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恩來(주은래) 수상의 한민족사 왜곡 사과
중국인들이 모택동 보다 더 존경했던 주은래(1898~1976) 수상이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 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있다.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가 맞다.
중국 역사학자들이 조선 사람들을 기자의 후손이라 한 것은 역사왜곡이다.
한민족의 침략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소개함으로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 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감히 주은래를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주은래 문건은 더없는 기록물이다.
주은래 수상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가?
지난 1963년 6월 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주은래 당시 중국 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 사과했다.
그는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가 맞다.”고 분명히 말했다.
아래의 주은래 총리가 말한 중국과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소개 한다.
(중, 조)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지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 송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鏡泊湖(경박호) 부근은 渤海(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支派(지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애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 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 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빨랐기 때문에 한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 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遼族),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골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 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 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 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지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고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 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려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天朝(천조), 上邦(상방)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 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 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여러분 나라도 역시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영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馬援(마원)과 伏波(복파)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才女(재녀)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 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될 것이다.
첨부: 주은래는 선비이다. 정치가이면서 역사공부를 많이 한 선비이다.
여기서 필자가 선비의 정의는: 선비는 事理(사리)를 正道(정도)로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선비가 못되는 역사학자들은 正道로 역사를 보지 못하고, 私利(사리)로서 역사를 재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은래는 전문 역사학자는 못되고, 또한 古代史(고대 사) ~ 中世史(중세사) 만을 말하였다.
고대사 이전에 上古史(상고사)가 있다. 필자는 우리 한민족 이 人類文明(인류문명)의 始原(시원)이라는 것을 說破(설파)한다.
“중국 쥐나(china)족의 문명은 우리의 조상 東夷族(동 이족)이 일깨워준 문명이다.”
주은래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고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주은래의 중국이 조선보다 컸다는 것은 中世史 이후로는 인정하나 문화발전이 조금 빨랐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주은래는 古代史와 中世史만을 탐구하고 거기까지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류학자들이 지구상에 인류가 최초로 발생한 곳은 ‘아프리카’라고 한다.
이 학설을 믿고 받아드리는 관점에서 인류가 발생한 아프리카는 原始(원시)시대이지 문명의 시대는 아니었다.
인류문명의 始原(시원)은 지금으로부터 1만여년 전 파미르고원(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국가를 성립한 桓仁天帝(한인천제)의 桓國(한국)에서부터이다.
옛 桓國(한국)에 12나라가 있었다.
- 桓國(한국)의 12나라 이름
卑離國 養雲國 寇寞汗國 句茶川國 一群國 虞婁國(一云 畢那國)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일운 필나국)
客賢汗國 句牟額國 賣句餘國(一云 稷臼多國) 斯納阿國 鮮婢國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일운 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국
(一稱 豕韋國 惑云 通古斯國) 須密爾國 合十二國也
(일칭 시위국 혹운 통고사국) 수밀이국 합십이국야
이렇게 12나라가 연합국을 형성하여 桓國(한국) 이라는 나라를 桓仁天帝(한인천제)가 오랜 세월 다스렸는데 지금으로부터...5915여 년 전 桓雄天皇(한웅천황)이 3,000의 무리(동지)를 이끌고 태백으로 이주하여 우리의 ?한?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12나라중의 須密爾(수밀이)는 BC 24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지역 유목민의 수장이었던 아카드의“사르곤”이 세계최초의 제국 (수메르)을 건설했다.
이“사르곤”에 의하여 “수멜법전”이 나오고 그로부터 이어지는“함무라비(BC1750년 사망)”에 의하여“함무라비 법전”이 나오고 이어서 모세에 의하여 구약의“모세5경”이 나온다.
이렇게 사르곤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唯一神思想(유일신사상)이 형성됐고, 우리는 한웅천황이 3,000의 동지를 이끌고 태백으로 이주 할 적에 桓仁天帝(한인천제)께서 可以 弘益人間(가이 홍익인간) 하라는 유지를 받들어 배달국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합 3660여 년을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의 평화의 세상을 동아시아에 펼쳤다.
