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임명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윤창중에 대해 “나치 괴벨스”라고 말한다.
<오마이>, <한겨례>, <경향>, <프레시안> 같은 [깡통진보] 기관지들은 이런 취지의 주장을 한다.
"문재인 지지자에게 ‘정치 창녀’라는 막말 극언을 하는 윤창중이 인수위 수석대변인이라고?
당신들은 정말 통합을 추진할 생각이 있나? 분열하고 전쟁하자는 거냐?"
윤창중이 막말 극언이라고? 나치 괴벨스라고? 국민 분열의 상징이라고?
엄살부리지 마라. 그냥 입바른 소리를 뜨끈하게 했던 언론인이었다. 하나씩 따져 보자.
1. 몸을 판 창녀가 아니라 영혼을 판 정치투기꾼
윤창중이 과연 ‘문재인 지지자’에게 ‘정치 창녀’라고 불렀나? 아니다.
그는 문재인 지지자 [전체]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직, 여권 인사로서 막판에 ‘문재인 승리에 판돈을 건 정치 투기꾼들’을 ‘창녀’라고 불렀을 뿐이다.
정운찬, 김덕룡, 김현철, 윤여준.
이들은 아무런 문맥없이 느닷없이 입장을 바꾸었다. 새누리에 합류한 김경재, 한화갑, 한광옥과는 완전히 다르다.
김경재 같은 이들은 오랜 시일동안 [친북-종북으로 망가져가는 민주당]에 대해 투쟁해 온 사람들이다.
하다 하다 안 되어 마침내 새누리에 합류했다. 이들에게는 일관된 문맥이 존재한다.
문맥을 지킨 존재는 자아(Self)와 영혼을 가질 수 있지만, 문맥이 없는 존재는 허깨비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정운찬, 김덕룡, 김현철, 윤여준을 ‘창녀’라고 안 부른다.
대신 [영혼을 팔아먹은 투기꾼들]이라고 부른다.
생계를 위해, 집안을 위해, [몸]을 파는 가련한 여인은, [권력을 탐내서 영혼을 팔아먹은 투기꾼]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이다.
이들을 [창녀]에 비유한 윤창중은 [창녀모독죄]를 범했다. 이들을 [창녀]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에 대한 최대의 칭찬이다.
내가 욕다운 욕으로 표현해 주마. [썩은 영혼을 헐값에 팔아먹은, 3류 정치투기꾼들]
윤창중이 나치 괴벨스라고?
그렇게 말한 박용진 대변인은 그야말로 [화려한 종북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대학생총연맹(한총련, 이적단체) 산하 서총련 북부총련 의장/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
민주노동당(현재의 통진당) 간부 및 대변인/이수호(종북 몸통, 민노총 의장, 전교조 위원장 역임)의 愛제자
지금 시대의, 또한 지금까지의, 세계 최악의 전체주의는 북한이다. 김씨 일가에 비하면 히틀러는 천사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비하면 아우슈비츠는 특급호텔이다.
종북은 북한 전체주의를 따르는 추종자이며, 친북은 북한 전체주의에 봉사하는 부역자이다.
대학시절 이후 평생을 종북, 친북 세력과 어울리며 밥 먹고 살아 온 박용진이 ‘나치’를 [악의 대명사]인 듯 입에 올리는가?
한 번 나치를 비난하려면 천 번 만 번, 북한 전체주의를 비난하도록!
2. 지하에 묻힌 아수라(阿修羅)를 불러내지 말라!
나치와 같은 극우파의 두 가지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는 [폭력], 둘은 [극단적 민족주의]이다.
윤창중이 이제까지 단 한 번이라도 폭력과 테러를 선동한 바 있는가?
윤창중이 이제까지 단 한 번이라도 [우리 한국인은 세계 모든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 할 ‘운명적 민족’]이라고 떠든 적 있는가?
없다. 결단코 없다.
그런데 왜 극우니, 나치니 흉악하기 짝이 없는 딱지를 붙이는가!
너희, [깡통진보]들은 언어를 부풀려 사용하면 되치기 당한다는 이치도 모르는가?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 진짜 극우가 튀어나와 너희 배를 칼로 가르고, 너희 목에 ‘화환’(등유에 절인 고무타이어, ‘necklace’라 불린다)을 걸어 불지르면 어떻게 할 텐데? 오래 전, 땅에 묻힌 아수라(阿修羅)—극우, 나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대들에게 정말 아수라가 찾아가는 수가 있다.
북한 전체주의야말로 참혹한 폭력이요 극단적 민족주의이다. 그들은 사람을 파리목숨 죽이듯 죽인다.
그들은 [‘단군의 자손’이야말로 세계를 지배할 민족]이라고 가르친다.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자.
[김씨 일가]는 스탈린주의에서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배웠다.
인간을 [전체주의적 신인류로 품종개량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사회를 [숨막히는 병영체제로 리엔지니어링해야 하는 재료]라고 가르친다.
개인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오직 [영원히 이어지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 전체]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완성해서 [지구 최악의 지옥]을 만들었다.
