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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쉽게 잊는 민족과 쉽게 못 잊는 민족… 하지만 이웃으로 살아야" / 백강전투

by 설렘심목 2015. 9. 21.

[최보식이 만난 사람]

"역사 쉽게 잊는 민족과 쉽게 못 잊는 민족… 하지만 이웃으로 살아야"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 2015.07.13 03:00 | 수정 : 2015.07.13 09:17

한·중·일 문명비평서 '풍수화(風水火)' 출간, 당대최고의 수학자 김용운

"외교서 감정 드러내기보단 국가 이익 얻는 것 중요 // 日 바뀌도록 이끌려면 우리 스스로 品位 올려야 "

"죽은 사람은 '호도께(부처)' 戰犯도 도둑놈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호도께 돼 神社 참배도 같은 맥락"

김용운 선생은 “일본인은 권력 앞에 ‘어리광’을 부리고 한국인은 ‘뗑강’을 부린다”고 말했다.
김용운 선생은 “일본인은 권력 앞에 ‘어리광’을 부리고 한국인은 ‘뗑강’을 부린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나는 '위안부 소녀상'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후손들에게 자존심을 살리는 인물을 내세워야지, 왜 당한 사람을 내세우는가요. 프랑스의 잔다르크나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등은 그 나라의 기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김용운(88) 한양대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인터뷰가 거의 논쟁처럼 됐다.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니까요. 일본이 인정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상하고 아픔이고 상처입니다. 자기 상처를 선전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마치 춘향이 관아에 끌려갈 때 월매가 뒹굴면서 '우리 집에 초상났네'라며 울고불고했던 것처럼 그런 행동이 동정받을 수 있다는 심리가 우리 무의식에 작용한 게 아닐까요. 일반 국제 상식으로는 어떻게 비칠까요?"

―그렇다면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는 아베 정권의 일본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겁니까?

"이미 '고노 담화(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에서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어요. 그 이상의 사과를 또 받아야 하나요? 외교는 우리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상대도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은 '패전(敗戰)'을 인정한 적이 없어요. '종전(終戰)'이지. '미군에 점령당했다'는 표현도 안 씁니다. '미군이 주둔했다'고 하지. 얼마 전 논란이 된 강제 노역 표현도 'forced to work'이지 'enforced labor'는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런 일본을 향해 우리의 입장·가치관만 강요하면 그건 외교가 아닙니다."

―가해자는 일본인데,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가 마치 잘못된 것처럼 들립니다.

"국가 이익을 말하는 겁니다. 이웃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영원히 바뀌지 않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살아야 하는 사이입니다.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말로 반성을 강요할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바뀔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만은 어떤 막말을 해도 애국이 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를 만난 것은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라는 책을 읽은 뒤였다. 책 제목은 신바람(風)의 한국, 모든 문명을 녹여버리는 물(水)의 중국, 화산처럼 폭발하는 불(火)의 일본을 의미했다. 왜 한·중·일 관계가 지금처럼 됐는지 민족의 집단 무의식과 지정학(地政學)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참신하면서 논쟁적인 시각과 시공을 넘나드는 박학(博學)함에서는 근래 본 국내 저작물 중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별로 화제가 안 된 것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인문학이나 역사 전공자가 아닌, 당대 최고의 수학자(數學者)였다는 점이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은 대학 연구실처럼 책으로 쌓여 있었다.

―80대 후반에 한·중·일 3국의 역사와 문화, 의식구조를 비교분석해 이런 대작(大作)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나이 먹었다는 느낌은 수학 계산에서 먼저 나타나는 법인데 나는 아직 그걸 못 느꼈어요. 매일 사무실에 나와 오전에는 수학을, 오후에는 인문과학 공부를 합니다."

―어떻게 이런 테마로 책을 집필하게 됐습니까?

"나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출생했어요. 해방이 돼서 돌아왔는데 6·25를 만난 겁니다. 전쟁통에서 '왜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몽골 침략,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같은 역사가 왜 한반도에서 되풀이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느니, 이성과 자유의 확장으로 간다느니 하는 마르크스나 헤겔로 대표되는 '결정론적' 역사관으로는 해결이 안 됐지요. 이 책의 집필에는 3년 걸렸지만, 그때부터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공부해온 거지요."

