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인간
어느 방송에서 김제동 님이
“요즘 사람 만나도 바랄 것도 없고, 결혼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여자가 오면 막지 않겠지만 잡지도 않겠다.
얼마 전부턴 사자 인형을 끌어안고 자고 있다.”라고 말하자,
게스트로 출현했던 어느 교수는 다짜고짜 "나는 지금 정신병원에 와 있는 것 같다"며
돌직구를 날리며 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사자 인형 말고 살아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는 그 이유로 "사자 인형은 안 죽는다. 살아 있는 것을 키워보셨냐?"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뭔지 아시느냐. 죽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조화를 사랑하지 않고 생화와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느냐. 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생화는 지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람은 죽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지극히 당연한 조언이었지만 새삼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모든 인간은 죽는다>가 다시 되새겨졌다.
한 왕자가 불로장생 약을 마신 후 죽지 않고 세상 모든 역사를 경험해보지만
그 사이에 사랑했던 여인과 자식까지 죽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함께 누릴 사람이 없음에 탄식하며
본인도 죽길 원하지만 죽을 수 없는 더 큰 고통 속에 갇혀 사는 그를 보면서
새삼 죽음도 축복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숙명 때문에 그만큼 삶이 가치가 있고
아울러 죽음을 무릅쓰고 행동할 때 더욱 값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통해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으며 자신도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에게 가치 있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되기에
다윗은 내 시간의 유한함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었다.
죽음이란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찾아오며 또한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세상 모든 협박의 근원이 되기에 아이든 노인이든 죽음 앞에선 노예보다 더 잘 복종하는
마법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린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매 순간 아름다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데
과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죽을 때 후회 하지 않고 절대자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른 이와 관계를 보면 행복이 보이고 죽음 이후의 길이 보인다. 페르시아에 이런 민담이 있다.
어떤 여행자가 어느 날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흙을 발견하고선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흙에서 어쩜 이리도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자,
놀랍게도 그 흙덩이가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장미꽃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만남이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향수가 나는 생이 될 수도 있고 악취를 풍기게 할 수도 있다.
행복은 만남에서 온다.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그 관계는 고스란히 절대자와의 관계로 이어지는데 그 비밀은 산상수훈에 나와 있다.
그의 절대적 교훈은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소금의 소중함과 빛의 필요성을 무엇으로 설명하리요.
아이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양수는 단물이 아니라 짠물이다.
형태가 사라지면서 짠 맛을 내며 나와 세상을 보호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어 주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간다면 언제 죽음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물론 죽음이다. 죽음은 악덕 사채업자처럼 온갖 핑계거리를 갖다 붙이면서 우리에게
안겨 준 크고 작은 불안과 두려움은 영원한 족쇄가 되어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비록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도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죽음의 노예가 되어 굴욕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미 금문교를 건설할 때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루에 몇 명씩 사고로 죽어가자
그들은 작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공회사는 궁여지책으로 다리 밑에 철 그물을 쳐놓았는데,
놀랍게도 그 일 이후엔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사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이었다.
인간은 이토록 연약한 존재다. 두려움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마다 대처 방법이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만남에 있을 것이다. 인생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자신과 동행하고 있다는
송백나무 같은 인생의 깊은 뿌리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마지막 그 날을 대비하며
여유를 갖고 자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생의 든든한 뿌리가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욕심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원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루하루 참되며 진지하게 보람된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죽음 앞에 선 인생이지만
가치 있는 생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불합리하게만 보이는 세상에서 감사보다는 원망하며 살아가기가 쉽다.
이상하게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빨리 가고 빨리 갔으면 하는 사람들은
큰소리치며 온갖 부귀를 누리기에 감사란 쉽지 않는 삶의 자세로 여겨진다.
적어도 내가 볼 때는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해도 평생 불평만 늘어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더욱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현진님의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에 보면,
‘뿔이 있는 소는 날카로운 이빨이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호랑이는 뿔이 없고,
날개 달린 새는 다리가 두 개뿐이며, 날 수 없는 고양이는 다리가 네 개다.
예쁜 꽃은 열매가 변변찮고, 열매가 귀한 것은 꽃이 별로다...’
세상은 공평하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있다. 아니 단점이 장점이 되고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세상이다. 고로 불평하면 자신만 손해만 볼 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뭔가가 부족하면 생활은 조금 불편할지 모르나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감사라는 삶의 태도에 있음을 수 없이 경험하였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은 감사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순간마다 감사의 조건을 찾으며 살아간다.
감사 속에 일하며 사명을 감당할 때 인생의 수많은 사랑의 열매가 죽음을 이기게 한다.
주여,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죽음은 순서 없이 조건 없이 홀연히 찾아오기에
제발 착하고 겸손하게 살게 하소서.
매 순간 남을 섬기며 감사하는 삶이 진정한 성공적인 삶이요, 의미 있는 삶임을
이 종이 날마다 경험케 하소서.
2014년 2월 12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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