[김씨 일가]는 또한 [미카도이즘](Mikadoism, 일제의 침략적 천황주의)에서 혈통숭배와 종교적-침략적 민족주의를 배웠다.
조선민족(=단군의 자손)이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을 지배할 운명이라 가르치고, [김씨 가문]이 조선민족을 이끄는 ‘신적(神的) 혈통’(divine bloodline)이라고 세뇌한다. 그들은 [미카도이즘]을 완성해서 [지구 최악의 세습 사교(邪敎)]를 만들었다.
이렇듯 북한전체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미카도이즘의 교잡종이다. 스탈린주의와 미카도이즘—두 개의 극악이 융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북한 전체주의]의 극악함은 [나치]보다 천 배, 만 배 더하다.
그래서 “[김씨 일가]에 비하면 [히틀러]는 천사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비하면 [아우슈비츠]는 특급호텔”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3. 원한 코스프레를 집어치워라!
지금의 [깡통진보]는 대한민국을 10년이나 집권했던 정치집단의 기반 세력 아닌가?
그러고도 대한민국 시스템 자체에 대해 무에 그리 원한이 많은가? 누릴 것 다 누리고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수치스런 나라이고, 민족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고 믿는 [친북자학](親北自虐) 멘탈이 바로 [깡통진보]의 근본 [정신]을 구성하고 있지 않는가?
이 해괴망측한 사고방식을 [정신(]영어의 spirit, intellect. 독일어의 Geist)이라고 억지로 불러 준다면..
이는 [시스템에 대한 원한]이다. 그런데 가짜다. 그 생활과 존재양식이 웰빙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시스템의 수혜자들]이 6.25 때 패배한 [극렬 스탈린주의자들]의 원한을 흉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웰빙]과 [6.25 백골]의 짬뽕 칵테일. 자신들의 용어로 [강남 좌파]란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심리를 [원한 코스프레]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하면 근사하다.
[꼬쁠레-드-르쌍띠망](la cos-play de ressentiment). 강남좌파들은 잘 외워서 쓰도록.
그래야 프랑스제 레드와인을 홀짝 거릴 때 더 멋질 것 아닌가!
구역질 난다. 집어치워라.
우리가 물려받은, 수 천년 동안 축적되어 온 [얼](=문화유전자)의 가르침이, “원한(=르쌍띠망)을 멀리해야 한다”는 너그러움 아닌가!
참된 원한조차 녹이고 삭이는 얼을 가지고 있거늘, 너희 [깡통진보]는, 이미 60년 전 6.25의 백골처럼, 삭아 없어진 원한을 억지로 되살려 떠받든다. 악령을 불러내어 그 앞에 절한다. 이 황당한 짓을 통해 너희는 스스로 ‘개념 있는 존재’가 된다고 착각한다. 개념은 개뿔!
[존재하는 악령]도 물리치는 얼을 물려받은 놈이, [존재하지도 않는 악령](=대한민국 시스템에 대한 원한)을 억지로 불러내어 섬기는 짓—이는 [개념 존재]가 아니라 [얼빠진 존재]일 뿐이다.
너희가 더럽힌 얼을 다시 추켜들어 더듬어 보자. 그래! 바로 너희의 구원을 위해!
4. 우리 얼은 모심(侍)과 시김(醱酵)이다
크리스마스 날, 위대한 문화인류학적 통찰을 가진 시인 김지하는 [모심](侍, 섬김)과 [시김](醱酵), 두 개의 우리 문화원형(文化原形) 중에 시김을 조명하는 글을 발표했다.
뱀발:
김지하의 글은, “우리 문화의 원형인 시김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전세계에 전해야 할 가치요 문화원형(文化原形)이다”라는 주제였다.나는 가끔 김시인이 내놓은 [소식]을 지겨운 산문으로 풀어서 이야기하곤 한다.
김시인의 이야기는 이미 철학이나 사상의 차원을 넘어섰다.
[뜻이 숨어있는 영감](秘意的 靈感, esoteric spirituality)은 조직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 혹은 사상이라는 장르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에 대해 ‘사상’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소식’이라고 말한다.
내심으로는 ‘축복’이라 이름하고 싶지만.
삶은 고단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다. 오죽하면 니체(Nietzsche)가 “징징대지 마! 우리는 모두 암탕나귀, 수탕나귀들이야.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라고 껄껄대며 말했을까?
단언하지만, 서양 사상 중에 김지하의 [소식]과 어우러져 춤출 수 있는 것은 니체 밖에 없다.
니체는 [모심]과 [시김]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노래했던 유일한 서양 사상가이다. 그런데 김지하의 [소식]이란 무엇인가?
수천년 동안 벼리어진 우리 얼의 짜임새 그 자체 아닌가!
우리 얼에 니체가 결합하는 것—나는 이를 두고 “한반도에 지중해가 결합한다.”고 말한다.
한반도가,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지중해를 어떻게 안아 들이냐고? 멍청한 질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는 모두, 10억 여 년에 걸친 생물 진화의 전체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개체가 큰 것을 담는다.
