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대인을 알아야 하나?
오늘날 전 세계 인구 69억명 중 유대인은 크게 잡아도 1700만명 정도이다. 이 얼마 되지 않은 숫자의 유대인이 미국과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말하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엄청난 과장이라는 반론(反論)도 있다. 때로는 유대인을 음해(陰害)하려는 불순한 의도 또는 반(反)유대주의로 몰아붙인다. 그렇지만 유대인의 국제적 영향력은 경이적이다. 특히 불과 650만명의 미국 유대사회가 미국,나아가서는 세계무대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공동체(共同體)로 성장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키 어려운 사실이다.
그들만이 특화(特化)할 수 있는 권력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즉, 경성(硬性)권력 중에는 경제력과 금융, 연성(軟性)권력 중에는 문화예술, 그리고 20세기 이후부터 특수권력으로 성장한 언론 등을 3개 축(軸)으로 하여 그들의 권력기반을 확대했다. 지리상 발견, 공산주의 창안, 시장경제와 세계화,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바꾼 수많은 발명과 발견 뒤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우리의 세계화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발(發) 금융위기, 유가(油價)폭등, 곡물파동, 외환(外換)시세의 변동, 국제신용평가, 중동(中東)의 전쟁위험, 이란 핵(核)문제 등 작금(昨今)의 국제적 관심사의 배경을 잘 살펴보면 유대인의 존재를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직간접으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는 유대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마르크스부터 스필버그까지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예언가 미셀 드 노스트라다무스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루흐 데 스피노자 ★국제금융의 시조(始祖)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의 태두(泰斗) 지그문트 프로이트 ★고전음악과 현대음악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 ★상대성원리를 내놓은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매독의 특효약인 살바르산을 추출한 파울 에를리히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요나스 살크 ★<심판> 등의 작품을 남긴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화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 와 오이겐 비그너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오늘날 세계금융을 지배하는 미국의 중앙은행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체제를 만든 파울 바르부르크 ★헨리 키신저 전 미(美)국무장관, ★언어학자이자 대표적 반(反)세계화 지식인 노엄 촘스키 ★자선가’와 ‘악덕투기꾼’이라는 상반된 평판을 갖고 있는 금융투자자 조지 소로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인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등.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 정부 내에서도 적지 않은 유대인이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 외교평의회(CFR•Council on Foreign Relations) 회원이기도 하다. 샐리 카첸(Sally Katzen)은 법률학자 겸 교수로 오바마의 법률고문을 지냈다. 연방대법관 9명 중 3명이 유대인
제임스 스타인버그(James Steinberg) 국무부 차관은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인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전략 전문가이다. 스타인버그도 CFR 회원이다. 국무부 기획운영담당 차관으로 있다가 각료급 요직인 연방예산실장을 맡은 제이컵 루(Jacob Lew)는클린턴 정부 시절에도 예산실장을 지낸 바 있는 인물이다.. 루의 전임자로 2009년부터 1년간 연방예산실장을 맡았던 피터 오르스작(Peter Orszack)도 오바마 정부 초기에 활동한 유대인 중 한 명이다. 닉슨-포드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 등을 지낸 그는 정부를 떠난 후에도 강연, 집필, 로비활동 등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견지하고 있다. 키신저와 리처드 펄
특히 키신저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결사체로 불리는 미국의 외교평의회(CFR), 유럽과 북미(北美)지역의 유력인사 모임인 빌더버그그룹(Bilderberg Group), 북미•유럽•아시아의 엘리트로 구성된 삼변회 등 3개 기구 모두 참여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국제판도의 큰 흐름을 주도적으로 기획•설계하는 국제엘리트의 수장 격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중앙은행 FRB는 초대(初代) 의장인 찰스 해믈린(Charles Hamlin)을 비롯해 역대 의장의 절반 가량이 유대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의장인 벤 버냉키, 그의 전임자로 18년간 FRB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도 유대인이다.
베어스턴스 시절 동료인 유대인 제롬 콜버그(Jerome Kohlberg) 등 3인 동업(同業)으로 자신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딴 KKR이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KKR은 경영상태가 어려운 기업을 헐값에 매입하여 자금을 투입해 회생시킨 후 높은 가격으로 다시 매각하는 M&A(인수합병)전문의 ‘기업사냥꾼’이다. 이들이 인수한 기업 중에는 미국의 유명한 과자업체 나비스코, 완구체인점 토이스러스, 건전지 제조사 듀라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크라비스는 록펠러 가문과도 절친한 사이다. 그는 외교평의회, 빌더버그, 삼변회 그리고 다보스포럼 등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인 지위를 높이고 있다.
