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
새로운 지도자 카이사르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계속해서 땅을 넓혀 갔어요.
*“이제 지중해에서는 아무도 로마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농민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어요. 땅은 오랫동안 돌보지 못해서 못쓰게 된데다가 로마가 다스리는 나라들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왔지요.
*“전쟁이 끝나서 좋아했는데, 농사를 지어 봤자 값싼 농산물들만 팔리고 우리 것은 팔리지도 않으니…….”
*농민들은 결국 땅을 팔아야만 했고, 이 땅을 귀족들이 싼값에 사들였어요.
*“이 넓은 땅을 어떻게 한다? 그래, 노예를 사서 농사를 짓게 해야겠군. 그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
*엄청난 땅을 사들인 귀족들은 대농장을 갖게 되었어요. 귀족들은 노예를 더욱 심하게 부리며 재산을 쌓아 갔어요.
*“정말 못살겠어. 굶어 죽느니, 싸워 보기라도 하고 죽자.”
*귀족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지요.
▶ 이 무렵, 그라쿠스 형제가 부자들의 땅을 농민에게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땅을 가진 귀족들은 이 의견에 반대했어. 뿐만 아니라 그라쿠스 형제 중 형을 죽이기까지 했지. 동생도 죽게 되면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하고 만단다.
*게다가 외적이 자주 쳐들어와 로마는 매우 혼란스러웠어요. 이런 혼란 속에서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로마는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인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그리고 크라수스가 이끌어 갈 것이오.”
*이 중에서 특히 카이사르는 로마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어요.
*“카이사르가 우리를 반드시 지켜 줄 거야. 그는 우리의 위대한 전사이니까!”
잠깐 퀴즈
로마가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며 권력을 잡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정답 :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전투에서도 스스로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부하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충성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 덕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까지 차지할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곱지 않은 눈으로 카이사르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원로원이었지요. 원로원의 의원들은 카이사르가 로마를 독차지할까 봐 두려웠어요.
▶ 이 무렵 로마에서 힘을 가지려면 돈과 군대가 있어야 했어. 카이사르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돈을 모두 쓰고, 또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시민들에게 주었지.
*갈리아 :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지방
주사위는 던져졌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말이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뜻할 때 쓰이지.
*원로원의 의원들은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지방으로 가자 조용히 폼페이우스를 찾아갔어요.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이미 크라수스는 전쟁 중에 죽고 없었지요.
*“이보게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가 없어지면 자네가 로마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에 폼페이우스는 귀가 솔깃했고, 원로원의 뜻대로 카이사르가 *반역을 했다고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리고 카이사르를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게 했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크게 화가 났어요.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어요.
*그러다가 *루비콘 강 앞에서 잠시 망설였어요. 루비콘 강은 로마와 갈리아 지역을 가르는 강이에요. 그 당시에는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어요.
*‘아아, 저 강을 건너면 진짜 반역을 하는 게 아닌가?’
*마침내 카이사르는 칼을 높이 쳐들어 병사들에게 외쳤어요.
*“나의 병사들아!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을 건너 로마로 가자!”
*이 소식을 듣고 로마는 발칵 뒤집혔어요. 원로원은 카이사르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했어요.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폼페이우스도 재빨리 달아나 버렸지요.
잠깐 퀴즈
카이사르가 법을 어기고 건넌 강은 무엇인가요?
정답 : 루비콘 강
*결국 카이사르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로마에 들어왔고, 원로원도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어요.
*‘폼페이우스를 없애야 해. 그가 살아 있는 한, 언젠가 또 나를 쓰러뜨리려 할지 몰라.’
*곧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폼페이우스가 숨어 있는 이집트로 갔어요. 이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왕의 자리를 놓고 남동생과 싸우고 있었어요.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이 말했어요.
*“우리가 먼저 폼페이우스의 목을 쳐 카이사르에게 바칩시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이집트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오자 도움을 청했어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해 이집트를 독차지할 셈이었지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동생을 물리치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이 되게 해 주었어요.
▶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가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생기 넘치는 매력이 있었다고 해.
또 악기 소리처럼 아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구나.
*총독 : 한 지역 안의 모든 행정을 맡아보는 관리
*루비콘 강 : 프랑스 지방과 이탈리아 사이에 있어요.
*클레오파트라 : 기원전 69년에 태어난 이집트의 여자 파라오예요.
카이사르의 죽음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도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머물러 클레오파트라와 지냈지요.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어요.
*“이 기회에 카이사르를 없애 버립시다.”
*곧 군대가 꾸려졌고, 로마군은 이집트로 쳐들어왔어요. 하지만 카이사르는 단숨에 원로원이 보낸 군대를 무찔렀어요. 게다가 어수선해진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지방까지 잠재웠지요. 카이사르는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제 카이사르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카이사르는 가슴 깊이 품어 왔던 커다란 꿈을 펼치려 했어요.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지요. 하지만 로마의 원로원과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될까 봐 불안했어요. 그래서 카이사르를 없애기로 했지요. 그들은 브루투스를 부추겼어요.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아끼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카이사르를 죽이는 데 브루투스도 함께했어요.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는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기고 숨을 거두었어요.
노예들의 반란
포에니 전쟁에서 이기면서 노예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지요.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진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어요. 노예들 중에는 요리사, 가정교사, 이발사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광산에서 일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했지요. 그들은 힘들게 일하며, 가축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았어요. 결국 노예들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지요. 처음에 로마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노예들에게 밀리기도 했어요. 로마는 많은 수의 군대를 보내고 나서야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어요.
재산을 불리는 귀족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이기면서 엄청난 재산을 챙겼지만, 이익을 본 것은 귀족들뿐이었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어요. 농민은 물론이고 가혹한 대접을 받았던 노예들 역시 불만이 커졌지요.
