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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시사.

바른 생활정신을 가르치는 가나안 농군학교

by 설렘심목 2012. 3. 1.

가나안 농군학교

 

양치질에 치약 3㎜, 비누는 3번만 문질러… 낭비는 죄악"

박정희 ‘새마을운동’ 에 영향
“내가 혁명한 이유 중에 많은 것을 선생님이 이뤘다”
“밥 한 그릇에 쌀 5000알 5000만명이 한 알씩 버리면 만명이 먹을 양 버리는 것”

경기도 하남시의 번화한 대로에서 골목길로 들어서자 '가나안농군학교'가 나왔다. 정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어 기둥 두 개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량한 운동장, 낡은 벽돌건물, '정신 개척' '조국이여 안심하라' 등의 구호, 구석에 널린 연탄재… 내 기억의 60년대식 풍경이었다.

"한때 우리 학교에 입소하려면 일년을 기다렸어요. 세월이 바뀌고, 먹고살 만해지니까 인기가 시들했어요. IMF 때 결정적으로 확 떨어졌어요. 연초(年初)에나 날이 추우면 들어오려는 학생이 없어요. 옛날에 비해 '천국'인데도 다들 어렵다고 해요."

파란 '재건복' 차림의 김평일(70)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은 비좁은 사무실에 있었다. 그 사무실은 50년 전 이 학교가 만들어질 때 지어진 그대로였다. 바깥에서는 시간이 잘 흐르다가 여기만 들어오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운동장 한쪽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고 새긴 돌이 보였다.

김평일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은 "개발한다고 다 밀어버리니 젊은이들에게 역사성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밥 한끼 먹으려면 얼마나 일해야 합니까?

"반드시 4시간은 일해야 먹습니다. 땅 파는 것만이 일이 아니고, 학생은 공부하고, 상인은 장사하고, 글쓰는 사람은 글 쓰는 게 일이지요."

―살 빼려고 돈들여 굶는 세상인데, 일하기 싫으면 굶긴다고 겁주는 군요(웃음).

"아버님(김용기 장로·1908~1988)이 농군학교를 설립하던 시절에는 먹는 문제가 가장 절박했죠. 아버님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 '나다, 먹다, 죽다'라고 정의했지요. 인간으로 '나서' 의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먹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죽는' 것이라는 거죠."

―식사 기도에서 "일하기 위해 먹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는 구호를 외쳤다면서요.

"이건 가나안농군학교의 변치 않는 정신입니다. 지금은 여기에다 '효도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는 구호도 합니다."

김용기 장로의 생전 모습.
―1962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여길 방문해 점심을 먹을 때도 이 구호 제창을 '강요'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최고위원 30명과 함께 오셨어요. 삶은 감자와 빵이 나왔는데, 박 전 대통령이 별 생각 없이 빵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물었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각하는 3천만 백성의 어버이지만 이 학교에서는 내가 그렇다. 여기서는 먹기 전에 식사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했지요. 박 전 대통령이 물었던 빵을 딱 내려놓고 '그러시냐'고 했습니다. 아버님의 기도가 끝난 뒤 함께 구호를 제창했어요."

―박 의장은 왜 농군학교에 찾아온 겁니까?

"주위에서 가나안학교 김용기 장로를 한번 만나보라는 말을 들었겠지요. 5·16을 일으키고 1년도 안 됐을 때였습니다. 아버님께 '이 못사는 나라를 잘살게 하기 위해 혁명을 했다. 내가 혁명을 일으킨 이유 중에 많은 것을 선생님이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군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국민 의식을 개조시키려는 '국민운동본부'를 우리 학교에 뒀어요. 그게 새마을운동의 전신(前身)인 셈입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아버님께 '새마을교육 연수원'을 맡아달라고도 했습니다."

―선친께서는 먹는 문제의 엄격함 말고도 '절약'으로 유명한데.

"아버님은 '무엇이 죄악인가. 한쪽에서 굶어죽는데도 다른 쪽에서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풍요롭다고 하지만, 세계 전체를 보면 인구 절반이 먹을 것을 걱정합니다. 1분에 34명, 1일에 5만명, 1년에 1800만명이 굶어죽고 있어요."

―여기서는 먹는 밥알의 숫자까지 따진다면서요.

