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에 부쳐 : 정신과 물질의 이중주 5월은 잔인한 달이다.
[5.16]과 [5.18]—두
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가치평가를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5.16]은 [헌정질서
중단](쿠데타)이고,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이고 평면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5.16] 안에는 깊은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 [5.16]에 대해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해석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에게 현대/현대성(modernity)이란 무엇인가?”
[현대성](modernity)이 핵심 문제가 되는 까닭은, [5.16]이, 단기적으로는
(경찰까지 시위를 벌일 지경에 이른) 사회혼란을 바로잡는 것이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과격한 근대화/현대화](radical
modernization)를
이룰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를 [조국근대화]란 슬로건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2013년, 선진국 문턱에 바짝 다가서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격한 근대화/현대화](radical
modernization)라는
당시의 문제의식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익을 대로 익은 [현대성](modernity)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현대의 문턱 바깥에서 현대를 갈망하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잠시 50여 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 보자.
[5.18]은 [민주 항쟁]이라는1. 까마득한 과거에 관한 스냅 샷
* 세계최빈국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필리핀과 태국을 부러워했다.
[5.16] 이전 국민소득은 연 60 달러 수준.
▲ 이 한 장의 사진이 당시 가난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속 우리들은 정말 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간직했다.
[물질과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다.
[5.16]이 일어난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 달러였다.
아프리카의 가나가 170 달러, 필리핀이 254 달러 였다.* 1차 산품 수출국
1962년 우리의 수출액은 5천만달러.
주요 수출품은 돼지고기, 토끼고기, 생선 말린 것, 조개 말린 것,텅스텐 광석, 철광석 등이었다. 눈썹, 가발, 봉제품은
꿈 속에서나 존재하는 첨단 산업이었다.
* 가장의 의무
도 시 서민층 가장의 의무는 집에 돌아갈 때,
겨드랑이에 6백그램짜리 쌀 봉지
(이 봉지는, 주로 미8군에서 흘러나온 잡지를 뜯어 붙여 만든 봉지였다!)를 끼고,
새끼줄을 관통시켜 손으로 들 수 있도록 해 놓은 구공탄을 양손에 하나씩두 장 들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 고단했던 그 시대를 상징하는 구공탄.
구공탄은 십구공탄의 줄임말. 19개의 구멍이 있는 연탄을 가리킨다.
한쪽 끝에 매듭을 지은 새끼줄을 가운데 구멍에 끼어 양 손에 들고 나르는게보통이었다.등지게를 이용해 한번에 16개씩 나르기도 했다.
사진 속 인물들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조선일보>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 똥퍼와 뽐뿌재래식 변소만 존재했다. 똥을 퍼서 나르는 똥지게군이 돌아다녔다.
손으로 작동하는 펌프(뽐뿌)가 달린 우물을 가진 집은 물을 팔았다.
집집마다 물지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 종로구 효자동 <참여연대> 1층 주차장 구석에는,
지금도 그 시절에 물 장사를 하던
뽐뿌가 남아있다.
<참여연대> 사람들은 이 뽐뿌의 내력을 알지 못 할 것이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렇게 함부로 대한민국 시스템을 난도질하듯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뽐뿌질 체험은 신나는 한 편의 놀이감이다.ⓒ
* 빈농 집안의 소녀
수 많은 빈농 집안의 소녀들이 집을 떠나 상경했다.
김지하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구절
“애비야, 나는 몸 팔러 서울로 간다” 그대로다.
식구 수를 덜기 위해 무작정 상경할 수 밖에 없었다.
취직할 곳이 없어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다.
* 사과궤짝, 루핑, 가마니
당시 사과는 얇은 송판으로 만든 궤짝에 담아 팔았다.
이 궤짝은 옷과 세간살이를 담는
가구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해체해서 얻어진 송판은 [판자집]의 재료였다.
(베니어판, MDF는 존재하지 않았다)
판자집의 지붕에는
루핑(roofing)을 덮었다.
지금 같은 루핑이 아니다.
*시멘트 포장지(이것이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질긴 소재였다)에 콜타르(역청)를 두껍게 발라서
방수기능을 하도록 만든 허접한 재활용품이 루핑이었다.
*루핑은 돌맹이나 벽돌 조가리를
얹어서 눌러 놓곤 했다.
