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어머니께서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살기를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전상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아들 도마 올림 -
2월14일은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 선고를 받은 날입니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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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다. 왜 이날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게 되는가?
간악한 일제로부터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발렌타인데이를 이렇게 들뜨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일본 상인들이라는 사실,..
발렌타인데이는 270년 2월 14일에 순교한 로마의 성 발렌티누스 기념일에서 시작되었다.
발렌타인데이와 초콜릿을 연결시킨 나라는 일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58년 일본의 제과회사 모리나가에선 '2월 14일 하루만이라도 여성이 남자에게 자유로이
사랑을 고백하게하자'는 캠페인을 내놓으면서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라'는 말을 끼워 넣었다.
당시에는 크게 호응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인기를 끌게 되었고,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부 젊은이들을 들뜨게 만드는 축제(?)로 변모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겨우 6회 개정으로 이등박문을 응징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동지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에게도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안중근의사께서 갇히셨던 감방앞에 있는 설명문
안중근 의사 께서 갇히셨던 감옥의 창문
죄수들을 사형시켰던 교수대
( 당시 안중근 의사 께서도 이곳에서 돌아가신듯 ....)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약 2개월 후-
3월 26일 오전 9시께 안중근 의사는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형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을 묻는 검찰관에게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한뒤 '동양평화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순국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32살에 순국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호국의 영령이 되었으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였다.
안의사가 순국하기 1년전- 1909년 3월 5일경,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했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은 2월 14일,
이 뜻깊은 날, 대한민국이 일본 상인들의 간교한 상술이 원동력이 된 발렌타인데이로 들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맨 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 가묘(맨 왼쪽) /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독도(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거국적인 '독도(다케시마)의 날'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초콜릿 물결이 부끄럽지 않은가?
심지어 공공기관인 서울한강사업본부에서는 '발렌타인 콘서트'까지 연다니...한심, 또 한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