"밥 한 그릇에 쌀 5000알이 담깁니다. 5000만명이 한 알씩 버리면 만명이 먹을 양입니다. 한 숟가락이면 125만명이 먹을 양을 버리는 겁니다."

―건강 전도사 중에는 '억지로 다 먹지마라, 마지막 숟가락은 남겨라'고 조언하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에는 밥과 국, 3 찬(饌)이 나오죠. 적당하게 줘서 남기지 않게 하는 겁니다. 절약이란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는 것이 아니라, 알맞게 적당하게 필요한 만큼 쓰는 겁니다. 낭비하지 않으면 그 남은 돈으로 다른 데 쓸 수 있지요. 남을 위해서 쓸 수 있으면 또 얼마나 좋습니까."

―입소생이 밥을 남기면 어떤 벌을 받습니까?

"운동장에 나가 '정신 개척, 정신 개척' 외치며 뛰어야 합니다. 입소생에게만 그렇지, 손님에게 그러지는 않습니다(웃음)."

―교장 선생님도 혹시 밥을 남겨 뛰어본 적 있습니까?

"저는 출생하면서부터 그렇게 교육받아 왔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남기지 않는 것, 낭비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됐어요."

고(故) 일가 김용기 장로의 시대정신이 깃든, 개척정신의 요람이자 가나안의 발상지인 '가나안농군학교'의 김평일 교장이 21일 가나안농군학교의 정신에 대해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흐르는 시냇물을 대야 한 가득 떠서 세수를 하다가 '물 낭비한다'고 선친께 야단맞았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웃음) 그건 다 덧붙여진 얘기고. 하지만 이치는 맞습니다. 수돗물은 계량기가 막 돌아가니까 자기 수도세를 덜 내려고 아끼죠. 하지만 개울물과 강물은 자기 돈 안 낸다고 귀한 줄 모르고 막 써요."

―물 사용에서도 규정이 있습니까?

"손 닦으려면 세면대의 3분의 1, 세수는 절반, 머리까지 감으면 세면대 한 분량입니다."

―학교 세면장에 가보니 '치약은 3㎜. 비누는 남자 3번, 여자 4번만 문지르자'고 붙어있더군요,

"어찌보면 쩨쩨하죠. 요즘 치약 한갑이 1000~2000원밖에 안 되는데, 그걸 다 썼다고 가난해지지도, 안 쓴다고 부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습관이지요.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적당하게 써야 된다는 거죠."

―양치질 한 번에 치약 3㎜가 적당하다는 객관적 근거가 있습니까?

"무엇이 적당하냐, 우리 아버님이 다 경험하고 정한 겁니다. 치약을 3㎜만 묻히면 너무 적어 충치가 생길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게 평생 닦아온 내 이(齒)가 참 좋아요. 치과에 가면 이만큼은 40대라고 합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전후(戰後)인 1954년 농장에서 출발했다. 김용기 장로는 이곳 야산 1만3000여평을 매입해 가족·친지 등 28여명과 함께 개간했다. 삽과 곡괭이만으로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노역을 했다고 한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했어요.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어릴 때는 일도 하기 싫고 몸도 힘들었지만, 감히 아버님께 거역할 수 없었어요. 우리 농장의 수확량이 좋아 주위에서 영농방식을 배우러 왔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1962년 2월 농군학교를 세운 겁니다. 빈곤을 물리치는 '농군(農軍)'을 육성하자는 취지였어요. 꼭 50년 전이죠."

―어려서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비행접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내심 비행접시를 찍으면 돈도 벌고 유명해질 텐데 했어요. 아버님께 사진기를 사달라고 했어요. 어느 날 아버님이 서울에 다녀오시더니 사진기를 사오셨어요. 그 엄격한 아버님이…. 나는 여길 벗어나지 못하는 대신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장성한 뒤로 무비카메라를 사서 3분30초짜리 기록물을 더러 찍기도 했어요. 내 손으로 직접 가나안농군학교 기록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은 여전해요. 아버님을 대역할 배우로는 이순재씨가 비슷해요. 어머님은 황정순씨가 어울리고."

―농군학교를 떠나 산 적은 없었습니까?