―선생님은 와세다대(大) 공대를 나와 미국에 유학 가서는 전공을 수학으로 바꿨지요. 말하자면 쭉 이과(理科)인데.

"수학자였기에 이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배운 미적분ㆍ방정식 같은 수학은 '결정론적' 수학이었지요. 이는 서울역을 출발하면 부산역에는 몇 시에 도착한다는 답이 나오는 것과 같지요. 초기 조건이 같으면 답도 같은 거죠. 하지만 20년 전쯤 '복잡계(複雜界)'의 수학이 나왔어요. 내가 국내에 처음 소개했습니다만, 일기예보를 떠올리면 됩니다. 날씨에는 여러 요소가 개입되기에 답이 딱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계' 수학까지 나오니, 이거 쉽지 않군요.

"'복잡계' 수학에는 '프랙털(fractal)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분의 구조가 전체의 구조와 똑같은 모양으로 반복되는 걸 말하지요?

"그렇지요. 여기서 저는 역사의 순환을 착안한 겁니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한반도에서 난리치는 양상이 되풀이되는 구도가 같지 않습니까. 오늘날 상황은 바로 구한말과 같지 않습니까. 한반도의 지정학과 민족의 집단 무의식(原形)에 의해 역사도 순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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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운 명예교수와 최보식 선임기자 사진

―반복되는 것처럼 비칠 뿐 사실은 다 다르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체험적으로 그런 반복성을 느꼈으니까요. 아놀드 토인비도 '동시성(同時性)의 역사'에 대해 말했지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영국과 독일이 맞붙은 1차 세계대전의 양상과 똑같다고 했지요."

―그렇게 대비시키면 안 같은 게 있을까요. 선생님은 한·일 갈등의 기원이 663년 신라ㆍ당 연합군과 백제ㆍ왜 연합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맞붙은 '백강전투'에 있다고 했더군요.

"당시 패배한 백제인 3만2000여명이 일본으로 이주해 일본의 지도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의 가슴에 간직된 '신라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는 적개심이 집단 무의식으로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죠. 반면 신라는 중국에 '사대외교'를 하면서 진취적인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때 민족의 원형이 바뀌게 된 거죠."

―참신한 착상이지만 글쎄요. 그런데 선생님은 '사대외교'를 부정적으로 보시는군요.

"물론 사대(事大)는 안보정책입니다만, 그때부터 상무(尙武) 기상을 잃고 동방예의지국이 된 거죠."

―이번 책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가 왜 우호적인지를 분석했더군요. 6·25에 참전해 통일의 기회를 앗아간 원수이지만, 맥아더 장군 동상을 헐어버리자는 운동은 있어도 중국을 비난하는 일은 없다며, 이게 우리의 원형에 남아있는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했지요?

"앞서 말한 '백강전투'에서 모든 게 비롯됐다고 보는 거죠. 이 사대주의를 언제 의식적으로 개혁ㆍ청산한 적이 없었지요."

―당시 사대(事大)를 안 했다면 중국 곁에서 한민족이 살아남았을까요?

"만약 '백강전투'가 없었고,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다면 어떠했을까요? 한민족은 보다 외향적인 민족이 됐을 겁니다."

―한민족의 정체성은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가 대당(對唐)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겁니다. 백제·고구려 유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삼한일통(三韓一統)'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거죠. 그전까지는 삼국 간에 같은 민족의 연대감이 없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없었으면 한민족이 없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백제와 신라는 거의 같은 언어로 살았으니 민족적 정서가 있었을 겁니다."

―이번 책에서 한국인은 일본인의 내면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는데, 어떤 점을 말하는 겁니까?

"일본은 화산열도입니다. 지진과 화산 등으로 대참사에 익숙합니다. 그럴 때마다 빨리 피해를 덮고 잊고 새로운 방향으로 갑니다. 지나간 과거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앗사리'한 것인데, 역사의식이 없는 거죠. 그런 일본 입장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은 이해할 수가 없죠."

