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구 홈페이지에 있는 그레이스님의 게시글을 다시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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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많은 사이트에 이 글을 퍼나르십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월간조선 2005년 01월호 특별기고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386 主思派는 통전부의 정규군.우리는 金大中을「수령님의 戰士」라고 불렀다』
『金正日 지령하에 통전부-親北단체-남한 정권이 三位一體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對北지원은 對南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盧武鉉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金正日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核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金正日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金正日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對南공작부서의 원조이다.
左右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南北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金日成은 1948년 10월10일 黨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對南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他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金日成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對南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駐韓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金正日이 통전부 지휘
그런 의도에서 출발하여 종전에 있던 「조국평화통일서기국」, 「남조선문제연구소」, 「평양주재 한국민주전선대표부」,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조총련결성준비위원회」를 통합하고 여기에 101연락소, 26연락소, 813연락소, 310연락소 등을 신설·포함시켜 북한 노동당에는 「통전부」라는 독립 부서가 생기게 됐다.
뿐만 아니라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최고 실권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모든 행정·인사 결정권은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이 얼마나 집요한가 하는 것은 현재 노동당 안에 對南공작부서만 해도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라자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金日成 권력으로 북한이 움직여질 때는 허봉학, 김중린, 허담 순서로 對南사업 담당비서가 對南공작부서들을 총괄하였다. 물론 그때도 중요 비준은 金日成이 하였다. 하지만 黨內에서 수령 계승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권력이양의 일환으로 金正日이 黨선전부, 黨조직부 사업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對南공작부서의 행정 및 인사 결정권도 對南사업 담당비서 중심제가 아닌 金正日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더욱이 통전부는 다른 부서들처럼 철저히 군사적 은밀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화라는 합법성 측면도 있어 對外통일방침 관리상 당적 지도력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통전부만은 최고 실력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1994년 5월10일 통전부 산하에 건물도 사업구성원도 없는 간판만의 「조선 아태 평화위원회」를 내오고 對南사업 담당비서 김용순을 위원장으로 발표한 것도 金正日의 이러한 모략정치 이면을 가리고 아울러 평시에는 발톱을 보이지 않는 포악 동물 본성의 통전부 이미지를 미화분식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反민족·反통일의 원흉 金正日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對南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세계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략적 주동성을 잃지 않을 만큼 통전부의 수완은 참으로 완벽하다. 그들이 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親北(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金正日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金大中은 수령님의 戰士」
金正日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頂上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金日成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金正日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金正日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金大中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頂上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金大中을 「수령님의 戰士(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戰士」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金大中,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金大中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金日成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일본·유럽∇南亞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金大中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對南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對南공작의 제1과제를 反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左派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金日成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朴正熙(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金大中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朴正熙가 암살된 후 金大中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남북 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金日成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朴正熙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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