가마니를
길게 튿어 늘어뜨린 것이 대문이었다.
▲ 우리는 대소변을 편하게 싸고 싶고,
매일 깨끗이 씼고 싶고, 편안하게 자고 싶었다.
1960년대 당시 청계천변 판자집은 그런 우리의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 아이들과 점심
한 반에 90명. 한 학년에 24반.
한 학년이 2천명 짜리인 초등학교들이 수두룩했다.
교실이 부족해서 3부제 수업을 했다. 아이들 중 1/3쯤은 점심을 굶었다.
미국 원조물품으로 들어온
탈지분유(우유에서 버터를 걷어내고
남은 액체로 만든 분유)와 옥수수가루를 먹었다.
* 아이들의 놀이
잔인한 놀이가 많았다.
개를 몽둥이로 패서 그슬린 다음에 배를 갈라
그 생간을 맛있게 먹는 어른들을 구경하거나,
벌레를 잡아 다리를 뜯어내어 죽였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엄청나게
아름다운,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지천으로 널렸지만,
벗어날 교통수단도 없었고, 벗어나서 먹고 놀 음식도
없었다.
2, 욕망의 해방
[현대성](modernity, 근대성)은 물질의 해방이요 욕망의 해방이다.
심지어 섹스조차 임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위로 [해방]되었다.
“임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섹스하고 싶다”,
“배불리 먹고 싶다”,
“대소변을 편하게 싸고 싶다”,
“매일 깨끗이 씻고 싶다”,
“편안하게 자고 싶다”,
“깔끔하게 입고 싶다”라는 식의,
물질에 관한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성의 본질이다.
박정희는 이 욕망을 “잘 살아 보세”라는
다섯 글자로 응축해서 슬로건으로 삼았다.
▲ 우리는 그 당시 정말 배가 고팠다.
무엇이든지 배불리 먹고 싶었다.
배 곪는 아픔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60년대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구호식량 전달식 장면.현대성](modernity, 근대성)이 [욕망의 해방]이라면,
박정희로 상징되는 [5.16]은 [해방의 욕망]이다.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리더십을 통하여,[급진적이고 과격한 현대화]
(radical modernization under efficient and effective state leadership)를
이루겠다는 욕망이 곧 [5.16] 정신이다.
배고픔으로 상징되는 욕망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게 그의 야심이다.ⓒ
[조국 근대화], [잘 살아 보세]는 위대한 포퓰리즘 슬로건이다.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이며,
이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렇다. 포퓰리즘이라고 모두 나쁜 것이 아니다.
혁신을 통해 실현하면 위대해 진다.
빌 게이츠가 위대한 까닭은,
(은행,
보험회사, 관공서에서만 쓰여 왔던) 컴퓨터에 관해
“집집마다 컴퓨터를!”
(A Computer in Every Home)이라는 포퓰리즘 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초고속인터넷 접속망(유선)이 위대한
것은,
“모든 정보를 당신 손가락 위에”(Information on your finger tips)라는
포퓰리즘 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유비쿼터스가 위대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기기에서나 뉴미디어 소통을!
”(New media communication anytime, anywhere, any-media)이라는
포퓰리즘 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1947년 헨리 포드가 숨졌을 때, (나중에 경영학의 아버지가 된)
피터 드러커(P. Drucker)는
긴 조사를 썼다.
그 조사의
제목은 “위대한
포퓰리스트”였다.
헨리 포드는 두 가지 포퓰리즘 꿈을
제시했다.
하나는 “집집마다 자동차를 가질 수 있게 하겠다”였고,
다른
하나는 “생산성을 높여 임금을 상승시키겠다”였다.
포드의 이 꿈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포퓰리즘이며,
기술혁신을 통해 실현했기에 위대하다.
그래서 포드는 [위대한 포퓰리스트]였다.
3. 정신과 물질의 이상
[5.16]의 리더 박정희 역시 [위대한 포퓰리스트]이다.
동시에 그는 매우 짖궂은 사람이다. 왜?
[물질에관한 욕망]을 해방시킨 사람이었지만,
[물질에 관한 정신]을 정립시키지 않은 채
후대의 몫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은 흔히 정신을 [물질의
작용]으로 해석한다.
현대과학 일부의 이 같은
경향은
[물질을 숭배하는 물질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 이전에 정신이 존재하며, 물질 이후에도 정신이 존재한다.
