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콘스탄틴 황제는 어떤 인물인가?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쿨로루스(Constantius Chlorus)는 서방대제인 막시미안(Maximian)의 부제였다.
클로루스는 헬라의 여인이며 여관집 딸인 헬레나(Helena)와의 사이에서 아들 콘스탄틴(Constantine)을 AD 272년에 얻게 된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성장할 때 아버지 클로루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헬레나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클로루스는 대제 막심미안의 딸인 데오도렛(Theodoret)과 재혼을 한다. 그런데 그녀 역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데 콘스탄틴 자신은 모친들의 신앙적 감화보다는 부친의 영향으로 막강한 군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차후에 대권을 장악하면 기독교를 통한 국가발전에 도움 받을 생각을 할 정도로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정직한 무리이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이들이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강하므로 그것을 황제를 향한 충성심으로 선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특히, 그가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적장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이 전해져 온다. 즉 콘스탄틴이 꿈속에서 기독교 상징(모노그램)을 병사들이 방패와 군기에 부착하면 승리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콘스탄틴의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역사는 말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태양신도 섬기고, 기독교인들을 이용한 것을 보면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 동안 침례를 받지 않다가 드디어 화급한 나머지 죽기 직전에 임종세례를 받게 된다(AD337).
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장자를 죽이고 그의 처도 죽이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등 단점도 많았으나, 정치적 역량은 대단하여 놀라운 공적들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업적을 구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콘스탄티노플의 건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30년에 로마의 수도를 옮겨 그리스 비잔틴에다 ‘새로운 로마’(New Rome)인 ‘콘스탄틴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일이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가 될만한 곳이고,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해역의 요충지에다. 그의 사령부를 설치할 필요를 느꼈다. 그 당시 상황은 이 같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 너무 좁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새 평야에 성벽을 쌓아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2) 각종 악법의 개정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십자가형 제도를 폐지하고 검투제도를 금하였다. 또 축첩과 간음을 엄금하고 이혼권을 제한시켰다. 또 부인에게도 재산소유권을 부여하며 각종 여성보호법도 제정했다. 그리고 이마에 인두로 낙인하는 법을 없게 했다.
(3) 일요일의 제정
일요일을 정하여 농부 외에는 모든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일요일에는 군대훈련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교회재산 관리법을 정하여 교회에서의 기부금을 공인하도록 하였다.
(4)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도 박해정책을 쓰지 않았다. 타 종교에서 실시하는 의식중에 불결하거나 잔혹한 것은 금하였다.
(5)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이거나 또는 자기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려고 독특하게 지은 교회 건물들이 남아있다. 소위 ‘바실리카’(Basilica)라 불리우는 직사각형 건물양식이 있었다. 이 바실리카 건물의 특징은 기독교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자이크’(Mosaic) 양식등이 그것이다.
'오직예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군가 당신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면? (0) | 2011.03.12 |
---|---|
사랑으로 품을 때 변화되고 해결되고 치유된다 - 전인성장쎈터 (0) | 2011.03.12 |
교회신문, 주보 활용자료 -1 (0) | 2011.03.11 |
[스크랩] Re:한국에 들어온 오일머니와 이슬람 금융 (0) | 2011.03.08 |
깨끗하게 비워 둔 그릇 (0) | 201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