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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건(1974), 양심은 시대를 초월한다. - 지만원시스템클럽

by 설렘심목 2012. 9. 17.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양심은 시대를 초월한다.

 

인혁당 사건이 대선전의 정치쟁점으로 부상했다. 인혁당 사건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하나는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10년 후인 1974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이 두개의 사건은 다 같이 학생운동의 배후 조종한 사건이다. 1차 인혁당은 6.3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했고, 2차 인혁당 사건은 민청학련사건을 배후 조종했다. 이 두 사건의 주모자는 도예종이었다. 6.3사건과 민청학련사건 모두 또 다른 4.19사태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을 보면 남한의 모든 학생사건은 북한의 배후 조종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남한의 크고 작은 모든 소요에는 반드시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제1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쟁점이었던 한일회담에 대한 불만을 선동으로 부추기고 여기에 불을 지르려고 북한이 간첩 김영춘(본명 김세진)을 남파하여 만든 지하당으로 당시 제2의 4.19라 불리던 6.3사태를 배후조종한 사건이다. 죄익들은 김영춘을 중앙정보부가 가공해낸 인물이라 했지만 이는 사실로 밝혀 졌다. 간첩 김영춘은 6.25때 월북 했다가 4.19때 남파된 이후 64년까지 영남일보(민족일보와 유사)에 근무했다. 이때 김봉춘이라는 가명도 함께 사용했다. 그는 1차 인혁당사건 때 도피, 70년 가족간첩단 혐의로 체포되어 72년 대구교도소에서 처형됐다.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던 사건이었고, 이에 대한 처벌은 비교적 가벼웠다(도예종 징역4년, 김덕한 징역1년, 이재문 징역1년 등 실형 선고). 국회의원 박범진과 안병직 교수는 이 인혁당 조직을 실재했던 조직이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 이를 다시 재심으로 뒤집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제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에 일망타진된 사건이고, 관련자 23명 중 8명(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은 사형, 김덕환 등 7명 에는 무기징역을, 나머지는 15년 이상의 형을 받았다. 사형이 선고된 도예종씨 등 8명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지 20여 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됐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를 사법살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인혁당은 1964년 적발되어 된 서리를 맞은 후 지하에 잠복해 있었다. 1972년은 7.4 공동성명의 해요 유신의 해였다.

 

박대통령이 북한의 일시 꼬임에 빠져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이라는 통일노선에 대해 북한과 합의하자 지하에 있던 좌익들이 통일의 시대가 왔다며 적화통일행위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박정희는 3개월만인 10월 21일 유신을 선포했고, 이어서 1973년 1월 8일에는 반정부 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긴급조치 1,2호를 발령했다. 이에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은 1973년 4월 미국에 나가 사고를 쳤다. 하버드의 코핸교수를 만나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국에 군사원조를 중단하도록 미국의 실력자들을 동원해 박정희에 압력을 넣어달라는 망언을 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중정은 1973년 8월 8일 일본 팔레스 호텔에 묵고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여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했다. 이것이 하나의 시체놀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 김대중 사건을 해명하라며 민심을 선동한 것이었다.

북한의 자료(과학백과사전 출판사 발행의 전후남조선청년학생운동, 1977) 등에 의하면 남한의 학생운동은 주체사상으로 조직화-의식화된 반파쇼-반미운동이었으며, 이 책의 188-214쪽에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의 조직-활동상들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고, 이 내용들을 읽으면 민청학련은 북과 연계된 국가전복 운동이었다.

