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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미래다] "북한식 '도이머이 정책(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 만들 수 있게 北 돕겠다"

by 설렘심목 2015. 4. 15.

[北 변화의 길] [5]

'도이머이' 입안자, 응우옌 득 끼언 베트남 前국회부의장


	응우옌 득 끼언 베트남 전 국회부의장
1986년 베트남식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Doi Moi)'를 최초 입안했던 응우옌 득 끼언(67·사진) 전 국회부의장은 "북한이 나름대로 개혁·개방을 결정하겠지만, 만약 북이 요구한다면 기꺼이 북한에 맞는 도이머이 정책을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했다.

응우옌 득 끼언 부의장은 지난달 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이 국제적 협력을 바탕으로 발전에 집중하고, 개혁·개방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크게 환영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집안에서 아무리 똑똑해봐야 소용없다'는 베트남 속담이 도이머이 정책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말"이라며 "도이머이 도입 초기 (자본주의 체제인) 협력 국가들과 정치적 성향이 달라 걱정이 많았지만, 당시 베트남 지도자들은 각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걸 인정했고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간다는 마음으로 정책을 밀고 나갔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위신과 신념이 없으면 가족의 존경을 얻을 수 없다'는 베트남 속담을 인용하면서 "무력이나 심리적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장기적 평화관계에 대한 신념을 주변국에 줘야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 핵무기를 우리는 반대한다"며 "1980년대까지 전쟁을 겪었던 우리는 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어느 국가보다 잘 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베트남 투자기획부 예산관리 위원회에서 도이머이 정책을 입안하고 베트남 사회에 이식했다. 현재 그는 베트남 개혁·개방 정책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법안 제정 심의 기구인 국회 입법제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한 채 경제 개방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국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과감하게 대외 개방을 했다. 이를 통해 미국·프랑스·중국 등과의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던 현실을 극복했다.

응우옌 득 끼언 부의장은 도이머이 정책이 성공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리더의 결단'을 꼽았다. 그는 "처음 도이머이 정책이 논의될 때 (현 상태의 유지를 원했던) 지도층과 (변화를 원했던) 국민의 관점은 달랐다"며 "하지만 지도층이 결단을 내려 국민의 요구에 맞춰 개혁·개방을 선택했고, 둘 사이의 오차를 수정해 나가며 정책을 진화시켜 나갔다"고 했다. 이를 통해 전(全)국민적 공감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변국과의 협력도 도이머이 정책이 성공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됐다. 그는 "우리는 평화·협력을 바탕으로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국가마다 다른 개혁·개방 모델의 장단점을 면밀히 연구해 취사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개혁에 성공하려면 자국의 현실을 냉철히 알아야 한다"며 "우리는 1980년대 성장의 한계가 왔음을 인정했고 주변 동맹국이 전혀 없는 현실도 직시했다"고 했다.

그는 다만 사회·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오는 급진적 개혁·개방 정책은 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 도이머이 정책 도입 당시 핵심은 경제, 그중에서도 농업 분야였다"며 "농업에서 시작한 경제 발전이 공업·금융·서비스업까지 확대됐다"고 했다. 그는 "한 번에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국가와 협의하며 정책을 확장시켜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확실한 것은 도이머이 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국민 생활수준이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도이머이 정책

'새롭게 한다' 또는 '쇄신'을 뜻하는 베트남어로, 1986년 12월 발표된 경제 우선의 개혁·개방 정책을 말한다.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각자 농지를 경작해 여분의 농산물을 팔 수 있도록 하는 농업개혁에서 시작됐다. 도이머이 정책 이후 외국 자본이 급속도로 유입돼 연평균 7.6% 고도성장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