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직폭력배의 역사 ]
하야시
마루오까
김두한과 우미관 식구
김두한과 그의 참모 김영태
김두한의 오른팔격이었던 별명 종로꼬마 이상욱
한국에서 조직적인 폭력배의 태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구한말에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권과 함께 시작된 주먹의 역사는 상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주먹들은 과연 어떤 옷으로 갈아 입으며 변화해왔을까.
그들이 기생한 사회환경과 이권 추구 방법,
그리고 조직을 유지한 나름대로의 철학 등을 종합해볼 때
한국 주먹의 역사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제1기는 일제치하와 광복 공간의 ‘낭만파 주먹시대’이며,
제2기는 자유당 정권 시절 정치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정치깡패의 시대’로 나뉜다.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주먹세계는 한동안 숨을 고르다
70년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먹을 ‘파이’가 한결 커지자
피비린내 나는 조직끼리의 전쟁을 통해
‘전국구 주먹시대’로 접어든 게 바로 제3기다.
제4기로 불리는 현재의 주먹세계는 음습한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업가형 폭력배 시대’로 변신했다.
●한국 주먹패의 효시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0 ~1898)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의 시초는 과연 언제일까. 역사학자들중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만든 사조직을
조직 폭력배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많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불량배와 어울리며 안동김씨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는 연막전을 폈고,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보좌에 앉힌 뒤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권력투쟁의 고비마다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전위부대로 적극 활용했다.
이전에도 객주나 나루 주변에 상인들을 갈취해 돈을 뜯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폭력행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다.
●제1기 낭만파 주먹시대 : 3자 구도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한국 주먹의 본격적인 장은 1930년대에 열렸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식민시대의 울분을 토해낼 길이 없어 폭력배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사회과학적인 논리가 결여된 유치한 발상이다.
사회현상은 구조적인 틀 속에서 입체적으로 설명돼야 한다.
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로 토지수탈과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겪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먹고 살 길이 나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암흑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시 경성은 조선인이 주도하던 종로상권과 일본인이 밀집한 명동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먹패들은 상권에 기생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시 주먹세계도 자연스레 양분돼 있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로 알려진 한국인 선우영빈.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거물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량사’의 보스
도오야마 마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만큼
조선 내 야쿠자의 우두머리로 막강한 조직 장악력을 과시했다.
반면 종로의 주먹패는 명목상 ‘구마적’ 고희경이 오야붕의 위치에 있었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해 하야시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로를 장악한 주먹이 조선 최고의 오야붕으로 인정받던
당시 주먹판의 권력판도는 구마적을 비롯해 학생패를 이끈
보성전문 출신의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 등이
형성한 삼자구도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엄동욱은 학생패라는 충성도 낮은 조직의 한계로 패거리의 전체적인 힘에서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구마적의 반열에 올랐다.
김기환도 구마적의 하부조직에 편입돼 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조직력으로 구마적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조직 편제상 ‘구마적’
휘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주먹 계보로 활동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갈취한 일종의 세금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협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다.
●김두한의 천하통일
삼자구도를 형성하던 조선 주먹계가 1934년 김두한에게 평정됐다.
김두한의 당시 나이는 18세.
김기환이 구마적에게 패해 조직을 넘겨받은
김두한이 신마적과 구마적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주먹세계를 통일했다.
이후 조선의 주먹판도는 하야시와 김두한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하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항일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하야시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은 갈등보다 동반자적인 관계로 각자의 수익구조를 유지했다.
김두한 역시 생존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인 ‘노변야화’에 출연해
“하야시패와 장충단에서 일전을 벌인 뒤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 간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주
먹패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도
총독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
●광복 공간의 암흑세계
광복 후 좌우의 이념대립 바람은 주먹세계에도 몰아쳤다.
우익 주먹들은 김두한이 선봉에 서 ‘민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이북 출신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뒤를 이었다.
좌익 주먹패는 김두한의 친구인
정진용(야인시대에는 정진영으로 나오지만 문헌상으로는 정진용이 올바른 표기)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대표적이다.
좌익에 대한 김두한의 백색테러는 악명 높았다.
파업현장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고 정진용을 살해한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좌우대립은 권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활동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주먹세계의 경쟁도 외부 유입 세력의 가세로 한층 치열해졌다.
6·25가 터지고 이북 출신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하야시패가 떠난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
명동 동부의 중앙극장을 차지한 정팔 등이 대표적인 이북 출신 주먹패.
일제시대 중원을 떠돌던 시라소니 이성순도 광복 후 동향인 신의주 출신 정팔의 요청으로
‘중앙극장파’에 잠시 몸을 담았다.
낭만파 주먹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광복 뒤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다.
생존을 위한 기생형 폭력 조직의 성격을 띤
제1기 주먹시대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폭력의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조직 끼리의 대결도 흉기에 의존하기보다 맨손으로 치러 어떻게 보면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매춘 아편 등 쉬운 수입이 보장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조직원 끼리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등 주먹 철학도 엿보인 시기다.
