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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by 설렘심목 2015. 7. 7.

만동묘


만동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사당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해요.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뭘까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어필인 ‘만절필동’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라고 해요.

 

만동묘의 기원도 재미있습니다. 민정중(1628~1692)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의 네 글자를 얻어다가 송시열(1607~1689)에게 주면서 시작되었는데요. 송시열은 이 네 글자를 1674년(현종 15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여기에 운한각을 지었어요. 그런데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송시열은 이곳에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에게 유명으로 남겼고 이에 권상하는 1703년(숙종 29년) 민정중을 비롯하여 정호(1648~1736)‧이선직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726년(영조 2년) 민진원(1664~1736)이 묘를 중수하고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제전으로 사용할 관둔전과 노비를 주었다. 이어 조정에서는 1744년(영조 20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묘우를 중수하게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을 면세전으로 하여 제전에 쓰도록 했대요.


이렇듯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그러나 이후 유생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많은 폐단을 불러 일으켰어요. 결국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하죠. 그러나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1820~1898)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였는데, 이것은 명성황후(1851~1895) 일파가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고 하네요.

 


안타깝게도 만동묘는 일제 치하에 들어서면서 여러 수난을 당했습니다.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1839~1912) 등이 존화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답니다. 이어 1942년에는 만동묘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재는 괴산경찰서의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데에 사용되었다는 슬픈 얘기가 전해집니다.


이렇게 만동묘의 흔적은 사라졌으나, 1983년 홍수 때 만동묘의 내력을 기록한 만동묘정비가 발견됐어요. 그리하여 만동묘정비를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습니다.


만동묘는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배척하며 소중화 의식을 키웠던 조선 후기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유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