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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증후군의 기원 - 미래한국제공

by 설렘심목 2013. 1. 19.

▲ 전대협 출신들이 국회, 청와대, 정부 등 정치권 전반에 걸쳐 포진하며 최대 세력으로 부상하고있다. 사진은 1989년 7월 10일 당시 전대협 학생들이 서울 한양대에서 평양축전 참가를 주장하며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 조선일보 기사 화면 캡쳐


가히 질풍노도였다. 1980년대 얘기다. 민주화투쟁이 대학가 전역을 휩쓸었다. 이른바 운동권에 굳이 소속돼 있지 않았어도 대부분이 시위에 나서던 그런 시절이었다.

1987년 6월의 대규모 민주화투쟁에 이은 직선제 개헌쟁취는 그 덕분이기도 했다. 당시를 주도했던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 세대를 칭해 이른바 386세대라 했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였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 진출을 시작해 30대가 됐을 당시, 때 맞춰 나온 386 PC에 비유해 그렇게 칭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세대는 PC가 그랬듯이 어느덧 486이 되고 더러는 이제 586이다. 그런데 사람과 컴퓨터는 역시 좀 다른 것인가?

PC는 그렇게 업그레이드되면서 예전과는 비할 수 없는 첨단장비가 됐지만 이들 세대가 그만큼 진화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이들이 20대 시절인 1980년대에 의식이 멈춰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86으로 퇴행했다고나 할까?

386세대는 ‘4.19 이후 처음으로 정치적 승리를 이룩한 세대’라 일컬어졌다.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까지 성공적으로 이룩했다”라는 공식적인 평가의 갈채 속에서 그 같은 세대 정체감을 내면화시켰다.

‘민주화 유공세대’라는 자긍에는 아무도 의문부호를 달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그랬고 다른 세대도 그렇게 인정했다. 그런데 그 강렬한 자긍이 이들 세대를 당시의 기억에 강력하게 붙들어 맸다.

양반사림의 후예들

지금 우리 사회는 대중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폭주하는 상황이 쉴 새 없이 빚어진다. 그래도 386에겐 ‘민주’라는 단어는 여전히 신성한 주문이다. 무절제한 난장(亂場)이 끊임없이 빈발해도 이를 너그럽게만 보아 넘기려 한다. ‘스크럼과 외침의 광장’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자긍의 기억이 초래한 답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좌익적 경향에 대한 이완이다. 386세대는 좌익사조의 대중적 세례를 받은 첫 세대다. 1980년대 386세대의 정치투쟁은 그냥 민주화투쟁이 아니었다.

이면에는 좌익운동의 본격적인 대중적 확산이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운동권’이란 사실상 ‘좌익운동권’이었다. 모두가 마르크스와 레닌을 열렬히 학습했다. ‘비밀 서클’에 소속돼 있지 않아도 공식적인 과 학회에서, 각종 합법적 서클에서 너도나도 좌익사상을 학습했다. 그런데 여기에만 그치지 않아 더 심각한 게 더해졌다. 김일성 주체사상이다.

주사파의 등장은 운동권 내부의 노선투쟁이 계기였다. 1984~1985년 서울대 운동권 내부의 MT(민투)와 MC(Main Current 주류) 간의 치열한 노선투쟁에서 상대적으로 밀린 MC측이 반제투쟁론(AI론)을 들고 나왔다.

보다 더 강도 높은 깃발로 경쟁노선을 제압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친북에 주체사상을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주장이 등장했다. 김영환의 <강철서신>이었다. ‘더 과격한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되는’ 모든 급진운동의 일반법칙이 예외 없이 관철되어 갔다. 1986년 주사파가 학생운동권을 거의 석권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전역을 강타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전대협이 결성됐다. 주사파의 헤게모니 아래였다. 비주사파도 있기는 했다. 이른바 PD(민중민주주의)계열이 그것이었다.

1987년, 표면에선 민주화투쟁의 승리, 직선제개헌, 대통령선거가 차례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이면, 운동권에는 NL주사파와 PD파가 정립해 있었다. 모두 적색! 순수한 민주세력? 운동권에는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세대 전체가 운동권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광범한 참여만큼이나 ‘감염’의 범위도 넓었다. 동조자 의식, 더러는 부채의식이라는 형태의 감염 ‘흔적’이 남았다. 일종의 ‘보균’이었다. 세월이 지나 청년학생 시절을 뒤로 하면서 대개는 생활에 적응해갔지만 계기만 주어지면 ‘흔적’이 나타났다.

전교조가 확산되고 도처에서 전투적 노조가 급성장할 때도 이를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좋은 일로 보기까지 했다. 학계에 자리 잡은 이들이 강단을 붉게 물들여도 학문과 사상의 자유로 보았다. 언론계로 들어간 자들이 편향에 더해 정치파업을 일삼아도 당연한 권력견제 행위로 보았다.

정계에 진출한 386 완장들이 설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분위기의 뒷심 덕분이었다. 정신적으로 83학번을 자처했던 노무현! 노골적으로 종북을 드러낸 이석기, 이정희 등의 등장! 우연한 게 아니었다.

조선조의 운동권 스타, 조광조

역사는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변하지 않는 만큼 시대가 바뀌어도 행태는 때로 판박이처럼 반복되기 일쑤다.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이 예의 원형이다. 당시 사림의 모습을 보면 오늘의 386세대가 마치 그들을 엊그제의 존재처럼 빼다 박은 듯함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中宗反正), 배경에는 연산군의 무오·갑자 두 차례의 사화가 있었다. 사림세력의 반발이 반정으로 이어진 것이니 조선조판 독재타도쯤 되겠다.