전 세계 검색 사이트 중 랭킹 1위인 구글(Google)의 창업자는 유대인 청년 두 명이다. 구(舊)소련 태생인 세르게이 브린과 전자학도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25세이던 1998년 구글을 설립,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 제1의 인터넷 기업으로 키웠다. 장기적인 인맥관리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페이스북을 만들었는데,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확산됐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다른 유대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측과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유대인
바깥세상과는 오랫동안 담을 쌓고 지냈던 한국인은 유대인과 접촉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아마 근세 이후 한국과 최초로 인연을 맺은 유대인은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약 25년간 한국의 외국차관(借款) 도입 중개에 깊이 간여했다고 알려진 독일•스위스계 유대인 거상(巨商)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1921~1997년)일 것이다. 독일 뮌헨 태생인 그는 타고난 상재(商才)로 유럽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대형 사업을 벌여 거부가 됐다.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와도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월남패망 후 공산베트남에 억류됐던 이대용(李大鎔) 공사 석방을 위해 막후에서 활동했으며, 중국-이스라엘 간 관계개선 교섭에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랍비였던 차임 포톡(Chaim Potok)은 귀국 후 철학자이자 문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IMF사태와 유대자본
1997년 12월 한국은 혹독한 IMF 사태를 겪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아시아 외환(外換)위기 당시 “외환위기는 동남아를 위시한 신흥공업국 의 경제를 국제 유대자본에 예속시키려는 국제 유대자본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유대계 금융투자가인 소로스를 이 음모수행의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때문에 그는 반유대주의자 또는 인종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IMF가 내놓은 처방과는 정반대로 변동환율제를 고정환율제로 바꾸고 이를 밀고나가 성공을 거둠으로써IMF 방식만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님을 입증했다. 반대로 한국과 태국은 모두 IMF가 제시한 강압적이고 불평등한 처방을 전면수락하고 말았다. 이들은 일시에 투자자금을 모두 회수해서 다른 국제 투기시장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은 과거 1997년 IMF사태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인과 유대인의 공통점
지난날 필자가 미국서 근무할 때 우리 동포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받았다.“한국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은 것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미국에서 빨리 성공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이들의 말처럼 한국인과 유대인은 신기할 정도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과 유대인은 모두 평균적으로 머리가 좋고 영리하며 부지런하다.
머리와 직결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우리나 유대인 모두 광적인 교육열을 보인다. 20세기 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가난한 유대인이나, 우리나 모두 교육이라면 만사를 제쳐 놓고 최우선순위를 부여했다.
한국이나 유대인 모두 여성의 주도적인 역할이 매우 크다. 결혼 후에도 여자가 배우자의 성(姓)으로 바꾸지 않고 처녀 때의 성을 그대로 쓰는 민족은 한국인과 유대인밖에 없다. 또한 교육과 가정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여성인 점도 한국과 유대인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할 때 유대인 어머니나 할머니가 기준이지, 부계(父系)는 비중이 작다. 가령 유대인 어머니와 비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반면, 아버지만 유대인인 경우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조건부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한국인과 유대인 간에는 차이점도 적지 않다. 바로 시공(時空)개념의 차이이다. 아마도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인은 유독 공간에 집착한다. 우리는 토지와 집에 유난히 애착을 느낀다. 이는 민족주의적 배타성만 키우게 된다. 이런 정서는 국제무대로 뻗어 나가는 데 분명 장애가 된다. 유대인은 나라 없이 2000여년 간 세계를 떠돌다 보니 공간보다는 ‘시간’과 ‘기회’에 더욱 커다란 비중을 둔다. 유대인들에게는 국적(國籍)이 큰 의미가 없다. 유대인 중 이중 삼중 국적자가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대신 시간과 기회를 활용하는 데는 유대인을 따라갈 수 없다. 유대인이 개발한 시간차를 이용한 금융소득이나 재(財)테크,그리고 미국정착을 그들의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분투하여 오늘날 커다란 성취를 이룬 것 모두 유대인들의 시간과 기회를 극대화한 좋은 예이다. 교육에서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에서만 공통점이 있을 뿐 교육의 진정한 목표와 교육의 질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많은 인구 중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학교에 들어가고 직장에도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보다는 각종 시험을 통과해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변질되고 있다. 우리의 유교식 교육전통은 일방적인 지식의 주입에만 치우치고 지적호기심과 상상력을 허황한 것으로 규정해 왔다. 그렇다고 실용성을 중시한 것도 아니다. 이래서는 지식을 응용하여 실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만들기 어렵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같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을 교육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선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이해시킨다. 이 개념이 구체화되어야 새로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배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만나 무엇을 물어보면 이들 대부분은 즉답을 피하고 질문자에게 다른 각도에서 반문한다. 즉, 일문일답식이 아닌 토론이 양자 간 대화에도 적용된다. 이 토론은 교육방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교수의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지양(止揚)하고 학생 간 토론, 학생과 교수 간 토론 등으로 다양한 사고와 접근방법을 유도하여 각자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내게 한다. 바로 이 유대인의 창의력 교육이 인구에 비해 많은 노벨상 수상자와 국제적인 석학을 배출케 만든 원동력이다. 유대인, 기부문화 중시
셋째, 세계화의 경험이다. 한국인이 집단으로 해외에 나간것은 1960년대 브라질 등 남미 농업이민과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대규모 이민이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외국을 침략하거나 지배해 본 경험이 없어서 외국서 정착하여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선의의 모험정신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세계화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세계화가 체질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유대인은 논리적이고 이지적(理智的)인 데 반해 우리는 감성이 보다 앞선다는 점이다. 유럽으로 말하면 라틴계 민족이나 아일랜드인의 기질과 비슷하다. 한국인은 인정이 많은 반면 때로는 격정적이기도 하다. 즉, 우리에게는 ‘기분’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이 기분과 신바람이 과거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형 역동성(力動性)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우리는 논리적인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이론을 들먹이며 따지고 들면 편협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따라서 ‘기분’에 근거한 오판,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선이나 기부의 전통이 부족하다. 아마도 오랜 기간 어렵게 살다 보니 남에게 베푸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
(옮겨온 글) 무심천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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