이때 정신은 [넋과 얼]을 뜻한다.[넋] 은 [개체화된 얼]이며,
[얼]은 [네트워크로 엮인 넋]이다.
원효의 표현을 빌자면, [얼]은 [거대한 영혼의 바다](一心之海) 이다.
전세계에서 [네트워크로 엮인 넋들]을
뜻하는
[얼]이라는 단어를 가진 경우는,
아마도 우리 말 뿐일 것이다.
그것도 단순 명확한 한 음절 단어이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융 심리학에 이르러서야,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는 먹물스럽기 짝이 없는,
일곱 음절 단어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신은 물질화되어야 한다.
정신은 물질을 통해, 욕망을 통해
자신을 확장한다.
굶어 죽고,
몸을 팔아 밥을 빌어먹고,
돼지 우리 같은 움막에서 3대가 함께
뒹구는 환경에서는,
아주, 아주 예외적인 성인이
아니라면,
[정신]이 무엇인지,
이성(理性)이 무엇인지,
그 경지를 상상하지조차 못 하고 쌀 한 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다 숨지기 일쑤이다.
대중적 차원에서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정신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이때에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얼]을
대면하는 [참된 개인]이 될 수 있다.
한편, 물질은 정신화되어야 한다.
물질은 극에 이르러 [가상화](virtualize)될 때에 정신에 순종한다.
이제 근대의 물질 문명은 [가상화]로 치닫고 있다.
예를 들어,은행과 은행 사이에서는 돈 뭉치와
금괴가 운반되는 대신에
디지털 신호만 오가고 있다.
싸이는 음반 판매나
음악회가 아니라
디지털 음원 판매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다.
이 같은 [가상화] 경향이 극에 이르면,
결국 머지않아 [창의성](creativity)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 온다.
[창의성]은
[해석]과 [상징]의 문제이다.
삶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해서,
새로운 [상징 조합]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창조]이다.
[5.16]을 주도한 박정희는 [정신의
물질화]를 이룬 사람이다.
우리 겨레에 깃들어 있던 [정신-갈망-욕망의
거대한 물고]를 터뜨려
[근대화](물질의 풍요)를 이끌어낸
사람이다.
박정희 이후
이루어진 물질적 풍요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그런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신적-인적-정서적
에너지]가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했었다.
박정희의 위대함은 [정신적 에너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신적 에너지](욕망의 에너지)를
식별해 내어서,
그 물고를 터뜨려서,
조직화해 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정신을 물질로 바꾸는
프로세스]—근대화—를
설계하고 주도한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물질의 정신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이 작업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1979년 [박정희의 시대]가 끝난 후
34년째
[박정희 그림자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시절은 [박정희 사람의 시대]였다.
김영삼-김대중 시절은 [박정희로부터 과외받은 사람들의
시대]였다.
노무현
시절은 [박정희에게 막무가내 반항했던 사람들의 시대]였다.
이명박 시절은 [박정희 고속성장에 대한 향수에서 시작된 시대]였다.
지금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에서 시작]되었다.그렇다.
* 우남 이승만이,
1898년에서 1960년까지 63년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듯이,
* 박정희는, 1961년에서 52년째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까지 계산한다면,
무려 57년 세월이다.
둘을 합치면 정확하게 120년, 꼭 2갑자의
세월이다.
박정희가 이룬 [정신의
물질화]에 대별되는,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물질의 정신화]란 무엇인가?
사회의 차원에서는,
이 농숙한 현대문명 사회의 척추가 될 수 있는 가치와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
한편,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 도덕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문명을 헤쳐갈 수 있는
[개인의 미덕 individual’s virtue]을 튼실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가치-원칙-미덕]이다. 박정희가 물고를 튼
덕분에 만들어진,
이 농숙한 현대문명을 [사회의 차원]에서 감당하기
위해서는,
[가치와 원칙]이 확립되어야 하고,
[개인의 차원]에서 해쳐가기 위해서는,
[미덕]이 있어야 한다.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사나운 민족주의
경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1880년대에,
니체(F. Nietzsche)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천 개의
민족이 내세우는 천 개의
가치관을 억제시키기 위해
천 개의 민족 목에 걸어 비끌어 맬 밧줄만으로는 부족해.턱도 없이 부족해.
