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3.주일예배<시119:111-112. 우리의 기업, 주의 증거들>
[고통이 깊을수록 구원의 감격은 그 빛을 더해 간다. 내가 통증을 느껴 호소하는 것은 아직 내게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요, 세월 갈수록 회개뿐이라면 그건 내 양심과 영의 생명력이 건강해서 소리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아픔도 절망도 모두 소망과 감사의 제목인 이유이다.]
시편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노래로 함축하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예배와 찬양에 초점이 맞춰진 아름다운 탄원과 고백들입니다. 본문이 담긴 시편 119편은 위기를 당할 때 119를 돌리듯 성도가 힘들 때 펼쳐 볼만한 매우 요긴한 고백과 노래들이 가득한 시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입니다. 오늘 주시는 본문의 주제가 기업이라면 풀이말은 증거입니다. 특별히 본 시119편에는 증거라는 말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주님의 증거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을 영원히 기업 삼게 된 성도는 그 증거가 어떤 즐거움이기에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가? 히11: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증거입니다.
사방 천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함께 저절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능력으로 스스로 생겨납니까? 누군가 특별하고 절대한 창조주체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주는 그 피조세계의 고안에서 삶의 여정과 결과까지 계획했고 간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 눈에 들어와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과 보여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존재의 모두, 즉 계절과 소리, 바람, 사랑, 마음에서부터 동식물, 바위와 물, 불과 구름 등 형상이상과 이하의 모든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히11: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탁월한 학문과 지식으로 모든 물질이 생긴 원인을 우연에서 찾습니다. 우연(偶然)은 사물의 원인을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일”에서 찾습니다. 황당합니다. 땅에선 답이 없는데 답을 만들어야 하니 황당한 게 답이 됩니다. 그렇게 모든 사물은 분명한 그 생겨난 이유가 있고 과정과 결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롬11:36절은 이 만물의 근원과 과정과 결국을 하나님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찾아 밝힙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요 창조의 능력인 말씀이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의 마지막 답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보이는 증거에서 얻는 혜택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던 안믿던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공기와 하늘과 비와 심장이 뛰는 것과 겁나는 것, 즐거워 노래하는 것과 배고픔과 졸리면 눕고 싶은 것이 모두 일반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들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은혜되는 것은 은혜를 깨닫는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반은총과 같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증거들은 만물 어디에도 해당되지만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증거가 될수도 있고 증거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방금 읽은 히11:3절처럼 우리들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고 있습니다. 롬1:20절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 세상 불신자들이 아무리 엉뚱한 소리를 해도 우리는 만유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압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또 우리들의 양심과 상식, 과학 또한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말하면 사실상 억측입니다. 본문 시편기자는 주의 증거들로 영원한 기업을 삼았으며 그것은 마음의 즐거움이 된다고 노래합니다. 주의 증거가 마음의 즐거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19절을 함께 읽습니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2. 저와 여러분의 몸과 삶이 주의 증거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서의 말씀은 다른 말로 성도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은 우리들의 믿음과 신앙인격과 양심을 드러내는 구체적이고도 유일한 기관입니다. 몸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삶으로 행할 때 몸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거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 없는 삶은 없습니다. 몸을 잘 살펴보면 내 삶의 모든 생리와 행태가 보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집이요, 성전이면서도 참으로 귀하고 신묘한 작품입니다. 특히 우리 몸이 주의 거룩한 전이라는 말씀은 성도의 삶이 그 본질을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의 삶은 언제나 찬송과 기도와 말씀 앞의 순종으로 인한 풍요와 기쁨과 감동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증거로 영원한 기업을 삼은 성도는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만유가 주의 증거이듯 또한 몸이 그대로 주의 증거인 것입니다. 105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도의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한 부활과 영생입니다. 먼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고 그것은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의 중요한 삶의 진리이자 몸에 담아야 할 주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기업으로 삼을 하나님의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행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본문이 말한 주의 증거란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미 행하신 의로운 구원의 역사들입니다. “주여. 내게 행한 일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개개인을 통한 하나님의 발자취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구원과 증거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한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자의 자리에 선 것은 부족과 죄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몸에 담고 있는 주님의 증거들을 살피보면 은혜 아닌 게 없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절에 바울사도는 자신의 몸에 남겨진 복음전도의 증거를 통하여 더욱 확고한 주의 나라에 대한 열심과 소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바울사도의 흔적과 우리들이 지닌 증거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생명을 건 사투의 흔적, 몽둥이자국과 찢겨진 자국이고 저와 여러분의 흔적은 십자가로 다 갚아주셔서 이젠 값없이 받고 있는 풍요의 흔적인 것을 우린 결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풍요는 값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주님주신 길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믿음의 선지들로 인해서 우리는 이렇게 풍요의 시대에 각종 혜택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200여 년 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와서 작두날에 죽고 맷돌에 달려 물에 잠겨죽고 풍토병에 자녀들과 함께 죽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으로 뿌린 그 피값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기 위해서 피한방울 흘린 일이 없습니다. 피를 흘리기는커녕 오히려 전하는 귀한 전도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반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젠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 따라 십자가를 기쁨으로 져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길로 받아 몸 바쳐 용감하게 복음을 전했던 믿음의 선조들은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최고최상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 앞에 시편기자는 뭐라고 합니까?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을 품고 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아래에서는 더 이상 율법과 사망이 인간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크신 능력이요, 증거가 아닙니까? 내 구원과 내 영원한 생명을 위해 누군가 대신 죽어주고 죄에서 홀가분하게 했다는 사실만큼 더 큰 복음은 없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전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저와 여러분의 기업이 되길 바랍니다. 기업은 이윤창출을 기반으로 안정과 부요와 번창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업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지존지고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흔적들이 저와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운 기업되길 바랍니다. 주의 십자가와 그 증거들을 기뻐함이 이 세상과 내세의 안정이요, 부요함과 번창이 될 것입니다. 주의 증거는 비단 이루신 구원의 역사뿐 아니라 만물이 그것이요, 내 몸이 증거요, 주를 믿는 믿음이 더욱 증거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112절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주의 증거들이 더욱 기쁨의 믿음과 즐거움으로 우리 안에 뿌리내리려면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1938년 강릉북평 술장사출신 최인규권사가 개척한 천곡교회와 그가 멘 인분통. 고통스런 손톱고문과 알 수 없는 영혼의 기쁨.)
3. 기쁨의 믿음은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여 쏟아 붓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았다는 고백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마음을 기울임으로 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요. 물을 항아리에 따르려면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쏟아 부으려면 주님께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 종교인은 많아도 진정 증거를 기쁨삼기 위해 헌신된 신앙인은 보기 힘든 풍요의 시대입니다. 오히려 궁핍하고 생명이 위태했던 핍박의 시대에는 지금처럼 늘어지고 게으른 믿음이 아니라 절박한 가운데 간절함으로 신령한 많은 경험과 결단으로 충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건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은 고통 중에도 넉넉히 순교에 이르게 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한 풍요의 시대, 안타깝게도 부족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믿음과 열정이 부족해서 신령한 기쁨과 감격이 메말라 버린 겁니다. 증거가 확실한데 기쁨이 없다면 증거를 믿는 믿음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인생이 왜 즐겁지 못한가? 구원과 은혜의 증거가 없어서인가? 약속이 없어서인가? 아닙니다. 욕심은 넘치고 믿음은 그 아래에 있어서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믿음으로 확실한 증거, 십자가와 모든 하나님의 복된 증거를 붙잡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함이 기업이 돼 남은 생애, 자손들과 함께 거룩하고 기쁨 넘치는 삶이되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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