김시인이 좋아하는, [꽃무지](조계종의 근본 사상인 화엄(華嚴). 생명이 흐드러지게 핀 상태. 니체는 이를 두고 ‘거침없이 흐드러짐’ Mutwilligkeit이라고 불렀다)의 가르침인 [월인천강](月印千江)이요 [일진지중](一塵之中)이다.
“달은 하나이지만 무수한 강이 각기 다른 관점과 처지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달을 담고 흐른다”는 것이 [월인천강]이며 “티끌 하나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있다”는 것이 [일진지중]이다. 자! 이제 워밍업 끝! 지금부터 [모심], [시김]을 살펴 보자.
5. [시김](발효-醱酵)의 시작은 처용(處容)이다
전 세계에서 오쟁이진, 못난 남편을 떠받드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오쟁이졌다”는 것은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 일을 당했다”는 뜻의 고유어이다.
우리는 이 못난 사내 처용을 떠받들었다. 그것도 순수 토종 한국인이 아니라 이역만리에서 건너 온 뿌리 없는 잡놈이었다.
밤에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었다. 힘깨나 쓰는 토박이 귀족이 마누라와 섹스를 하고 있다.
서로 얽혀 있는 두 남녀. 마누라는 고개를 돌려 민망함을 가렸지만, 사내놈은 흉악하다.
그는 처용을 힐끗 보고는, 전혀 당황하거나 꿀리는 기색 없이 하던 행위를 계속했다. 처용을 개 취급을 했다.
한마디로 “꼽냐? 그래서 어떻게 하려구? 죽을래? 뿌리도 없는 잡놈이 까불기는! 그냥 꿇어! 꼬리 말고 꺼져!”
살인을 범하고도 남을 굴욕과 억울함을 처용은 훌훌 털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처용의 인내를 칭송했다. 처용을, 잡귀를 물리쳐주는 반신(半神, demigod)으로 떠받들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평가(evaluation)에 주목해야 한다. “오쟁이지고도 끽 소리 못하는 겁쟁이”라고 왕따하는 대신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훌훌 터는 커다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숭배한 것이다.
삶은 원초적으로 고단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다. 따라서 억울한 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억울함을 벼려서 앙심을 품느냐, 아니면 가슴 밑바닥 아래, 무의식 뒤편으로 넘겨버리느냐—이것이 커다란 변별점이다.
조상은 우리에게, 고단함과 억울함을 가슴 밑바닥 아래, 무의식 뒤편으로 넘겨버리는 것을 가르쳤다.
그 깊고 깊은 곳에서 고단함과 억울함은 천천히 [발효]한다. 이것이 김시인이 말하는 [시김]이다.
남들은 어땠을까? 억울함을 벼려서 앙심을 품고 복수하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를 보자.
아가멤논은 “트로이의 바람둥이가 그리스 소왕국의 왕비를 유혹해 도망갔다”라는 치욕에 대해 [거대한 복수 전쟁]을 벌였다.
트로이 전쟁이다. 이 [앙심]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전쟁 승리를 위한 인신공양 제물로 바쳤다.
그 마누라는, 딸을 죽인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시동생을 유혹해서 섹스하고 남편을 죽인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답시고 어머니를 살해한다.
[앙갚음과 질투]—이것이 그리스 신화의 주요 주제이다.
독일인의 [앙심]은 우직하다. 그들은 충성과 명예를 훼손한 자를 죽이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독일인의 이 우직한 앙심이, [바그너(R. Wagner)의 오페라]를 꿰뚫고 있는 핵심 주제이다.
지중해와 유럽 문화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복수심과 앙심의 문화]를 그 근본부터 비판한 사람은 니체이다.
그래서 나는, [시김]의 시작—처용—과 어우러질 수 있는 서양 사상은 오직 니체 뿐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이런 취지로 말한다. “얼굴에 처형자의 관상이 어른거리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의 영혼은 [복수심] 밖에 모른다…처벌이란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복수에 다름 아니다…
앙심에 불타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 문화재를 때려 부순다고 해도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복수]가 아니라 오직 [생명의 길]을 존중해야 한다.”
조상의 얼이 가르치고 있는 [시김]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죽어 나자빠져 백골마저 썩은 60년 전의 [앙심]을 내세워서 친일파 낙인을 휘두르고 (실은 소규모 마적질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칭송하는 [앙심 코스프레]가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깡통진보]는 수 천년 조상의 얼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뿌리 없는 상스런 멘탈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멸한다. 얼빠진 존재는 넋빠진 놈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넋나간 존재는 [허깨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6. [시김]의 뿌리는 [모심](=섬김)이다
처용은 그날 밤 왜 칼부림을 하지 않았을까? 여자가 불쌍하고 애들이 가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끊기 보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분노]를 끊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생명에 대한 [모심]이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존중은 곧 생명에 대한 [섬김]이다. 이것이 바로 김시인이 말하는 [모심]이다.
우리 문화에는 이 [모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에는 [잔혹한 농민전쟁]의 역사가 거의 없다. 이는 우리의 동학난과 중국의 태평천국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태평천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쌍방 폭력이 난무했었다. 그러나 동학에는 그런 흔적이 아무데에도 없다.