민족이 아닌, 인류를 위한 가치관은
어디있지?”
그런데 가끔 [민족의 가치관](국민의 가치관,
한 사회의 가치, 원칙 체계,
또한 개인의 미덕 체계)이 곧 [인류의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그 민족(국민)을 [운명의 민족]이라 부른다.
원래 이름은 [성배(聖杯)의 민족](People of Holy Grail)이지만,
나는 교회-성당-절에 다니지
않기에 [운명의
민족]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 민족이 사는 땅이 [운명의 땅]이다. 한반도는 [운명의 땅]이다.
남쪽에서는
[물질문명], 즉 [현대성의 풍요]가 극에 달했고,
북쪽에서는 [전체주의], 즉 [현대성의 발작]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
[전체주의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치-원칙-미덕에 관한 [거대한 각성]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각성]은 작게는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지만,
크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의 민족]이며, 이 땅은 [운명의 땅]이다.
[현대성](근대성,
modernity)은 [물질적 욕망의 해방]이다.
슬기로운 경로를 택하면,
[자유민주주의]와 [세계시장]을 활용하여
물질적 풍요에 도달할 수 있다.
우남 이승만은 이 경로를 일찌감치 파악해서,
1904년에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이라는
명저에서 이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사악한 경로를 택하면, 전체주의로 전락한다.
전체주의는, “계급 폭력혁명과 계급 독재를 통해,
지금 당장 한
방에,
물질적 욕망이 충족되는 천국을 만들
수 있다”라는 믿음이다.
그렇다. 전체주의는, [폭력혁명과 독재를 통한, 욕망의 천국,
욕망의 해방을
약속]하는,
현대 정치사상(혹은 정치종교)이다.
물질에 관한 욕망은 오직
[기술혁신-시장, 그리고 효율적/효과적 정부역할]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는 [피바다]를 통해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악한 경로]라고 불렀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욕망의 천국] 대신에, [
욕망의 지옥]([욕망]이라는 깃발아래 만들어진 지옥)이 생겨난다.
[욕망의 해방](욕망이 충족되는 것)
대신에, [죽음의 해방]
(죽음을 통해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일어난다.
이 셋의 잡탕
짬뽕이 김일성 전체주의 사교집단이다.ⓒ
지금 전세계에서 전체주의 통제사회는
북한 하나 밖에 없다.
또한 북한 전체주의는 지금껏 존재해 온
모든 전체주의 체제의 온갖 사악함의
종합판이다.
북한
체제에는
[스탈린체제]-[모택동체제]-
[천황체제](Mikadoism)의 사악-잔혹의
정수(精髓)가 모두 모여 있다.
김일성을 민족의 구원자-인류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사교(邪敎) 전체주의로 완성되었다.
▲ 방부제 속에 누워 영생을 꿈꾸는 김일성.
수백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그가 [급진좌파]이고 [진보]라고?
흉측한 [전체주의 사교] 집단의 교주에 불과할 뿐이다.
▲ 지 애비처럼 방부처리 되어 영생을 꿈꾸는 잔인한 도살자 김정일.
그가 [급진 좌파] 혹은 [진보]? [전체주의 사교] 집단의 교주 계승자에 불과하다.한반도, 남쪽은 자유민주주의와 개방원칙을 지켜내어
[현대성](modernity)의 풍요에 도달했고,
북쪽은 전체주의로 전락해서 [현대성]이 만들어낸 인간지옥으로 변질했다.
휴전선을 가운데에 놓고 [현대성]의 두 얼굴이 극과 극으로 나타난 것이다.
▲ 한반도에서 극과 극으로 나타난 [현대성]의 두 얼굴.
이를 상징하는 듯한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
충북 청원군의 고려대기환경연구소는 2000년 5월(왼쪽)과올해(흑백 사본)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을 2006년 10월 16일 공개했다. 정 소장은 이를 비교,
대도시를 중심으로 남한의 경우 6년 사이 불빛 규모가
더 커지고 밝아졌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별 차이가 없는 가운데 평양 등 일부에서만 약한 빛이 보인다.
*북한 전체주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현대성]을 마스터하고 뛰어넘어야 하며,
반드시 뛰어 넘게 된다.
