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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여수.순천)14연대 반란사건과 참상(펌&편집)

by 설렘심목 2010. 5. 25.

여순반란(叛亂)사건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이 일고 있다.

여순반란사건은 1948년 10월 19일~27일간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이 제주도 폭동 진압 파견을 거부하고, 이 지역 좌익들과 합세해 일으킨 공산(共産)폭동이다.
 
 左편향으로 운영돼 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안병욱)조차 1월8일 「국군과 경찰에 의한 일부 민간인 희생 사실을 밝혀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여순사건이 반란(叛亂)이자 공산(共産)폭동이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본질은 뒤집지 못했다.
 
 문제는 순천 지역에 설치된 각종 안내판과 위령탑. 이들 시설은,...

「여순叛亂사건」을 「여순사건」으로,

「반란군」을 「봉기군」으로,

「공산폭동」을 「진출했다」로,

「적화통일」을 「남북통일」등으로 미화(美化)해 놓았다.

또 반란군의 우익인사 학살의 원인은 외면한 채 李承晩 정부의 반란진압만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라는 단체가 순천시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협조로 순천역 앞에 설립한 안내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순사건 : 1948년 10월 19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 경비대 제 14연대 군인들이
「여순 사건」 을 일으켰다. 2천여 명의 병력을 규합하였다. 봉기군 지도부는 「제주 출동거부, 남북통일, 경찰타도」등을 주장하며, 여수 읍내를 점령 하였다.

 이들은 정부 수립직후 민생고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과 학생. 현지 좌익 세력과 합세하여 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 등 전남 동부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정부는 광주에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월 23일에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진압하였다.
 
 진압군경과 우익 세력들은 봉기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했던 사람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손가락 총」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무고한 민간의 희생자를 발생 시켰다. 「여순사건」 과 관련된 희생자는 경찰·군인·민간인을 포함하여 모두 1만여 명에 이른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빌미삼아 반공국가 체재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의 명칭조차 의견이 다양하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생명의 존엄성이
유린된 역사적 상처를 참된 지혜로써 평화와 화해 민족의 통일로 극복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순사건 관련지 - 순천역 :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한
첫 번째 지역이었다. 통근 열차와 차량에 나누어 탄 1천여 명의 봉기군은 1948년 10월 20일 09시 30분 경 수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중대 병력의 합류로 더욱 사기가 올라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배치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 시내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순천역은 여순 사건 봉기군의 확산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순천역 공격의 중요 거점이었다. 현재의 역 건물은 960년에 세워진 것이므로 여순사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장소는 그대로이다.》
 
 2006년 4월 소위 시민들이 정부의 협조로 순천공원에 세웠다는'여순사건 위령탑'
은 여순반란사건이 「자본과 제국의 침탈에 저항했던 사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탑에 각인된 글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0월 19일의 새벽을 기억하고, 당시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 지역 일대의 죽음과 절망들이 왜곡된 세월에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과 제국의 침탈에 저항했던 사건으로서 오늘을 인권과 평화, 통일로 가는 살아있는 역사로 남기기 위해서 순천시민의 정성어린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위령탑과 해설문에 기술된 내용은 역사적 사실(史實)을 왜곡한 것이다.
1948년 당시 반란군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뒤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顚覆)과 공산통일을 기도했었다. 반란군 주동자 지창수는 인민군의 남침을 말하면서 인민군과 호응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반란군은 1948년 10월20일 오후 3시 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열린 인민대회에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선언한다.』는 등

6개 항의 결정서를 채택하기도 했었다.
 
 반란군 진압 이후 부역자 색출·처형 과정에서 국가에 의한 폭력과 보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 가해자는 반란군이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첫날에만 무려 400여 명에 이르는 군경(軍警) 및 가족 등을 학살했다. 완전한 진압이 될 때까지 약 6개월 간 소위「반동분자 숙청」을 이유로 우익인사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현재 순천 지역에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관련 시설물은 反국가적 편파성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진실은 좌경적 사관(史觀)에 가려져 있다.
 
 사진을 제보한 정재학 시인(교사)은 『이 같은 시설물들이 자유대한민국 안에
버젓하게 서 있다는 것은, 지금 여수와 순천이 어떠한가를 비유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며 『이 심각한 실상을 알리고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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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태(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미군정 치하에 있던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 한국사).

