 험악한 세월 속에서도 믿음가운데 곱고 아름답게 사위어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2절 본문이 밝히는 복음의 두 번째 주제는,

 

2.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서원은 자손대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도뼈 또는 허리는 성경에서 자녀생산을 주관하는 의미로 종종 사용됩니다. 야곱도 같은 맹세(47:29)를 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자손가운데 메시아가 오신다는 굳은 믿음과 모든 맹세에 사후에도 자손들을 통해 불변함을 다짐하는 형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는 손을 들어 찬양하기를 즐깁니다. 아름다운 서원의 모습입니다. 이 서원은 손을 든 그 앞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뿐 아리라 우리의 자손에게도 영원한 기업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환도 뼈, 허벅지 밑에 늙은 종의 손을 묻고 맹세를 한 아브라함처럼 우리들의 찬양과 고백도 우리들의 엉치뼈 안, 곧 잉태와 출산의 깊은 궁과 생명싸개 속 깊이 결단으로 새겨져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영원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 맹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까? 3-4절입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그렇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세 번째 주제는,

 

3. 신앙계승은 순수혈통으로 이루어져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압평지의 고스비 등에 꽂은 비느하스의 창, 솔로몬의 말년실패, 아합왕의 악행 등 수많은 신앙파멸은 개인과 민족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노아시대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이 눈에 보기 좋은 사람의 딸들을 취함으로 시작된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불신결혼은 결국 방주를 준비하는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방여인을 통해 자신의 가문이 오염되는 것을 염려했고 순수혈통, 곧 언약의 백성을 따라 그 줄기를 타고 언약성취를 이뤄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불신결혼으로 인해 평생 시험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혼인은 먼저 영적인 결합이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알게 합니다.

 

끝으로 5-6절을 함께 읽습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 본문 5-6절이 제공하는 말씀의 주제 마지막 네 번째는,

 

4. 복음의 씨는 낯익은 아버지 집을 떠난 약속의 땅에서 꽃을 피웁니다.

늙은 종은 혹시 며느리 될 처녀가 자신들이 있는 이곳, 애급에 따라오지 않으면 이삭을 하란으로 데려갈까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합니다. 7절 중간을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혹시 처녀가 따라 오지 않아도 하란에서 며느리를 구하려고 아들을 그리로 데려가진 말라고 합니다. 이삭이 차지할 땅은 거기, 아브라함이 떠나온 고향땅 하란이 아니라 지금 여기 가나안이란 것입니다. 7절에 아브라함의 확신은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다는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그 확신 때문에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즉 아브라함의 맹세는 늙은 종을 따라오는 처녀에 한해서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누가 받습니까?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고 다시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권면해도 따라오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허벅지맹세가 늙은 종과 무관한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끝까지 반응치 않고 거부함으로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자손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브라함처럼 자자손손 귀한 믿음의 대를 잇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기대합니다. 부르심과 명령 앞에 즉시 응답하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른 것에 모두 성공한다 해도 믿음의 유산을 지켜가는 일에 실패한다면 불행한 가문이요, 불행한 인생입니다. 반면 다른 일에 실패하고 좌절해도 그로 인해 하나님을 붙들고 구원받아 믿음의 삶을 시작했다면 그는 성공된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하시고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의 땅은 현실에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반드시 증거됩니다.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밟고 서서 각양 과일맺는 나무그늘아래 찬미예수 기쁜 삶이 이제로부터 그 나라에 이르도록, 자손대대에 예수그리스도의 풍성한 모든 것이 넘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