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츄 강제수용소 정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대학살로 약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유태인으로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를 네 군데나
거쳤음에도 무사히 살아났다.
그가 죽음의 고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 번째 수용소에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구령소리에 맞춰 작업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아직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탓인지 사람들은 길에 패인
웅덩이를 헛디뎌 넘어지면서 이동 속도가 늦었다.
호송병들은 무자비하게 총개머리를 휘두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어느 사람이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
제발 마누라들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빅터 프랭클에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지금까지 수용소 생활의 고통 속에 좌절과 삶의 의미를 잃고 희망보다는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 왔는데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부터 이 정도의 고통쯤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아무리 삶이 참혹할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절대 잊을 수 없고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고 또 어떤 고통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다는 것이 그사람의 주장이다.
그는 훗날 자신이 겪었던 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의미 치료>라는 심리학
이론을 발표하여 크게 명성을 얻기도 했다. -우리시대의 멘토에서-
Donna 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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