태평천국은 ‘왕조 타도, 천국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학은 평민, 여성, 어린이의 지위와 인권 개선을 요구했다.
뱀발:
나는 동학농민혁명이니 동학농민전쟁이니 그런 거창한 단어가 싫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부른 대로 ‘동학난’이라 칭한다.내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할아버지가 전남 고흥 두원의 동학군 책임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 양할머니가 불러주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자장가로 들었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이었으리라. 나는 비록 1959년 생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대충 1930년대 출생자들의 마음결을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은 나의 생물학적 시간 너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심]은 [시김]의 심리적 기초이다”
그렇다. 생명, 여성, 어린이, 약자에 대한 존중이 있기에 억울함을 가슴 깊은 밑바닥 아래, 무의식 저 너머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 존중심이 없다면 세상에 못 할 짓이 없다.
그 존중심이 없다면, 아무 거리낌없이, 억울함을 벼려서 시퍼런 [앙심의 칼], [복수심의 칼]을 갈아 휘두른다. 도살자가 된다.
중국인들은 이 같은 복수욕에 가득한 행동을 [협](俠)이라 불렀다. 홍콩 느와르가 다루는 심리 상태이다.
수호지의 영웅 흑선풍 이규의 심리상태이다. 수호지 전체가 바로 [복수욕](=俠)에 동감해서 모인 도살자들의 영웅담 아닌가!
김시인이 말하는 [모심]은 서양의 [기사도](Chivalry)와 정확하게 조응한다.
힘을 가진 자, 사나운 에너지를 가진 자가 여성, 약자, 생명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사도이다.
근대 서양철학자 중에 기사도를 가장 깊게 이해한 사람은 에드먼드 버크(E. Burke)—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였다.
[기사도 정신]이야말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모태]이다.
김지하더러 “변절했다”라고 패악질을 부리는 [깡통진보]는 김시인의 정신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천박한 인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심]을 아는 사람은 그 심성의 본질이, 보수주의자이다.
[모심]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 생명을 담아 흐르는 존재들인 여성, 어린이,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한다]라는 마음이며,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 생명이 벋어가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모심], 즉 [기사도 정신]이 [정치적 보수주의의 핵심]이다.
김지하 시인의 사상적 뿌리가 [모심]인 한, 그는 (최소한 정치철학에 있어서는) [태생적 보수주의자]이다.
뱀발:
나는 [정치철학 차원의 ‘보수주의’]와, [정파 차원의 ‘보수’]를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정치철학 차원에서는 보수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정치철학]을 공유하는 두 개의 정파—보수와 리버럴—가 존재할 수 있다.내가 쓴 다른 팜플렛들, 특히 “이제 보수주의 정치철학이 탄생한다”를 읽어 보기를.
1793년 프랑스 혁명의 폭도들이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M. Antoinette)에게 여덟 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스캔들을 씌워 목 잘랐을 때,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했던 연설을 들어보자.
좀 길지만 [기사도]에 대한 버크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거의 전문을 번역했다.
(혁명 폭도들은 에미의 목을 자르고 나서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술만 먹여서 간경화로 죽게 만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황세자비였던 왕비를 뵌 지 어언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궁등(穹燈)의 조명 멀리서도 그토록 우아할 수 없었습니다.
지상의 존재 같지 않았습니다.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 올려 아름답게 만들고 기쁘게 해주는 존재였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사람들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생명, 숭고, 기쁨에 가득 찬 새벽별처럼 반짝였습니다.
아, 그러나 이 혁명이란 괴물! 왕비가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저리기만 합니다.
먼발치에서 존경심 가득찬 열렬한 마음으로 그녀를 흠모하던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가, 가슴 깊이 지독한 수치심을 묻어야만 하는 상태로 내몰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 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가, 이런 흉측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입니까? 원래는, 용감한 남자들의 나라, 명예심을 아는 남자들의 나라, 말 달리는 용사의 나라 아닙니까!
그 우아한 분을 모욕하는 눈길 한 번에 대해서라도 만 개의 칼이 뽑혔어야 마땅한 나라 아닙니까!
아, 그러나 기사도의 시대는 이제 갔습니다. 궤변가들과 장사치들이 승리했습니다. 유럽의 영광은 이제 영원히 끝났습니다.
상급자와 여성에 대한 가없는 충성은 끝장났습니다.
굴종 속에서도 고요히 유지되는 자존심과 숭고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종 속에서도 오히려 고귀한 자유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가슴으로부터의 충정은 끝장났습니다.
자발적인 품격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기상은 이제 시들었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명예를 순결하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한 점의 오욕도 쓰라리기 짝이 없는 상처로 느끼는 마음, 광포함을 억제하는 한편 용기를 북돋우는 마음, 그리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고귀하게 만드는 마음, 악의 크기와 힘을 절반으로 꺾어버리는 마음…
이 마음은 이제 영원히 죽었습니다.
여성, 약자, 생명에 대한 존중과 충성을 모르는 사회는 모질고 살벌해진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황폐한 마음을 경계했다.