[현대성] 안에 갇히면, [현대성]이 만들어낸
극악한 또 다른 얼굴,
북한 전체주의가 남긴 독기(毒氣)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성을 마스터하고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의 정신화]이다. [현대성]이 만들어낸 물질문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사회적 차원의 가치와 원칙, 그리고 개인적 차원의 미덕을 뜻한다.
우리 민족은 이 거대한 진화를 밟아나가지 못하면, 혼란 속에 쇠락한다.
쇠락할 것인가?
혹은 각성/진화할 것인가?
이 저울 위에 우리는 올라서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의
민족]이다.
[5.16] 과 박정희는,
그의 죽음이 33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저울대에 올려,
[운명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땅을 [운명의 땅]으로
만들었다.
1898년 우남이 주장하기 시작한
[현대적 국민국가]가,
1948년
우남의 지도력 아래 한반도의 남쪽에서 구현되었다.
그 후 12년에 걸쳐 무서운 남침을 이겨내며 간신히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부터 시작된 [박정희의 시대]와, 1980년부터 시작된
[박정희 그림자의 시대]가,
마침내 이 [위대한 저울], 이 [위대한 심판의 순간]을 완성했다.
이 저울은 우리 귀에 대고 이렇게 천둥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너의 정신과 영혼은 몇 근이나
나가? 이 풍요한 물질문명을 감당할 수
있어?
북쪽 전체주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반쪽을 재활시킬 수 있어?”
5. 사카모토 료오마와 자기 해체
“[5.16]은 오케. [10월 유신]은 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이다.
[10월 유신]은 [5.16]의 결과물 혹은 전개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박정희가 [유신]이라고 했을 때,
무엇을 뜻했는지 생각해 보자.
“자유민주주의의 원칙들에 의해 제한을 덜
받는
국가체제가 주도하는 과격한 근대화”이다.
한마디로, [5.16]에서 “자유민주주의 형식”을 벗어 던지는 한편,
국가 주도성을 더 강화한 체제가 유신이다.
박정희는 여기에 왜 [유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메이지 유신을 정신적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
메이지유신=
1867년 도쿠가와 막부체제의 종언에서 1889년 일본 제국헌법 제정까지,
약
20년에 걸친 숨가쁜 근대화 개혁.
메이지 유신의 아이콘은 사카모토
료오마(1836~1867)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었을 뿐 아니라,
메이지 체제의 근본 골격을 잡은 개혁 정치인이다.
도쿠가와 막부체제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1867년 12월에
암살당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오마를 깊게 존경한다.
우리에 비유하자면,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결합한 정도의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를 완성시킨 체제를
만들어냈다.
박정희는,
첫째, 국내외의 상황이 심각한 위기이기 때문에,
둘째,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제약을 제거하고
국가 비상동원체제를 강화해야 하기
때문에,
셋째, [5.16]으로 시작한 조국근대화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신을
[저질렀다].따라서 유신을 입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파괴]라는 법률적 측면 뿐 아니라,
위 세가지 사고방식의 근거를 살펴 봐야만 한다.
첫째,
국내외의 상황이 심각한 위기였나?
그렇다.
이미
1970년이 되면 월남전에서의 패배가 굳어졌다.
1971년에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급속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 수위는 점차
높아져갔다.
경공업 위주의 수출
전략은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특히 월남전 군비 지출 때문에,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인플레와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에 빠지자,
한국 경제는 1972년부터 빈사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둘째,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노선의 지속에
대해,
1971년,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심각한 장애로 작동했나?
그렇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불과 백만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여당인 공화당 실세들은 박정희에 대한 반대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이는 유신 직전에 항명파동으로 터져나왔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치 지형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국가 비상동원체제]를 선택했다.
셋째,
유신 체제 7년(1972년~
1979년) 사이에,
과연 [국가가 주도하는 과격한 현대화/근대화]가 가속되었나?
그렇다. 해외 건설 진출-기계-조선-자동차-제철-반도체 등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핵심 산업들이 이 시기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제조업을 갖춘 선진국 경제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차]를
올라탄 나라가 된 것은,
유신 시대에 이루어진 변화 덕분이다.
또한 이 시기에 근로자 임금이 연 13%씩 올랐으며,
공장 혹은 공단에 [야간 중고등학교]가 만들어져서,
많은 근로자들이 [고급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5.16] 이후(특히 1963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 이후),
[국가가 주도하는 과격한
근대화/현대화]를 일관되게
택해왔기 때문에,
박정희의
관점에서는,
이 노선을 1970년대 초에 중간에서 그만 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국내외의 안보와 경제는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부르짖으면서,
유신을 [저질렀던] 것이다.
