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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추억

청계천의 옛 모습들을 다시 본다

by 설렘심목 2013. 9. 30.

 

청계천의 옛 모습들을 다시 본다

 

위의 윗 사진은는 대한제국시기, 천변길에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양반 여인네들이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놓은 채 걷고 있다. 청계천 남쪽을 촬영한 듯 길가 벽에는 창이 보이지 않는다.

 

위의 아래사진은 1900년경으로 '京城名所' 사진엽서다. 종로방향에서 광통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광통교는 시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였다. 중앙에 광통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난간석이 잘 보인다.

 

1904년의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대한제국시기,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게에 무언가를 담고 가는 지게꾼이 보인다.


위의 윗 사진은 일제강점기로 수표교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수표교 남편에는 양 길가에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좌측 길모퉁이에 담배를 팔았던 연초煙草(タバコ)가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양옆에 약국과 중앙상회지점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탕반, 탁주, 소주 등을 한자와 한글로 쓴 술집 간판이 보인다.

 

위의 아래사진은 1950년대말~1960년대초의 어느 날 수표교를 찍은 사진이다. 수표교 난간 위의 사람은 사진소장자 본인이다.
사진 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청계천에는 지천들이 있다. 위의 윗 사진은대한제국시기로 삼청동천이다.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위의 아래 사진은 1927년, 금청교다.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광복과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잣집은

 

불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다.

 

큰 비가 쏟아지면 집을 떠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불어난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되어 청계천은 심한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청계천변 판자집 1965년

 

2층, 3층으로 얽혀 지어진 판자집들, 나무 기등위에 의지한 집들은 마치 곡예를 보는 듯하다.

 

 

위의 사진 2장은 일본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에 찍은 사진으로 청계천 판자집에사는 주민들의 일상풍경을 담았다.

 

1960년대말 찍은 사진으로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청계천 복개공사 중으로 판자집을 철거하고 있다.

 

1965년의 복개전 풍경이다.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 열 지어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서

뛰놀며 물놀이하던 아이들은 지친 듯 늘어놓은 콘크리트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고가도로건설모습, 일본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에 찍은 사진이다.

 

1967년의 청계고가도로건설, 거대한 교각들이 개발을 상징하듯 보인다.

 

1965년의 평화시장은 청계천이 오간수문까지 복개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이 시장은 196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적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그러나 또한 당시 노동자들의 한숨과 분노가 스며 있었으니 1970년 겨울,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곳도 이 시장 앞이었다.

 

1965년 복개된 후 청계천로를 찍은 사진. 중앙에 보이는 가두노점이 인상적이다.


1968년 세운상가. 종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세운상가.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최첨단 건물이었다.

1~4층은 상가로 하되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설정하고 대신 3층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건설하는 등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주상복합타운이었다. 이 세운상가는 국내 전자산업이 태동할 당시 전자부품이 집결되는 곳으로 70~80년대 청계천을 상징한다.

 

1967년 대한극장 앞

 

1973년에 발생한 청계천 판자촌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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