그래서 척박한 농경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심]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이것이 동학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동학은, 유생 지배계급이 썩어 나자빠지자 민초 지식인들이 [모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건이다.
[모심]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한 서양사상가는 니체이다. 삶에 대한 사랑에 관해 니체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침 이슬 한 방울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바르르 떠는 장미꽃 봉오리…우리랑 장미꽃 봉오리 사이에 공통점이 무엇일까?
그래.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하지만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거지.
사랑에는 항상 광증(狂症)이 좀 포함돼 있지. 하지만 광증에는 항상 일정한 방식이 있어.
나도 삶을 사랑해. 내 경우엔 나비나 비누거품 같은 것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사람들 중에 나비나 비누 거품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이 가볍고, 바보스럽고, 섬약하고, 애처로운 작은 영혼들이 날개짓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나는 눈물이 나고 노래를 부르게 되지.
그래서 나는 춤추는 법을 알았던 신 하나만 믿을 수밖에 없어.
7. [시김]은 운명 혹은 흰그늘에 이른다
운명은 곧 [운명적 존재]이다. [자신의 길을 깨달은 존재]이다. 공자는 이를 두고 지천명(知天命)이라 말했다.
김지하 시인은 이를 [흰그늘]이라 불렀다. 눅눅한 감방 창문 밖에 보이는 환영. 환각 속의 지평선 위, 아스라한 소실점으로 벋은 하얀 길.
김시인은 이 이미지에 [흰그늘]이란 이름을 붙였다.
[복수심과 앙심]에 미처 날뛰는 사람에게는 운명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길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미친 사람에게도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가치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좇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인다.
세상과의 팽팽한 긴장 관계 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용감한 자아]가 바로 운명의 또다른 이름이다.
운명은, [삶의 고단함과 비극성] 한 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의해서만 조명된다.
[시김]은 [삶의 고단함, 비극성에서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이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시김]은 운명에 이르게 해주는, [인간 심리의 발효 과정]이다.
신명(=합일) 중에 최상의 신명은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인 사람]이 느끼는 고요한 희열이다.
조상이 물려준 얼—즉 한국문화의 원형(原形)은 [시김]을 통해 운명을 보고 [신명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니체는 이 비밀을 속속들이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쓴 마지막 책의 한 챕터의 제목이 “나는 왜 운명인가?”였다.
그가 본 자신의 운명은 [자아, 진실, 생명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1.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를 통해서만 자아가 성립되고 유지된다. 진실을 경멸하면 자아가 붕괴한다.
(그래서 [깡통진보]에게는 자아가 없다.)
2. 진실은 생명이 벋어가는 길을 비추는 서치라이트이다. 진실을 떠나면 오직 파멸 뿐이다.
(그래서 [깡통진보]가 떠벌이는 온갖 달콤한 이야기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3. 생명을 모시고 존중하는 마음([모심])이 있을 때에만 진실을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 [깡통진보]는 죽음을 선호하고 시체를 사랑한다)
4. 삶의 고단과 비극 한 가운데에서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이르는 위대한 발효([시김])가 일어난다.([깡통진보]는 이러한 경험을 이해하지 못 하는 천박한 웰빙일 뿐이다.)
5.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는 [나정우](“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라는 절대적 우월감)이다. self-righteousness)이다.
[나정우]에 빠지면 영혼이 증발한다. (그래서 [깡통진보]에게는 영혼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자아가 되면—즉, 운명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시김]을 통해 이르는 [흰그늘]—즉, 운명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무엇이 좋을까? 고요하게 빛나는 자긍심과 희열—[최상의 신명]에 이른다.
이 자긍심, 희열, 신명이란 무엇인가?
[고단함과 비극] 한 가운데에서도, 죽기 십상인 자리에서도, 죽고야 말 자리에서도, 모든 논리가 붕괴한 자리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위대한 뒤집기]이다. 인간으로서 목숨을 받고 태어나 이룰 수 있는 최상의 예술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외쳤다. “그게 인생이었어? 좋았어! 한 번 더!”
8. 한반도가 지중해를 오롯이 안을 때
[얼]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전해져 현재에서 변화하여 미래로 전해진다.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가, [얼]의 얼개에 새로운 보강, 새로운 요소, 새로운 짜임새를 더해야 한다.
조상이 물려준 [얼]에는 두 가지가 찬란하고 세 가지가 부족하다.
찬란한 두 가지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모심]과 [시김].
앞서 밝혔듯이, 여자, 약자,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모심]이고, 삶의 고단, 억울, 비극을 무의식 뒤편으로 던져 천천히 발효시키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에 이르는 것이 [시김]이다.
[모심과 시김]을 문화원형으로 가진 민족은, 김시인의 지적에 의하면, 우리 말고는 없다.
참으로 찬란한 [얼]이다. 중국이라 불리는 거대한 블랙홀 바로 옆에 붙어서 5천년 동안 단련된 [얼]이다.
근대 서양사상가 중에 니체만이 유일하게 [모심]과 [시김]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만 보아도,
이 두 가지가 얼마나 희소하면서도 고귀한 [얼](=문화원형)인지 알 수 있다.