세 지도자의 정치
농민과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혼란스러울 때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가 로마 땅을 나누어 다스렸어요. 특히 카이사르는 여러 지방을 정복해서 로마의 영토를 넓혔고,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게 되었지요.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
크라수스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카이사르가 평민들에게 인기를 끌자 불안해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꼬드겨서 카이사르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모함했어요. 결국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갔고, 로마의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여기서 잠시 주몽의 이야기를...
*부여 :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북만주 지방에 세워진 나라예요.
잠깐 퀴즈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정답 : 주몽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농민들이 살기 어려워진 까닭은 무엇인가요?
정답 : 로마가 다스리는 나라들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왔고, 노예를 부리는 귀족들의 대농장 때문에 농민들이 심고 가꾼 농산물들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죽이기로 한 원로원의 뜻을 따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답 : 카이사르를 없애면 자신이 로마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에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Marcus Antonius and Cleopatra
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눈 끝에 카에사리온이란 아들까지 낳은 바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다급히 이집트로 귀국하여 자기가 로마로 떠날 때 형식상으로 세워 놓았던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아들 카에사리온을 왕으로 세운 뒤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모두 소탕한 뒤 동방 속주에서의 자기의 명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소아시아 지방을 순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클레오파트라를 키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호출했다. 호출 이유는 그녀가 원로원파를 돈으로 매수했다는 풍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 보려는 의도였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호출 명령을 받은 클레오파트라는 즉시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그녀는 과거에 카이사르를 유혹해서 정권을 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어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켜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한 배 위에서 화려한 향연을 베풀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들뜨게 했으며, 재치 있고 매력이 넘치는 사교술과 요염한 자태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그 본분마저 잃어버렸다.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미루어놓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월을 보냈다.
이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남편을 로마로 끌어오기 위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남편의 부하 한 사람과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싸움을 붙이자, 그러면 남편은 틀림없이 로마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의 생각대로 사건이 발생하자,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풀비아는 돌아온 남편과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귀국한 안토니우스를 이해 화해를 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도 불러 3년 전에 성립시켰던 삼두정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때에 3인은 각자의 지배 영토를 분배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에스파냐를,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차지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아내를 잃은 안토니우스와 자신의 과부 누이인 옥타비아를 결혼시켜서 유대를 굳게 다져갔다.
이제 삼두정치는 세 사람의 균형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해졌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하여 로마의 곡물 수입을 방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삼두 체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해도 해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던 중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6년에 그의 유명한 부하 아그리파를 보내서 섹스투스의 세력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인기를 한몸에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력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됨으로써 군사력에 있어서 로마의 최강자가 되었다. 곧이어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실각시켜 아프리카 속주까지 차지하여 명실공히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몇 년 전에 중단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 로마를 떠날 구실을 찾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대동하고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 여자의 품 안으로만 파고드는 장군의 지휘 밑에서 원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결국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많은 유능한 장병들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안토니우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페니키아, 시리아, 키프로스 등의 로마의 속주들을 자기 멋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는 일종의 매국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시민들은 흥분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나일 강의 마녀다. 그런 여자에게 놀아나는 안토니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처벌해야 한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점점 더 인기가 상승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로마 시민들이 그를 욕하건 말건 간에 그에게는 오직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다는 것만이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33년에는 그의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정식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로마에서 공표되었다. 내가 죽거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옆에 묻어달라.
이쯤 되자 로마 시민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를 당장 로마로 끌어와 시민 앞에 세우고, 마녀 클레오파트라를 우리의 손으로 쳐죽이자."
이런 분위기를 타고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집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은 이집트에 대한 도전장이라기보다 안토니우스 세력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선언이었다.
운명이 걸린 이 전쟁을 맞이하고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육군은 비록 예전만은 못해도 아직 옥타비아누스보다는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에 따라 해전으로 승부를 내기로 결정했다.
전쟁은 그리스 서북쪽 악티움에서 기원전 31년 9월 1일에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얼마간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결판도 나기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가 싸움터에서 빠져나가자, 안토니우스도 허겁지겁 뒤를 쫓아 달아났다. 그의 부하들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계속 싸우다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로마의 2단 군선을 나타낸 부조. 옥타비아누스(동명: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에 새겨진 것으로, 왼쪽 아래의 악어는 리비아를 상징한다.
악티움의 패전으로 몹시 상심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불행하게 되었다고 슬퍼하면서 지하 묘실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시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다.
"여왕께서는 장군의 불행을 슬퍼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안토니우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클레오파트라여, 외로워 말고 나를 기다려라. 이제 나도 네 곁에 가리라."
이 말을 남기고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배를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즉시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순간에 클레오파트라의 시녀가 다시 나타났다.
"여왕께서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시녀는 깜짝 놀라며 안토니우스를 지하 묘실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성 어린 치료에도 불구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슨 로미오와 쥴리엣을 보는 듯...)
안토니우스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는 쉽게 함락되었다.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기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행렬에 내세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마지막 결심을 했다. 몸을 단정히 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는 독사에 물려 자살하고 말았다.
"저는 로마의 위대한 영웅을 파멸시킨 불행한 여자입니다. 비록 저의 잘못이 클지라도 그대의 부친 카이사르를 생각해서 저의 시체를 욕되게 하지 마시고 무사히 장례를 치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렇게 해서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던 헬레니즘 왕국들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남아 있던 이집트마저 멸망하고 로마의 지중해 통일이 완성되었다. 아울러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100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로마의 내란도 모두 끝나 사람들은 "옥타비아누스 만세!"를 외치며 평화를 맞았다.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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