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뼈에 철심 박고 탈북자 구출에 목숨걸고 뛰는 목사
입력 : 2013.06.25 03:03
“돈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죠. 주어진 운명 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니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겁니다.”
유난히 파도가 거친 날이었습니다. 목선은 비틀대면서 나아갔는데 너무 느렸습니다. 남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금세 공해로 나올 텐데, 어쩌면 좋아요? 이번에 또 늦게 생겼네요.”
목선은 결국 공해로 가는데 실패했습니다. 어부들이 펼쳐놓은 그물에 스크류가 걸린 탓입니다.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배는 바다 위를 맴돕니다. 선장이 나섰습니다.
“안 되겠어요. 지금이라도 다른 배를 불러야겠어요. 그러려면 700만~900만원은 더 있어야 하는데. 어쩔까요?”
남자는 답답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습니다. “교회 전세금을 담보로 목선을 빌린 건데 어디서 돈을 또 빌려요. 가만있을 수도 없고 어떻하나?”
그는 하나 뿐인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다던 사람이, 다른 이를 위해 또 돈을 빌리고 있습니다. 배 위에서 송금 사실을 확인한 선장은 동료를 호출했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배를 갈아 탔습니다. 탈북자를 태우고 중국을 빠져나온 밀항선을 맞기 위해서입니다. 동행취재를 하던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무리하게 사람을 구하시는 게 아닌가요? 탈출방법도, 재원마련도.” 이 남자는 허허롭게 웃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밀항선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갈렙선교회의 김성은(49) 목사입니다.
탈북 인권운동가 만큼 평이 엇갈리는 사람들도 드뭅니다. 누구는 생명을 걸고 탈북자 인권을 지키는 영웅이라고 칭송하고, 다른 이들은 힘없는
탈북자를 이용하는 파렴치범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기획 탈북의 주범’이라고 욕하거나 언론의 관심을 끌려고 발버둥치는 ‘허풍장이’라고 탓하는 이도
많습니다.
목뼈에 철심 박은 목사님
김 목사를 처음 만난 곳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입니다. 그 시절, 저는 인신매매를 취재하기 위해 국경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중국내 어느 전도사가 그를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묻고 대답했습니다.
“기자님은 왜 이렇게 위험한 취재에 뛰어들었나요?”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기자가 된 건데요.”
“목사님은 왜 이렇게 힘든 북한 사역을 하시나요?”
“탈북자 사역을 하고 싶어서 목사가 된 겁니다.”
“이렇게 국경을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으세요? 목사님.”
“강 건너가 제 처가(妻家)에요. 위험할 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
가족인데요.”
그는 전북 군산 출신입니다. 처음부터 목사가 될 마음은 없었고 원래는 돈 잘 벌던 중소기업 사장이었습니다.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을 따라서 중국 옌지(延吉)와 단둥(丹東)으로 선교를 갔는데, 2000년 여름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생겼습니다.
“두만강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 구씩 굶어 죽은 시신이 떠내려왔어요. 강가에 서 있는데 어린 소년이 다가와 옷깃을 잡더군요. 아이가 ‘같은 동포끼리 같이 좀 삽시다’ 그러더군요. 허, 허.”
이른바 ‘꽃제비’를 만난 것이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북한 인권에 눈을 떴습니다. 마침 번창했던 중소기업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고 북한 선교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 않았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떠돌며 탈북자를 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남한에서 헌 옷을 모아 은신처에 숨어있는 탈북자에게 나눠주기 위해 옷가지 수백 벌을 담은 여행가방을 좌우로 목에 건 채 중국 땅을 헤맸는데, 수상하게 여긴 중국 공안(公安)이 따라붙으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사람이 숨어 지내면 제일 아쉬운 게 옷하고 음식이죠. 그걸 잃어버릴 순 없잖아요? 그래서 악착같이 목에 걸고 다녔죠.” 옷 가방을 나르다 생긴 목 디스크 수술로, 그의 목뼈엔 철심 여섯 개가 지금도 박혀있습니다.
아내를 만난 시기도 2000년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박 에스더, 북한 군인 출신입니다. “인민군 여자 중대장이었죠.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 달 동안 김일성 장군 동상을 지켰습니다.”
충성심이 허기까지 달래진 못했습니다. 식량부족으로 300만명이 아사(餓死)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난의 행군 시절, 과학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굶어 죽었습니다. 아내는 절망했고 1999년 국경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요. 배가 볼록하고 키가 작았죠. 남들은 볼품 없다고 했지만, 저는 좋았어요.”
천생연분이란 건 이런 걸까요? 남편은 아내를 조선족 여자로 위장시켰습니다. 사망한 조선족 여성의 신분증을 구해다 그녀의 사진을 붙여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남자와 여자는 국경을 넘었습니다. 여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둘은 부부가 됐습니다.
박 에스더는 남편을 따라 신학교에 갔고 2006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부부는 그 해에 천안 시내에 작은 탈북자 교회를 차렸습니다. 교인이 찾아와 1000만원을 내놨고, 건물 주인은 월세를 깎아줬습니다.