그 니체조차 자신이 살던 문화(19세기 유럽 문화) 속에서 이를 [몸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청년 니체는 당대 최고의 그리스 고전문헌학자였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 별로 중요하게 부각되지 못 해 왔던 존재인 디오니수스(Dionysus, 박카스; 술, 신명, 죽음-부활의 신)에 얽힌 이야기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결사적인 사색과 통찰과 상상을 통해, 간신히 [모심과 시김의 세계]를 그려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니체에게는 사색, 통찰, 상상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생활, 전통, 얼이다.
[깡통진보]는 이 소중한 [영혼 차원의 상속 자산]을 내팽개쳤다. 그래서 [깡통]이 됐다.
조상이 물려 준 [얼]에 [부족한 세가지]는 무엇인가?
죄다 현대문명이 진화하면서 생겨난 인간조건(human condition)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나면 우리 조상은 근대문명 속에서 살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 지 하나씩 살펴 보자.
첫째, 조상의 [얼]에는, [세계를 한없이 낯선 것으로 느끼는 심리상태, 즉 세계와 나 사이의 깊은 분열상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심리상태를 [실존]이라 부른다. 현대문명은 이 같은 심리상태—[실존]을 양산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실존]이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가치, 도덕, 윤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존재들이다.
공동체와의 유대 속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원자화된 사막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둘째, [실존이 갈망하는 존재—나다운 존재, 즉 자아—가 되는 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자아가 공동체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나다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내밀하고도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체와 끈끈하게 연결되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현대문명 속에서, 이 둘 모두를 실현하는 길에 대한 지혜—건강한 자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대한 지혜는, 조상이 물려준 [얼]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니체는 이 같은 공동체를 ‘짜라두짜의 하짜(Hazza)’라고 불렀다. 하짜는 유대인들의, 까마득한 원시 공동체였다.
셋째, 조상의 [얼]에는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이 작렬하고 불똥이 마구 튀는 [살아있는 이성]의 작동규칙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규칙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이해관계, 입장, 편견을 뛰어넘는,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이다.
다른 하나는 [‘나정우’(=’나는 정의롭다’는 절대부동의 우월감)의 편협 광포함을 혐오하는 입맛]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위에서 든 세 가지 이슈에 대한 탐구는 서양에서도 불과 200년이 채 될까 말까 하다.
이 모두, [현대문명의 특성]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존]—세계로부터 분열된 에고(ego)에 대한 첫 철학 서적은 19세기 초에 출간된 헤겔(G. W. F. Hegel)의 <정신현상학’>이다.
‘자아’(Self)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실존’이라는 단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를 뜻하는 ‘머리의 정직성 intellectual integrity)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나정우’(self-righteousness=’나는 정의롭다’라는 절대부동의 우월감)란 단어가 쓰인 것 역시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반면에 조상의 [얼]은 짧게 잡아 5천년, 길게 잡으면 9천 년까지 올라간다. 조상의 [얼]에 담긴 [모심과 시김의 지혜]는 거대한 뿌리이다.
이 뿌리 위에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슈에 관한 지혜를 접목시키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 세대가 해내야 할 일이다.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1964년에 발표한 시 ‘거대한 뿌리’는 바로 이 과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한반도에 지중해가 결합하는 것’이라 부른다. 이때 한반도는 [모심과 시김의 지혜]라는 거대한 뿌리를 가리키고,
지중해는 [(지중해에서 출발한) 현대문명이 수반하는 세 가지 이슈에 대한 지혜]라는 새로운 접목 가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과업을 해 낼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왜?
우리 각자는 뿌리 없이 떠도는 [지중해 쪼가리]—즉,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족보 없는 떠돌이 원자—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얼], [거대한 뿌리]에 결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져야 마땅한 거대한 에너지를 되찾게 된다.
시인 김지하는 온 몸으로 그 작업을 개척한 [막장 광부]이다. 이제, 곡괭이는 우리 손으로 넘겨졌다.
[막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막장]—모든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그곳에서 캐내어지며 모든 유의미한 진척은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사나운 곡괭이 질에 찍혀 나가고 싶지 않으면 [깡통진보]는 비켜라!
어차피 너희는, 우리가 바위를 뚫고 만드는 길에 뒤늦게 웰빙 무임승차하는 존재 아닌가!.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www.facebook.co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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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위대한 시인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특별기고를 했다. 위 박성현 뉴데일리 논설위원의 글은 김지하 시인의 기고에 대한 해설이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특별기고 전문이다. [편집자 주]
다섯 나라를 엮어내는 네오(新)-르네상스- 힐링
우리는 이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다섯 나라를 이끌어 엮어내는 세계적 네오(新)-르네상스 운동을 결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배네치아 중심의 유럽 르네상스가 오늘의 근대문명을 결정했다.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절박하고도 급박하게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본틀이 만들어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 땅에서 우주생명과 맞닿아 있는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네오-르네상스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은 거두라. 이미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요 세계 전인류의 운명이다.