 

민청학련은 1974년 3월 경기 양주군에서 결성식을 갖고, 중정을 폐쇄하라, 정보파쑈통치를 중단하라, 김대중의 진상을 밝혀라, 유신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전, 성토, 선언, 격문, 구호, 편지, 삐라, 벽보 등을 통해 1974년 4월 3일(4.3사건)을 기해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전국학생봉기를 기획했고, 4월 3일에는 전국 40여개 대학과 10여개 고교가 시위에 참가하여 또 다른 4.19를 획책하여 국가전복을 기도했다. 북한은 위 책에서 민청학련의 전국조직이 가장 방대했고, 조직화-의식화된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4단계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과도기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를 결성할 계획을 세웠으며, 조총련·인혁당계 및 일본공산당과 결탁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북한의 책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래서 처벌자 규모도 매우 컸다. 총 1,024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이 중 180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민청학련 관련자에 대한 첫 공판은 6월 5일에 시작되어 이철 · 김지하 등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가 후에 무기로 감형되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철(주도자 사형), 유인태(사형), 이해찬, 정동영, 김근태, 손학규, 장영달, 유흥준, 이강철 등이 있으며 이들은 지금도 “북을 위해 존재하는 남조선인민들”처럼 행동해 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이렇게 연결지었다. “민청학련 연루자인 이철, 유인태씨와 친분이 있던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씨를 중심으로 한 ‘인혁당재건위’가 북한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조종했다.”

 

민청학련 및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유죄라고 확신한다

 

2004년 12월 23일, 송기인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좌익조직인 과거사위가 인혁당과 민청학련에 대해 이렇게 발표했다.

“이 두 사건은 박정희가 끼워 맞추기 식으로 조립한 ‘국가변론음모’ 사건이었지만 1964년의 인혁당은 학생 서클에 불과했고, 1974년의 인혁당재건위 및 민청학련사건은 유신을 반대하기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 뒤집기를 획책하는 억지에 불과했다. 빨치산의 집합소-민족문제연구소는 제2차 인혁당의 지도자이자 사형수였던 “이수병 평전”을 통해 과거사위의 위 발표가 거짓이었음을 증명했다. 이 책의 216쪽을 보면 ‘민청학련의 투쟁기’가 나온다. 이수병은 당시 일본어 학원교사였다.

 

“서울에 머물게 된 여정남(경북대 학생회장, 인혁당재건위로 사형)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서울대학교의 이철, 유인태, 황인성 등을 만난다. 이들 학생운동 지도부는 논의와 토론을 거쳐 각 대학 내에서 일회적으로 그치는 학생들의 시위를 극복하고, 강력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국적인 투쟁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 .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10.2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지도부는 선배그룹과 결합하면서 전국적인 반유신체제 투쟁을 구체적으로 모색한다. 이들 학생운동 지도부는 서울과 지방 대학의 연결선을 복구하고 종교계와 각계 원로를 비롯한 재야세력과도 연대를 가진다.”

“마침내 이들은 전국적 투쟁기구 성격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새학기 각 대학의 시위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바야흐로 민중 승리의 새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서 허덕이던 민중은 이제 절망과 압제의 쇠사슬을 끊고 또다시 나섰다. . . 보라!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상태를 강요하는 자들, 깡패집단들, . . 보라! 호화방탕을 일삼으며 민중의 살과 뼈를 실찐 저 도둑무리들을! . . . 보라! 이 땅을 신식민주주의자들에게 재물로 바친 저 매국노들을!”

이상 이수병 평전에서 보듯이 민족문제연구소는 아래 세 가지 사실을 인정했다.

 

(1) 이수병은 “인혁당재건위 변혁운동 지도자” 였다.

(2) “인혁당재건위“의 이수병은 동 조직의 여정남을 통해 민청학련 학생운동을 지원하였다.

(3) ‘인혁당재건위’와 ‘민청학련’은 강력한 전국적인 투쟁조직으로 서울과 지방 대학의 연결선을 복구하고 종교계와 각계 원로를 비롯한 재야세력과도 연대를 가진 후, 전국적 투쟁기구 성격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이라는 이름으로 새 학기 각 대학의 시위를 지원하였다.