비극은 두 개의 소중한 것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과격한 근대화/현대화]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도 소중하고, 《[자유민주주의]도 소중》한 상황이었다.
이 두 개의 소중한 원칙이 서로 충돌했다는 점이
바로 유신 시대의 비극성이다.
이 비극성에 대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대선에서 50대의 90%가
투표장에 나와서,
이 중의 절대
다수가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50대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80년대 초반
신군부체제에 대한 항쟁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세대이다.
대선 때 이들이 보인
투표 행태는,
이들이 유신체제의 비극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한 일이
아닐까?
나아가, 유신을 포함한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에 대해,
[예스](Yes)라고
선언했음을 증명한 일이 아닐까?
유신이라 불리는 비상동원체제는
[비상]한 상황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비상한] 상황은 장기화될 수 없다.
시간을 끌수록 그 피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1979년 초가 되자 사회 전반에 걸쳐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울대에서는,
1979년 9월초부터
[주동자 없는 자연발생적 시위]가 거의 매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치시스템-권력시스템은 한번 비상동원체제로 들어서면,
다시 원상 회복 되기 어렵다.
파국이 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강화할 뿐이다.
박정희 역시 이 같은 [파국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에 관해서
박정희는 최후의 순간에 위대한 선택을 했다.
1979년 초에 [비상동원 체제]를 해체하고,
시장 자율 체제로 거대한 선회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
이 방안은 바로 박정희의 아이들—박정희가 키워낸
경제관료들에 의해 기획되었다.
경제기획원의 강경식-김재익 같은
인물들이다.
박정희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외환 거래를 자율화시키고 균형예산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시장에 대한 정부 간섭을 줄이고, 자율 조절기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를 당시에는 [안정화 정책]이라고 불렀다.
전두환은 이 정책을 승계해서 밀고 나감으로써,
80년대 중반에 한국 경제가 높게 이륙하도록 만들었다.
박정희가 1979년 초에 시장 자율 정책을 선택한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위대하다.
하나는, 자기자신이 만든 [비상동원체제](유신)의
경제적 주춧돌을 스스로 제거한 것이다.
둘은, 시장 자율 정책에 의해 한국경제의 고도화를 위한 기틀이 확보되었다.
경제구조의 고도화는,
시장의 발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정희는 1979년 초에,(경제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자신을 해체한 것이다.
[자기부정]과 [자기해체]는 위대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내야 하는 과제 역시,
일종의 [자기부정-자기해체]이다.
박정희가 물꼬를 튼 [현대성](조국근대화)은 물질의 해방
-욕망의 해방을 가져왔다.
[정신의 물질화]가 일어났다.
눈이 어지럽도록 현란한 물질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는 [물질적 존재]가
되었다.
[현대적 존재](modern being)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역시 [자기부정]과
[자기해체}를 시작해야 한다.
물질주의를 뛰어넘는 가치와 원칙을 사회에 세워야 한다.
물질주의를 뛰어넘는
[나만의 미덕체계—유니크한 개인의 미덕
(the virtue of an
unique individual)을 세워야 한다.
이는 물질주의를 뛰어 넘는 물질적 존재—
물질주의를 뛰어 넘는 현대적
존재(modern being)를 뜻한다.
위대한 [자기부정]이며 [자기해체]이다.
이 같은
[자기부정]-[자기해체]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현대성의 극악한 질병인 전체주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반쪽을 아울러서, 오롯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정희를 미워하는 자는 미움 때문이라도
그가 물고를 튼 [현대성]을 뛰어
넘어야 하고,
박정희를 존경하는
자는 존경 때문이라도 그가 물고를 튼 [현대성]을 딛고,
[물질의 정신화]를 이뤄야 한다.
여기서 출발하든 저기서 출발하든 길은 하나다.
박정희, 그는 엄청나게 짖궂은 거인이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딛고 넘어가!
내가 물고를 튼 욕망과 물질을 딛고
내달려 봐! 평양까지, 신의주까지,
회령까지, [유니크한 개인들의 세계]를 만들어 봐!
이 물질과 풍요를 딛고서 만들어 봐!”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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