또한 민족문화의 부활과 네오-르네상스의 시작 없이는 참다운 민족통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전할 문화와 가치의 첫번째는 [시김]이다. 세계는 지금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시김]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原形)이다. 왜 [시김]이 가치있는가? ‘발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발효’인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신명으로 뒤바꿔 내는 것이 바로 발효요 [시김]이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서 ‘신명’으로 귀결된다.
한류에는 바로 [시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류가 글로벌 차원의 호소력을 가진다.
이제 [시김]의 흔적이 아니라 본체를 살려 네오-르네상스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김]을 억제하고 살았다. 중국의 압력, 이씨 조선의 경직,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신명’이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으로 억눌러 그 '신명'을 차단했다.
그 결과 '신명' 위에 '한'(恨)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를 통해서 그 '신명'을 살려 뜀뛰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제 위를 타고 눌러온 붉은 악마, 즉 ‘한(恨)’까지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신명’이 ‘한’을 데리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시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에는 [시김]이 배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욘사마’가, 동남아에서 ‘한류’가 불 밝혀졌다.
케이팝이 퍼지고 마침내 ‘말춤’이 떠오른 것은 모두 [시김]의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격변, 우주적 이상변동, 세계적 괴변 현상, 사람들에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심리유형—이 모든 것은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발효시켜 그 한가운데로부터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솟아나게 하는 지혜—[시김]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오직 [시김]을 통해서만 삶은 운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운명으로 고양된 삶—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온 [흰그늘]이다.
우리 온 민족이 지금 [시김]을 구한다. 온 인류가 [시김]을 기다린다. 온 중생들이 지금 [시김]을 기다린다.
유럽 현대의 영지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R. Steiner)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대변동기에는, 가난하지만 영롱한 작은 민족, 이른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르쳐 주곤 한다. 로마문명기에는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로마시대 보다 더 근원적인 대전환기인 현대, 오늘 그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는 것 밖에 모른다.”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까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일본이라 착각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바로 그 일본인을 통해서 슈타이너의 영적인 통찰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는 [시김]에서 시작한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 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이거나 아니면 번쩍하는 번갯불이다.
이 민족의 [시김]은 누구나 다 아는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무가, 허드랫소리와 불교 및 무속문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은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된다. 정선아리랑은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
그것은 ‘넉넉한 월봉(月峰)의 그믐달 밤과 날카로운 초미(初眉)의 눈부신 해돋이의 동서결합이다.
그것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다. 판소리 사이사이 끼어드는 [이완]의 ‘시르라기(쓰레기)춤’, 또는 ‘허벌춤’이 곧 싸이의 ‘말춤’이다.
한갖 심심풀이 ‘허벌춤’이 ‘말춤’이 되어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다.
하물며 본격적인 [시김]의 축제, [발감(不咸)]과 [다물(多勿)]의 예술제가 쏟아진다면?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낸다. 우선 일본에 충격이 전해진다.
일본 철학계의 중핵이라 할 교토대학교의 쓰루미 준스께(鶴見俊輔)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문화혁명이다. 일본여성이 문화적으로 주체를 자각할 때 일본은 해방된다.
일본여성은 한국문화가 자기의 숨은 주체임을 깨달을 때 일어선다.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천년 전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5세기에는 가톨릭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9세기 말에는 사회주의를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뒤, ‘욘사마’가 왔고, 뒤 이어 ‘료조(龍女)’ ‘레키조(歷女)’가 왔고, 이어서 수백만 주부들의 ‘아메 요코’라는 시장의 대변혁이 왔다.
그때 악랄한 일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는 “여편네들이 설치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왔다.
편집자 박성현의 뱀발:
료조(龍女)는 일본 명치유신(明治維新) 시대 최고이 사무라이였으며 개혁 풍운아였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매료된 료마 스타일의 여성.
레키조(歷女)는 '역사 여성(歷女)'으로서 근대 일본 개혁에서 무엇인가 현대 일본에 필요한 독특한 혁신의 지혜를 공부하고자 몰려드는 여성들.한편 아메요코(アメ横)는 도쿄 우에노(上野)의 상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직후부터 발달했다. 사탕(アメ)을 많이 파는 곳, 또한 과거 우리의 남대문 도깨비시장처럼 미군부대(아메리카=アメ)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파는 암시장이었기에 ‘아메’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는 한때, 상점주가 형편없이 싼 가격을 제시하면 손님이 오히려 가격을 올려 지불하는 기이한 상거래가 유행했다.
‘비싸게 살 사람은 비싸게 사고 싸게 살 사람은 싸게 사는’ 초시장적 시장 기능인 셈.
김지하 시인은 이를 [신시(神市)의 시장]이라 부른다.
그는 우리의 오일장(五日場) 역시 이 같은 [신시(神市)의 시장] 원리가 작동했었다고 밝힌다.편집자는 명품, 메이커, 대중상품, 짝퉁으로 세분화된 요즘의 시장 역시 일종의 신시(神市)라고 생각한다.
비싸게 주고 루이뷔통 지갑을 들 수도 있고 좋고 싼 가격에 캄보디아 지갑을 들어도 좋다.