새로 옹립된 중종은 33세의 조광조를 기용했다. 조광조는 등용되기 전부터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던 인물이었고, 중종에 의해 기용될 때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을 받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당시의 운동권 스타의 발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화려하게 등장해 의욕적으로 일하던 조광조는 불과 5년 만에 38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고 만다. 중종반정 공신들의 가짜 공훈을 찾아내 척결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밀어붙이다 거센 반발을 초래한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중종은 그렇잖아도 왕도정치 실현의 명분 덕에 매일같이 경연 등에 시달리며 가뜩이나 피로감에 젖어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 부담까지 커지자 결국 조광조를 제거하고 말았다. 얼핏 안타까운 희생이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조광조 자신의 성급함과 미숙함의 탓이 적지 않았다.

조광조는 도학정치(道學政治)를 내걸고 각종의 개혁조치를 맹렬하게 밀어붙였었다. 매우 ‘운동권스러웠다’고나 할까? 스타일도 그랬지만 조광조가 내건 각종 개혁안도 여러모로 그랬다. 현량과(賢良科)를 실시, 어진 자를 추천으로 기용한다는 명분으로 사림들만 대거 등용했다. 노무현 때의 ‘코드 인사’가 그것을 흉내 낸 것일까?

물론 민생을 위한 조치도 있었다. 일종의 조세개혁이라 할 방납의 폐단 시정, 균전제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통한 자영농 육성 강화도 추진했다. 하지만 저항이 컸던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조광조의 모든 개혁조치에는 오직 사농(士農)만 있었을 뿐 그 어떤 조치에도 공상(工商)은 없었다. 어질게 베푸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전부였을 뿐 경제를 통한 국부증진의 관점은 원천적으로 결여돼 있었다. 성리학 사림에게 그런 발상이 있을 턱이 없었다. 국방문제는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숭문(崇文) 도학(道學)에 칼의 자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의 386운동권 출신들이 시대를 넘는 유사성을 보인다. 경제성장과 국부증진에 대한 구상은 도외시한 채 오직 경제정의다. 부유세, 반값등록금, 무상복지, 그리고 경제민주화라! 조선조 사림과 뭐가 다른가? 따지고 보면 조광조의 몰락의 계기가 된 위훈삭제도 그렇다.

과거 들추기를 통한 정치공세라는 점에선 노무현 때 그토록 소동을 벌인 ‘과거사 진상조사’나 ‘친일인명사전 발간’ 따위와 꽤 유사하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사에 대해 박근혜 후보더러 사과하라 했던 것도 마치 그렇다. 안보관의 결여도 빼다 박았다.

개국시조 부정하는 사림과 386

사림은 일종의 조선조판 운동권 세력이라 할 만했다. 이들은 개국 이래 줄곧 재야에 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삼은 정몽주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에 반발하다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격살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림이 마침내 조선의 중앙정치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종 때 김종직이 발탁되면서였다. 개국 이래 꽤 세월은 흘렀다지만 어쨌든 아이러니였다. 조선의 개국에 반대한 인물을 정신적 지주로 했던 세력이 조선의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 기묘한 아이러니는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의 운동권의 모습을 보면 결코 낯설지가 않다. 이들은 정부수립에 기어코 반대한 김구는 정도 이상으로 추앙하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한없이 깎아 내린다.

심지어는 주사파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인하고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래도 당시 사림들은 비록 정몽주를 종조로 했어도 조선왕조에 대한 완전한 충성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종북주사파들은 조선조의 사림들의 문제점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악성이다.

조광조가 죽으면서 사림 시대가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시대는 거듭되는 곡절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대세가 돼갔다.

그렇게 그 자신이 기득권세력이 돼가자 초기에 그나마 가졌던 개혁적 기풍도 다 잊었다. 백성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갔으나 사림들은 글만 농단하는 숭문(崇文)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정묘 병자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 대전쟁으로 온 나라가 연거푸 유린됐다.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군마를 막으려는“ 사림다운 허세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조선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나라는 서서히 사망의 길로 접어들어 갔다. 구한말 일본은 그렇게 망가진 나라를 그냥 주워갔을 뿐이었다.

386세대 등장 이후 거의 한 세대의 세월, 민주화 이후 25년이 흘렀다. 그 세월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386으로부터 확산된 하나의 경향성이 한국사회의 지난 20여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민주주의가 광장의 소동과 동일시되면서 먼지가 난무하고 고함은 가득해졌지만 경제는 GDP 2만 달러 대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주변 국제정세가 격동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안보위기도 더욱 심화되고 있지만 종북반역세력이 아무데서고 설쳐대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에서 386세대의 40대는 조선시대의 사림들과 같은 우행(愚行)에 종북반역의 혐의까지 더한 후보 쪽에 더 많은 표를 주었다.

세대 감염의 독소 탓인가 아니면 사림 문화적 악성 DNA의 반복인가? 386세대도 10년만 더 지나면 50대가 대다수에 60대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린 운동권적 발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도 불행이고 나라에도 해악이다.

이번 대선에서 386의 선배세대인 50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신세대다. 그런데 이들 세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이 한때 그토록 치열하게 맞섰던 박정희 시대와 화해하면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냈다. 386세대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래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