이렇게 같이 출발한 나라들 중에 우리조상 동이족만이 在世理化 弘益人間의 정신문명을 계승 발전시켰고, 중동지방으로 뻗어간 수메르 민족은 홍익을 전수하지 못하고,
唯一神思想(유일신사상)인 二元論(이원론) 兩分法(양분법)의 정신문명을 일으켜 이것이 서구로 뻗어나가 오늘날 지구촌 인류를 지배하는 價値觀(가치관)의 精神文明(정신문명)이 됐는데,
桓國시대의 庶子之部 大人 桓雄(서자지부 대인 한웅)은 弘益人間思想(홍익인간사상)의 先驅者(선구자)로서 백성들을 三神說敎(삼신설교)로서 교육하였다.
그러나 虎族(호족-노랑머리족)은 한웅의 교육에 따르지 않고 호전성을 드러내었고, 熊族(웅족-검은머리족)은 한웅의 교육에 잘 따르고 순응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웅족과 호족간에 싸움이 벌어져 호족을 四海(사해-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아랄해) 밖으로 내쫓는다. 이들이 오늘날 유럽 국가들이 되었고,
웅족은 한웅천황을 따라 太伯山(태백산)으로 이주해 와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되었다.
이 무렵에 중국 지나족의 조상 盤固(반고)는 三危山(삼위산)으로 이주 해 왔는데, 반고는 十干(십간), 十二支(십이지) 육십진법을 가지고 왔다.
十干: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十二支: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를 가지고 왔다.
한웅천황은 桓國에서 펼치지 못한 홍익인간이념을 倍達(배달)에서 펼쳐 18대 1565년을 이끌었고, 이를 계승한 檀君(단군)은 47대 2096년을 古朝鮮(고조선)을 이끌었다.
桓仁天帝의 桓國~ 桓雄天皇의 倍達~ 檀君皇帝의 朝鮮은 계승하였다.
지구촌 인류의 역사에 전임왕조를 다음 왕조가 계승한 역사는 오로지 한민족 밖에는 없다. 주은래의 중국도 새로운 왕조는 하나같이 전임 왕조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였다.
우리는 고조선이 끝나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때까지만 해도 중국과 중원대륙의 대등한 영토를 소유하고 힘 또한 대등한 관계였으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비러 삼국통일을 하면서부터 고구려의 옛터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었으나 이때부터 우리는 중국에 밀려 축소되기 시작하였고, 고려를 지나 근세조선이 되면서부터는 儒學(유학)을 국가의 시책으로 삼으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 우리가 저들의 앞선 문명국임을 증언하고 있다.
①君子나라가 북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다투는 일이 없다.(山海經) (여기에서 우리를 동쪽이라 하지 않고 북쪽이라 한다. 이것은 저들은 중원대륙의 남쪽이고 우리는 북쪽이란 뜻이다.)
②東方은 仁國이라 君子들이 살고 있는데 예절이 바르고 서로 사 양하기를 좋아한다. (山海經)
③그들은 서로 칭찬하기 좋아하며 헐뜯지 않으며 사람이 환란을 당 하는 것을 보면 서슴지 않고 죽을 데라도 뛰어 든다. (東方朔 神異經)
④부여 사람은 체격이 크고 용감하며 勤厚(근후)하여 무던하며 남 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으며 밤낮 없이 모여 노래 부르기를 좋아 한다. (後漢書)
⑤그들은 인간성이 굳세고 용감하다. (後漢書)
⑥그 나라 풍속이 길을 가다가 서로 마주치면 먼저 길을 비켜 사양 한다. (三國志)
⑦그 사람들의 성품은 착하고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다. (三國志)
⑧그들은 도둑질 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느 집도 문을 잠그지 않으 며 婦人(부인)들은 정조가 강하여 음란한 데가 없다. (漢書)
⑨夷란 根本을 뜻하며 東夷는 生育의 뜻이다. 中國에서 禮를 잃었 을 때에는 東夷에 가서 배워야 한다. (後漢書)
이러한데 중국의 문화발전이 우리보다 좀 빨랐다고 하는 주은래의 말은 틀린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상실하여 우리의 자신을 잃어 버렸다.
중국은 대국이고, 우리는 소국이라는 속성은 우리가 외래종교를 받아 드리면서부터 事大主義에 찌들어 부뚜막의 소금을 놔두고, 남의 밥의 콩이 굵다고만 보고 쫓아왔다.
독자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忘却(망각)하고 貪慾(탐욕)이 머리끝까지 치솟고, 국가와 민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四分五裂(사분오열)하여 焚蕩質(분탕질)만 하고 있다.
桓期 5915년 7월 6일
居發桓 桓雄의 子孫 弘仁 朴 鑽 羲 올림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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