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사람, 광주 교회의 최초 장로, 광주 출신 최초 목사,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민족운동가, 별세하였을 때 광주뿐 아니라 전국의 문둥병환자, 결핵환자, 걸인 수백 명이 몰려 와 “아버지가 가시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하고 울면서 상여를 끌었던 전설적인 사회사업가!” 최홍종 목사님의 경력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부터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 욱하는 성질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1904년 광주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 양림동 언덕, 어린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던 ‘애장터’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최홍종은 욱하는 성질에 “도대체 어떤 족속인지 알아나 보자”하는 생각에서 선교사 집을 찾아갔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고, 선교사 일을 도와주며 돈이나 벌고 출세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러 1909년, 광주 선교 개척자 ‘오웬’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선교사들은 급히 목포에 있던 의료 선교사 ‘포사이드’에게 연락했고, 선교사들의 부탁을 받은 최홍종은 포사이드를 안내하여 광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걸인을 만났습니다. 그냥 걸인이 아니라 문둥병에 걸려 걷지도 못하는 여자 걸인이었습니다. 최홍종은 무의식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 걸인에게 가더니 그를 안아 자기 말에 태우고는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최홍종은 그 모습이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포사이드는 길에서 만난 문둥병 걸인을 선교부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어떻게 문둥병자와 함께 지낼 수 있느냐?”며 항의하여서 가마굴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직접 안아서 옮겼는데, 그 순간 환자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쳤습니다. 포사이드가 최홍종에게 외칩니다. “미스터 최! 그 지팡이 좀 집어 줘요.” 최홍종은 그날 끝내 지팡이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날 밤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는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였는가?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쳤는데 어떻게 그는 자식 대하듯 안을 수 있었나?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얼마 후 문둥병 환자가 죽었고, 포사이드는 목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최홍종이 답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믿음의 차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얼마 후 전라도 일대에 “양림동 양인들이 문둥병자를 데려다 치료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문둥병 환자들이 광주 양림동 언덕으로 몰려왔습니다. 이 환자들을 최홍종이 맞았습니다. 그는 무등산 골짜기에 집을 짓고 이들과 함께 살면서 치료했습니다. 한국 최초 문둥병 전문 요양원인 광주 나병원(지금의 ‘여수 애양원’)은 이렇게 출발하였습니다. 이것이 최홍종이 ‘문둥병자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내력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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