이상 3가지는 이수병을 위인으로 여기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쓴 글이다. 그런데 같은 이념을 가진 과거사위는 지금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인혁당은 학생 써클에 불과했고, 민청학련은 학생들의 연락망에 불과했다"

"북한에서 돈 받고, 북한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간첩활동을 한 적은 없다"

이상 이수병 편전의 내용은 북한 책과 일치한다.

 

좌익들의 어처구니없는 역사 뒤집기

 

국민이 등한시 하는 사이 반역의 역사가 전사가 돼 가고 있다. 과거사위에 의해 남민전사건, 사노맹사건, 동의대 사건, 구학련사건. 사북사태 등이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뒤집어 졌다. 노무현이 임명한 대법원 이용훈은 3공과 5공 시절에 발생했던 22개 좌익사건을 모두 재심에 회부하여 무죄를 주고 사건 당 수십-수백억원의 보상금을 주고 판사들이 국가를 대표해 사과하고 절까지 했다.

좌익들은 1946년 9월의 전국폭동, 10월1일 대구로부터 시작된 100일간의 전국 유혈폭동을 북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우겨왔다. 하지만 1994년부터 중앙일보가 입수 보도한 북한점령군 사령관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9월폭동에 일화 200만엔, 대구폭동에 300만엔을 소련이 지원했다. 이로 인해 좌익들은 감히 이 두 개의 역사를 뒤집지 못한다.

 

대법원은 하나인가 두 개인가?

 

대법원장 이용훈은 2007년 1월,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과거의 판사들의 양심을 믿을 수 없고, 수사관-검사들이 대통령들 졸개가 되어 고문과 조작을 통해 없는 사건을 만들거나 별거 아닌 사건을 침소봉대했다는 것이다.

5.18사건에도 두 개의 판결이 있다. 1980년의 판결과 1997년의 판결이다. 필자는 18만쪽의 수사기록과 수천쪽의 북한 자료를 연구하여 1980년의 판결이 옳다는 결론을 냈다. 대법원은 역사를 쓰는 곳이 아니다. 대법원의 판결도 역사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학림 사건, 조봉암 사건 등 22개 사건에도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 필자는 모든 사건을 다 분석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조봉암 사건은 2007년 1월의 판결이 틀리고 당시의 판결이 옳다.

조봉암은 그를 포섭한 간첩 박정화와 함께, 그리고 김구를 포섭한 간첩 성시백과 함께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돼 있다. 북한 책에 의하면 그는 김일성에 충성편지를 보냈고, 북한에서 조봉암은 수많은 인물록에 소개될 만큼 애국서열 상위에 랭킹돼 있다. 하지만 2010년 11월, 대법원장 이용훈은 스스로 일선에 나서서 이승만을 역도로, 조봉암은 애국자로 분위기를 몰고 가면서 과거 판결을 뒤집었다.

 

판사의 양심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판사들은 양심이 없는 판사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은 일고의 가치가 없고, 민주화시대의 판사들의 양심만 옳다는 현 여론의 추세는 참으로 당혹스럽고 불길하다. 필자는 민주화 시대의 판사들을 매우 불신한다. 그들 중에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빨갱이로 제조된 판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22개 사건을 재심으로 일거에 뒤집은 이용훈을 빨갱이라고 생각한다.

제주4.3사건도 뒤집으려 했다. 하지만 저들은 차마 재심을 하지 못했다. 여-순반란사건도 뒤집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는 저들에게도 부담이 되었나 보다. 그 대신 노무현-박원순-고건이 나서서 ‘정부보고서’를 허위로 만들어 4.3사건을 통일운동의 역사요 민주화역사라고 정의했다.

빨갱이들은 대법원이 두 개라는 박근혜의 발언에 마녀사냥식의 공격을 해대지만(특히 이해찬) 제2차 인혁당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분명 두 개 있다. 제1차 인혁당과 제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돈한다고 의심하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이 무죄가 될 수 없다는 증언은 바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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