부부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차에 태워 서울 출입국관리소에 갑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탈북자 교인의 가족들을 불러오기 위한 서류 작성을 위해서죠. 남한 사정에 어두운 탈북자와 함께 은행, 병원, 관공서를 숱하게 다닙니다. 교회 운영비 대부분이 차량 휘발유 값으로 나갑니다.
교인(탈북자)들이 가난하기에 교회의 수입은 더 막막합니다. 호떡장수 교인이 보일러를 기증하고 선배 목사의 딸이 중고 피아노를 줬는데, 그마저 없었으면 교회 집기를 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김 목사 부부 사이에 2002년 태어난 첫 아이는 뇌성마비였습니다.
알뜰하게 보살폈지만 7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먹먹하게 말합니다. “우유를 먹여 놓고 후원자가 될 사람을 만나러 집을 나섰죠. 밤늦게 돌아왔는데 아이가 불덩이처럼 뜨겁더군요. 우유를 토한 것이 폐로 다시 들어가 숨을 쉬지 못한 게 원인이었어요.”
2009년엔 교회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건물 주인이 월세를 전세로 바꾸길 요청했는데, 목돈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중년 부부가 그를 찾은 건, 교회를 정리하기로 결심한 직후입니다.
“교회에 안타까운 소식 있다는 걸 신문에서 봤다고 하더군요. 독지가의 요청으로 대신 온 것이니 부담 갖지 말라면서 작은 봉투를 놓고 갔어요. 아무리 부탁해도 이름도, 연락처도 주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죠.”
봉투를 열어보니 6000만원 짜리 자기앞수표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짐했습니다. “그 분들의 귀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아내와 함께
더 열심히 탈북자들을 도울 거예요.”
문 닫을 위기를 넘긴 다음부터 북한과의 인연이 계속됐습니다. 탈북자 교인인 송성국, 김수련 부부와
밀항선을 타고 4명의 탈북자를 구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남한으로 오는 밀항선 탈출에 최초로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내부 정보를 빼낸 탈북자들의 발길은 천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 목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북한군 전자전(電子戰) 교범은 어느 탈북자에게 생활비 일부를 보태줬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누군가가 놓고 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교범에는 북한 장사정포의 갱도 진지를 비롯해 각종 갱도 진지 입구를 레이더나 적외선 탐지 수단으로부터 숨기기 위한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반전파(反電波), 반(反)적외선 흡수제를 바르도록 했는데, 전파 99.8%, 적외선 99.9%를 흡수할 수 있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국방부에 자료를 기증했습니다.
북한 인민보안성 내부 자료도 어느 탈북자가 그에게 준 것입니다. 민법과 형사소송법, 각종 판례가 담긴 자료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어느 노동자가 동료 노동자를 살해해 일부를 식용으로 먹고, 나머지를 양고기로 속여 시장에서 팔다 적발됐습니다. 막강한 호위국 신분을 사칭해 열 두 명의 여성을 농락한 경우도 있었고, 마약을 사용하다 적발된 경우는 부지기수였습니다. 횡령, 뇌물수수, 위조지폐 제작ㆍ유통 등 자본주의 뺨치는 범죄들은 수두룩합니다.
한류(韓流) 드라마가 담겨 있는 CD를 복사하다 단속에 걸렸다든가, 산에서 주운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듣고 내용을 전파하다가 적발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의 생모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는 내용도 포함됐지요. 그를 통해 북한의 마약, 위조지폐, 인육(人肉)사건이 거짓이 아니란 게 증명된 셈입니다. 이 자료들 역시 통일부에 기증했습니다.
꽃제비들 위한 유아원 설립이 꿈
김 목사는 북한 꽃제비를 위한 유아원을 천안에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여러 명의 북한 고아들을 구해서 남한으로 데려 오는 일을 계속 합니다.
“처음 북한 사역에 뛰어든 이유가 꽃제비입니다. 아이들은 북한에서조차 버려진 고아입니다. 그들은 중국과 북한 군인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나드는 경우가 잦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여기저기 쏘다니는 걸 군인들도 눈 감아주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남한에 데려와서 교육시키고 통일 대한민국의 일꾼으로 키우는 게 제 꿈입니다.”
-이제 유명해졌으니 비용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없겠네요?
“변한 건 없어요. 후원이 좀 늘었지만, 그만큼 돌봐야 하는 탈북자도 늘었거든요. 북한 정보를 주고 간 사람들도 뒤늦게 언론을 탔다는 사실에 놀라선 돈을 요구하러 다시 찾아오죠. 제가 신문과 방송에 나가니 큰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탓에 꽃제비 유아원을 건립하는 게 가능한 일일지, 스스로도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주 이상한 목사라고 손가락질 하죠?”
“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이상한 목사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념대로 살라고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잖아요?”
오늘도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국경에서는 여러 탈북 인권운동가들이 땀 흘리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살고 싶은’ 탈북자들을 위해서입니다. 혹자는 그들을 칭송하고, 혹자는 욕을 하고, 혹자는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목숨을 내놓고 사선(死線)을 뛰고 있는 그들에게 저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그래 주시면 좋겠습니다. 글 : 이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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