이 때를 낭만파 주먹시대라 부르는 이유다.
●제2기 정치깡패의 시대
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친 한국 주먹들은 생활의 물적 토대를 확보한 뒤
본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시대적인 환경도 이들의 ‘몸집 불리기’에 튼실한 자양분을 공급했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무주공산이 된 주먹계에
현대적 의미의 조직 개념을 도입한 이정재가 급부상했다.
동대문 상인조합 이사장이 된 이정재는 막강한 자금과 조직력을 앞세워
자유당 이기붕에게 접근해 정치권과 손을 잡는다.
57년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 등을 주도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정재는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까지 역임하며 한국의 도야먀(頭山滿)를 꿈꿨지만
결국 5·16쿠데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휘하에는 자유당의 사주로 4·18 고대학생 습격사건을 주도한
유지광을 비롯해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임화수와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잔인한 린치를 가해
주먹생명을 끝낸 이석재 등이 포진해 있었다.
동대문사단은 본격적인 정치깡패의 시대를 열었지만
시라소니 린치 사건에서 보듯 ‘협객’이라고
자처하던 낭만파 주먹시대의 물을 흐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 김두한으로부터 종로를 넘겨받은 심종현을 비롯해
광화문의 장영빈, 서대문의 최창수, 소공동의 홍영철 등이
나름의 주먹 계보를 이어왔지만 정치권과 결탁해
독주하던 동대문사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정치권도 동대문사단의 바람막이 구실은 물론 적극적인 비호를 서슴지 않았다.
이정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이화룡의 명동파를
‘충정로 도끼사건’을 빌미로 제거해주기도 했다.
정치깡패의 시대를 이끈 이정재는 느슨하던 주먹 조직을 기업형으로 새롭게 재편하고,
활동공간 역시 광역화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조직폭력배의 발판을 다졌다.
특히 충성도 높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이천 지역 출신을 대거 중앙으로 끌어들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탄탄한 결속력을 과시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단과대 학생회장단 주도로 열린 3·15부정선거 및
자유당 독재 규탄집회는 밤까지 가두행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해산 과정에 정치 폭력배들이 급습해 학생 상당수가 다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력배들의 눈을 피해 어렵사리 찍은
이 사진이 19일 신문에 실림으로써 4·19혁명의 작은 도화선이 됐다.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피고인 - 1960년 7월 9일
4월 혁명 뒤 집권 자유당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정치 깡패들이 법정에 불려와 재판을 받았다 - 1960년 7월 16일
정치깡패사건 심리 광경
신도환, 임화수 등이 모두 거짓 진술을 한다고 비난하는 유지광 피고 - 1960년 7월 16일
법정에서 진술하는 신도환 피고 - 1960년 7월1 6일
첫 심판대에 출두하는 독재의 앞잡이 정치깡패 - 1960년 7월 6일
깡패들의 행렬. 이름표를 붙이고 시내를 일주했다 - 1961년 5월 21일
맨앞이 이정재
신도환 피고 - 1961년 8월 8일
1961년 1월19일 정치깡패 문장주, 주요한, 김태련, 김성종, 강승일이 공판장에서 재판을 받고있다.
1961년 8월 고려대생 피습사건 구형공판에서 임화수는 사형을, 유지광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고려대생 피습사건 용의자인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이 현장검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1961년 8월
고려대생 피습사건의 용의자인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이 현장검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1961년 8월
정치깡패 문장주, 주요한, 김태련, 김성종, 강승일이
공판장에서 재판을 받고있다 - 1961년
고대생피습사건의 피고인 17명에 대한
판결공판이 혁명재판 1호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이 공판에서 임화수 사형, 신도환 무기징역, 유지광 12년형을 언도받았다.
사진 왼쪽부터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 1961년 8월25일
전 반공청년단장실에서의 좌측이 임화수
가운데 신도환, 우측 뒤에 유지광 피고 정치깡패사건 심리 광경 - 1961년 8월 8일
●제3기 전국구 시대
5·16쿠데타 이후 깡패 소탕령으로 숨을 죽이던 주먹세계는
63년 민정 이양 이후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지리멸렬하던 주먹계를 잠시나마 통일한 사람이 바로
‘신상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신상현이다.
그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의 행동대장 출신으로 과도기에 ‘밤의 황제’로 등극했다.
‘신상사파’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눈부신 경제성장은 주먹세계의 변화를 요구했다.
경제개발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지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온 청년들은 손쉽게 ‘
검은 세계’에 편입돼 주먹계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오종철과 박종석(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당시 패권세력이던
‘신상사파’와 일촉즉발의 대결구도로 치닫는다.
범호남파는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상대적인 박탈감에다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갑작스레 주먹세계로 편입됨에 따라
이전과 달리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냈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싸고
명동의 사보이호텔에서 신년회를 열던 신상사파를 급습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이러한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즈음에 한국 주먹사는 잔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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