"우리가 삼형제인데, 큰형(가나안농군학교 이사장)과 작은형(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은 도망갔다가 돌아왔어요. 나도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어느 날 저녁을 먹은 뒤 부모님이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 보따리를 챙겼어요. 문을 열고 나서는데 '내가 지금 도망가야 되느냐. 우리 아버지 엄마가 가슴 아파할 텐데'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결국 문을 닫고 들어왔어요. 군대 생활을 한 것을 빼면 여기를 떠나지 못했어요."

―그렇게 바깥 세상을 모르니 여전히 근검·절약·개척 정신을 고수하는 것이군요(웃음).

"세상의 좋은 맛을 못 봤으니 제가 우물 안 개구리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지. 잘사는 친구의 고급아파트에 가봐도 부러운 것이 없어요. 춥지 않으면 되지 집에 더 바라는 게 없어요. 현재 우리 식구는 아버님이 생전에 사셨던 소 외양간을 고친 방 두칸짜리 집에서 살고 있어요."

―이야말로 세습(世襲)이군요(웃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누가 이 학교를 맡고 싶어하면 당장 넘겨주고 싶어요. 나도 인간인데, 평생 이 일을 했잖아요. 돌아다니고 싶고 놀고도 싶고, 하지만 맡을 사람이 없어요."

―저 같은 사람은 자격 미달입니까?

"오시면 좋겠네요. 다만 '소비가 미덕이다'고 여기는 사람이 오면 안 되죠. 과거에 아버님이 치약 만드는 회사에 강의를 간 적이 있어요. 치약 3㎜만 쓰자고 했으니, 한 번 하고는 다시는 안 불렀어요."

―인생에는 가지 않은 길이 있지요. 선생님은 가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도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지는 못해요. 인간이기에 욕망이 없을 순 없지요.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살아온 삶을 후회는 안 해요."

―선생님이 그랬듯이, 아들(40)에게도 이 농군학교를 대물림할 겁니까?

"사실 아들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어요. IMF가 터지고 교육생이 끊겼어요. 한번은 내가 국제전화로 '요즘 학교가 이렇게 어려워졌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를 돕겠다며 왔어요. 그 뒤로 12년째 이곳 교사로 있어요."

―아들은 혹 이해할지 몰라도, 며느리와 손자는 선생님의 방식을 보면 "답답한 구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 집사람이나 형수는 시집올 때 시험을 봤습니다. 여기서 적응할 수 있을지 미리 6개월간 실습을 시켰어요. 그리고 자기 의사로 왔기 때문에 불만이 없어요. 며느리는 그런 시험을 안 봤지만, 여기가 어떻다는 걸 알지요."

가나안농군학교에는 지금껏 70만여명이 입소교육(2박3일간)을 받았다. 작년에는 5000여명이 입소했다. 숙소의 방마다 12명이 입실한다. 옛날 여인숙과 비슷하다. 여인숙에는 침대가 없다. 최근에 와서 좋아진 것은 에어콘이 설치된 것뿐이다.

"입소생들이 오면 '너희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런 곳에서 공부하고 일해서 오늘을 일구었다. 너희들은 다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 우리 강사들이 더 가르쳐 줄 것은 없다. 여기서는 자신을 돌아보면 된다. 이 좋은 시대에 살면서 국가와 사회, 가정, 직장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했느냐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교육 강도가 좀 후퇴했지요?

"후퇴라기보다 시대에 맞게 좀 달라졌죠. 아버님 계실 때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 비싼 수입품이었으니까요. 농사지은 결명자로 차를 끓여 마셨어요. 지금은 커피가 일반 음료수니, 커피를 한쪽에 놔둡니다. 딱 그 정도의 변화죠."

진짜 변화는 바깥에서 온다. 그린벨트에 쭉 묶여 있었던 이 가나안농군학교가 '보금자리주택지구'에 포함됐다. 학교는 경기도 양평군으로 이사 가게 된다. 역사적 장소에는 장차 보금자리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그는 "개발한다고 다 밀어버리니까 젊은이들에게 역사성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홀로 한탄했다.

교정에는 산소통으로 만든 '개척 종'이 있다. 깨지고 부서져 다섯 번째 교체된 종이다. 새벽 5시면 그가 직접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