―하지만 '피해자가 받아들일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본의 지식인들도 있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일본인들은 전쟁은 범죄 행위가 아니며 국가 생존의 수단이라고 믿는데,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일(對日) 외교를 과거사 문제로 일관해왔으니 한국 사람은 독특하지 않습니까."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이 독특한 게 아닌가요?

"역사를 쉽게 잊는 민족과 쉽게 못 잊는 민족, 피차 상대를 잘못 만난 거죠.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원점(原點)으로 돌아간 거죠. 원점에서는 늘 다시 시작되죠. 과거사에 대한 되풀이 사과 요구가 그런 거죠. 반면 일본은 사람이 죽으면 떠나간 것이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걸로 끝이라면, 왜 신사나 절에서 망자를 위해 추모하고 전범(戰犯) 신사 참배로 우리를 자극합니까?

"일본인들은 죽은 사람을 '호도께(ほとけ·부처)'라고 부릅니다. 전범도 도둑놈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호도께가 됩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두고 뭐라고 하면 '부처님한테 참배하는 게 뭐 나쁘냐'고 하죠. 웃기는 만화 같지만."

―일본인의 원형에는 '아마에(어리광)' 요소가 있다고 했더군요.

"강한 사람과 권력에 어리광을 부리는 거죠. 반면 한국은 권력에 대해 어리광이 없어요. 대신 동네방네 '뗑깡(생떼)'을 놓지요. 일본이 스스로 바뀌도록 이끌려면 우리의 국격과 품위를 올려야 합니다."

―전후(戰後) 배상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보원이은(報怨以恩ㆍ원한을 은혜로 보답)'이라며 일본에 전후배상금 명목으로 한푼도 받지 않았다지요?

"그렇게 인심은 얻고, 뒷날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받는 실리를 취했지요. 중국의 외교술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됩니다. 외교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국가 이익을 얻는 겁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까지 살았습니다. 무의식 속에 일본을 두둔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요?

"일본에서는 나를 '반일론자'로 봅니다. 20년 전 일본에서 '추(醜)한 한국인'이라는 책이 나온 적이 있었지요. 이에 맞서 내가 '추한 일본인'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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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나당연합군에 패한 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주성하 기자 , 허문명 기자 / 입력 2015-07-02 03:00:00 수정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백강(白江)전투

 

금강은 말없이… 탁 트인 금강(백강) 하구의 모습. 1300여 년 전 이곳에서는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 총 22만여 명이 맞붙은 대전인 ‘백강 전투’가 벌어졌다. 동아시아 최대 해전으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이 흘린 피로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을 정도였다고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다. 지원군으로 파병된 왜군 4만여 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이후 정권의 존립 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동아일보DB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데다 우리 역사교과서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전투를 그는 왜 이렇게까지 주목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백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신라는 당과 더욱 가까워지고 왜와는 멀어진다. 한반도와 왜는 각자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갖게 된다. 중국은 백강구(白江口), 일본은 백촌강(白村江)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백강 전투가 일어났던 1300여 년 전 한반도로 가 보자.


○ 백제의 항전(抗戰)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 혈맹이었던 백제와 왜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인들의 집단 이주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백강 전투 후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을 거의 잊었으나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멸망한 백제에 대한 한과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663년 일본서기는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끝났다. 고향땅 곰나루(웅진)에 있는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라는 비통한 글로 ‘백제의 한’을 기록하고 그 좌절감을 일본신국론으로 조작해 억지스러운 우월의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과 중국(신라와 당) 땅을 뺏어야 한다는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주변은 가을이 되면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주변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장소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신(新)한일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류성 ::

백제의 마지막 거점. 위치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만 충남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 전북 부안군 위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

블로그주인 덧붙임)

"왜倭"는 일본의 과거이름으로서 "빙 둘러 멀다."는 뜻과 "순하다."는 뜻의 긍정적 이름이었다.

그러나 피해의식과 분노로 가득한 우리민족은 왜를 矮, 키작고 조무래기라는 뜻의 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反日이 아니라 克日로 가야하는 성숙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