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들에 우거진 잡초가
아니었던가 Was I not a little blade of grass?,
Op.47-7, Op.47-7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국외 체제중에 작곡된 피아노 반주로 이루어진 성악곡 [7 곡의 로망스, Op.47]의 마지막 곡이다. 이듬해 유르겐손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알렉산드라 파나에바에게 헌정되었다. 제 7곡인 '나는 들에 우거진 잡초가 아니었던가?' 는 수리코프(Ivan Zakharievich Surikov,
1841~1881)의 시로, 늙어가는 아내들의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3절의 시에 거의 동일한 멜로디를 주고 있으며, 반주부를 변화시켜서 통작 작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는 들에 우거진 잡초가 아니었던가. 들판에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잡초와 같이 나는
잘리고, 햇빛에 말려져, 시들어 버렸다. 아 아, 나의 불행을 한탄한다! 운명를 알라! 나는 들판의 카리나가 아니었던가. 들판에
빨갛게 피고 지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카리나는 꺽여지고, 나는 다발로 묶여졌다. 아 아, 나의 불행을 한탄한다! 운명을 알랴!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었던가. 고향에서 꽃처럼 길러지지 않았던가. 마음까지도 빈곤해져, 백발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아내인
나. 아아, 내 불행을 한탄한다! 운명을 알라! |
Andante Cantabile 안단테
칸타빌레, Op.11
너무나도 유명한 차이코프스키의 현악사중주 제1번의
2악장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제 전해지는 현악사중주곡은 3개가 있으나 제1번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자주 연주되어지지는
않는다. 제1번도 전체가 뛰어난 작품이라기보다는 민요의 선율을 사용한 2악장의 '안단테 칸타빌레'만이 낯익은 곡으로서, 실제로 이 부분만이 주로
바이올린 독주등 여러 종류로 편곡되어 자주 연주되어지고 있다.
'안단테 카타빌레'의 주제는 러시아 민요에 의한 것으로, 이 민요는
차이코프스키가 1869년 여름, 우크라이나의 카멘카라고 하는 마을의 여동생 짐에 머무르는 동안 페치카를 만드는 장인이 노래하는 것을 옮긴것이라고
전해진다. '와냐는 긴 의자에 앉아서 컵에 럼주를 가득 채운다. 장이 채워지기도 전에 에카체리나를
연모한다.'라는 가사를 가진 선율로 애틋한 서정을 표현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를 예술적으로 처리하고 중간에 바그너풍의 장식
음형에 의한 상징적인 악절을 삽입하고 있다.
1876년 12월 영지 야스나야 폴라나에서 오랫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대문호 톨스토이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니콜라이 구빈스타인인은 특별히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 당시 '안단테 칸타빌레'가 연주되었을 때, 차이코프스키의 옆자리에 있던 톨스토이가 이 곡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유명한 일화 가 있는 곡으로, '차이코프스키는 그때만큼 작곡자로서 기쁨과 감동을
느낀적은 없을것이다.'라고 쓰고 있기도 한 러시아적인 우수가 가득한 곡이다.
이 곡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권유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자작 연주회를 기획하였는데, 관현악의 작품으로는 대공연장을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작은 공연장용으로 실내악을 새로이 만드는 것으로 하여, 1871년 2월 단기간에 작곡되었다. 초연은 러시아 음악협회
사중주단에 의해 1871년 3월 28일, 모스크바의 귀족회관 작은 공연장에서 이루어졌다. 출판은 유르겐손 출판사. 곡은 생물학자이며 낭만주의
문학에 조예가 깊어, 차이코프스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라진스키(Sergey Aleksandrovich Rachinsky)에게
헌정되었다.
카프리치오소 소품 Pezzo
Capriccioso(Morceau de Concert), Op.62,
Op.47
[카프리치오소 소품]이라는 번역명이 조금은 거부감을 주는 느낌도 있으나 '페초 카프리치오소'라는 원명은 '카프리치오풍의
단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바교적 단기간 내에 작곡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885년 1월 말, 그는 크린 시(모스크바 북서쪽 85KM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차이코프스키가 마지막을 보낸 도시)에
가까운 마이다보에 8년 만에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되어 그곳에서 살게된다. [만프레드 교향곡]도 이 곳에서 완성되었으며, 변함없이 빈번한 외국
여행 이외에는 거의 여기서 안정을 찾아 규칙적인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1887년 5월부터 8월에 걸쳐 그는 빈을 중심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는데, [카프리치오 소품]은 이 시기에 여행에서
귀국 후 씌여진 작품이다. 그의 친구의 한 사람으로 1873년 작곡한 피아노 곡 [6곡의 소품, Op.19]의 제1곡 '어젯밤의 몽상'을 헌정한
콘드라 체프(N. Condrat" yev. 1832~1887)가 병으로 생사를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을 하게 되는데, 병자의 옆에서
긴박하고 숨막히는 듯한 상황에서도 작곡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당시 첼리스트로서 활약하고 있던 브란두코프(A.A.Brandukov, 1859~1920)에 헌정되었다.그는 작곡에도
재능을 보이며 후에 지휘자로도 활약하며 1906년 모스크바 음악 애호회 음악연극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인재였다. 초연은 이 브란두코프에 의해
1889년 12월 7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쪘다. 출판은 1888년. 유르겐손 출판사.
Nocturne '야상곡' (6 Morceaaux),
Op.19-4
이 곡은 1873년 10월에 완성되어 1872년 유르겐손 출판사에서 출판된 [6 개의 소품 6 Morceaaux]의 제4곡 이다. [제1곡.
저녁때의 꿈 Reverie de soir], [제2곡. 유머러스한 스케르초
Scherzo humoresque],[제3곡. 알붐 블라트 Feuillet d'album], [제4곡. 녹턴 Nocturne], [제5곡.
카프리치오소 Capriccioso], [제6곡. 주제와 변주곡 Theme
original et variation]으로 구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