그 여성들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한반도에서 여성 문화 권력이 일어서는 날, 그날 곧이어 일본 여성이, 그리고 곧이어 미국의 커피 파티, 즉 ‘힐러리 그룹’이 일어서리라고, 그리하여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성 지배 사회가 들이닥쳤던 것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이제 여성은 3,000년의 굴레를 벗고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3,000년 그늘 속에서 솟아오르는 흰 섬광, 즉 [흰 그늘] 아닌가! 바로 [시김새] 아닌가!
그래서 여성은 [시김]의 예술가이다. [시김]은 여성을 통해 한 걸음 더 탄탄해진다.
여성이 주류 문화, 주류 사회를 주도하는 날, [시김]을 원형으로 삼은 한류 역시 더 탄탄해진다.
이 한류의 소식이 북한에 전해진다면? 전세계를 열광시킨 말춤의 소식이 북한에 퍼진다면?
한류가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부의 원천’라는 소식이 퍼진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그리고 금강산 깊이, 깊이에 가라 앉아있는, 그러나 한번 떠오르면 좀체 꺼지지 않을 마치 아우라지의 불멸의 [시김새]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원형—[시김]은 한반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의 동남부 ‘이르크츠크’ 황야에서 ‘샤먼 마하’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 있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니까 그가 한마디 던진다.
“스구리 스구리 오야히야니 스구리스구” 그래, 발해시대 이후부터 전해지는 연해주 가요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리듬에서 나는 금방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까지 스탈린에 의해, 삶의 터전이었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뿌리 뽑혀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야에 내버려졌던 30만의 ‘조선유민’들을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톡과 연해주—이곳은 발해의 땅이었다. 중국은 발해가 저희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우리 시조할머니인 ‘웅녀(熊女)’까지도 저희들 조상이라고 흥안령에 동상을 세워놓고 초등학생들에게 참배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화패권주의의 극성 한가운데에서 만주, 바이칼, 동남시베리아, 600만 주민들로부터 무엇인가 떠오를 것이다.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 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근대문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체주의로 치달렸었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복원하는 힐링 파워는, 바로 러시아 동부, 중국의 북동부에 잠들어 있는 엣 한국인들의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이것들을 찾아서 되살리러 가야 하지 않는가?
어찌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 뿐인가? 오호츠크 바다 건너 캄차카로 간다. 사모아 발랑카의 분출수는 한없이 뜨겁다.
그런데 오호츠크는 그만큼이나 차갑다. 이것이 커다란 우주변동의 시작이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유리(琉璃)세계의 조짐이다.
그래서 캄차카는 우리의 신화에 아주 가깝다. 가깝다. 무엇이?
‘장승굿’을 ‘빔차’에서 봤다. 똑같다. 장승 위치에서부터 무당너스레까지 너무나 똑같아서 지루할 지경이다.
나는 ‘빗테르 파블로브스카야’ 역사 박물관으로 가서 그곳 소장인 러시아 고고학자 ‘비에라’ 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캄차가 신화는 9천 년의 역사를 가진다. 약 3천 개가 있다. 그 중에 현재 채취 가능한 것만 2,500개다.
중요한 것은 이 신화들의 근본은 당신들 한국인이다. 캄차카 신화는 아직까지 유럽의 그 어떤 신화학자도 채집한 적이 전혀 없다.
또한 캄차카 신화는 중앙아시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화가 담고 있는 우주적 미스테리이다.
캄챠카 신화는 숨어있는 미스테리도 다르다. 캄차카 신화는, 지금은 배링 해에 잠긴 몽골리안 루트의 상호소통 민요다.
베링해가 점점 넓어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이어주던 통로인 몽골리안 루트가 약 6천년 전에 완전히 끊기기 전까지는 양쪽 사람들이 서로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캄차카 신화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상호소통, 즉 공명(共鳴)이 들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옛 신화 한 토막을 들려 주었다. “이까이 이까이 데에무 와이스미 코낭카투이. 새야 새야 네가 가는 곳이 어디니?
내가 발 담그고 있는 이 큰 바다 밑의 저 새파란 새 하늘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 봤다. 그렇다.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존재한다’는 신화는 이 땅에도 있다.
부산 가덕도 앞바다는 [미친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 바다 밑에 새파란 새하늘이 있다는 전설을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듣는다.
이렇듯 옛 한국인들의 발자취는 바이칼에서 동남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한반도. 일본, 캄차카에 이른다.
그리고 몽골리안 루트를 따라 아메리카로 넘어간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옛 한국인들의 문화원형을 찾아 부활시키는 작업은 당연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원형 부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디언의 문화원형이 부활된다면, 미국 사회 전체에, 우리와 영혼의 차원에서 통할 수 있는 새롭고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가 추가된다.
그렇다. 우리의 ‘네오 르네상스’의 목적은 바로 ‘한국이 교차로가 되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을 이끌고 엮어내는 문화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한류로 하여금 새로운 ‘우주생명의 이치’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이 문명 격변기에 요구되는 [흰그늘]이고 [시김]이다.
이는 곧 문명 격변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과 애달픔에 대한 [힐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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