이 사건의 발생 배경은 1945년 이후 좌우익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8·15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세력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그중에는 혁명적 좌익성향의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우파 세력이 강화되어 사회주의자들과 이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제주도에서 이러한 갈등은 1947년 3·1절 기념집회 과정에서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제주도에 침투, 암약하던 남조선노동당의 사주에 의해 제주도민들과 미군정 및 우파 세력 사이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갈등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탄압에 대항하여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한 사람들에 편승한 좌익계는 폭력적 탄압 중지, 단독선거 반대, 단독정부 반대, 민족통일, 미군정 반대, 민족독립 등의 정치적 구호를 내세웠다. 사건 초기에 미군정은 경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진압했다. 그 결과 진압과정에서 약 28만 명의 도민들 중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포함, 약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사건은 발발 1년여 만인 1949년 봄에 종결되었다. 사건 종결 후 6·25전쟁을 거쳐 남북분단이 심화되면서 이 사건은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한국 내 민주화의 진전과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학계와 지역 주민에 의한 역사적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2000년 1월 국회에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피해자 접수 신고 및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사건 발생 후 정부가 희생자를 공식 집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2000년 6월부터 시작된 희생자 신고 접수결과 최종 1만 3,571명이 신고되었는데 이 숫자는 1948년 당시 제주도 내 인구 약 28만 명의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희생자를 유형별로 보면 사망자가 1만 379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행방불명 3,053명, 후유장애자 139명으로 집계되었다. 가해자별 분류에서는 군·경 토벌대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이 1만 1,170명(82.3%)으로 가장 많아 당시 진압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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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19일)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가 일으킨 사건.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으로 제주 4·3사태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등지까지 무력점거를 확산시킨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사태가 확산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다. 이에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19일 저녁 8시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전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다.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초기 진압작전에서 반란군에게 밀리자 정부는 여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 설치한 반군토벌전투사령부의 지휘로 제2여단, 제5여단 예하의 5개 연대를 투입, 소탕작전을 벌여 나갔다. 이들 정부군은 결국 미국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박격포 등을 동원해 여순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비록 미군의 협조로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으며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反)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이 사건 이후 대한군사지원을 훨씬 강화했고 주한미군철수를 1949년 6월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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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출동을 명받은 국군 14연대의 1대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이하 40여명의 좌익분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3명의 대대장이하 장교 22명 포함해서 40여명의 영내 군인들을 죽이고 미리 내통해둔 여수시내 600여명의 남로당 분자들과 여수를  장악한 이들은 남로당의 비밀 지시로 역시 남로당 비밀조직원이었던 김지회 중위가 지휘권을 잡고 열차편으로 북상해서 같은 비밀 남로당원인 홍순석이 지휘하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까지도 접수했다.

반란군은 며칠 사이에 경찰관 공무원 우익인사들 800여명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반란군을 토벌한 국군과 경찰들의 보복적 살상도 극심해서 무고한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되었다. 이 반란사건을 기회로 국군의 숙정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서 군내의 좌익계 인사가 다량 검거되고 처형되었다.

이들은 국군의 반격으로 10월23일 순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된 뒤 대부분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공비가 되었다.

지창수는 벌교 토벌 단계에서 일찌감치 사살 되고 김지회 홍순석등은 국군의 토벌에 쫓기며 지리산과 덕유산등을 전전하다가 다음해 4월 지리산 입구에서 사살 당했다.

<당시 남로당소속이었던 박정희소령은 모든 군대내 남로당조직을 정보장교에게 알리고 활동이 비교적 없었던 점을 들어 숙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

6.25 사변이라는 국난을 앞두고 군내에서 좌익계를 소탕해서 다행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좌익분자들에게 학살당한 우익인사 가족들의 통한이나 국군 소탕전에서 억울하게 죽은 유가족들의 슬픔 역시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민족 갈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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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반란사건의 역사절 의미고찰

 

건국 60주년 특별기획
남로당 조직원 주동 … 대중 봉기 이어져
박정희 포함 군대 내 좌익 대대적 숙청

1948년 10월 19일 한반도 남쪽의 항구 도시 여수. 이곳에 주둔했던 육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무장 봉기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이른바 ‘여수·순천10·19사건’이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신생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받은 충격은 막대했다. 국가를 보위해야 할 군인들이 총부리를 돌린 ‘무장 반란’이란 점에서, 정부 수립 이전에 있었던 다른 단선·단정 반대운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군대는 좌파 세력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여순사건의 핵심 주동자인 지창수·김지회 등은 남로당 조직원이었다. 군인들의 반란은 지역 내 민간 좌파 세력에 의한 대중 봉기로 이어졌다. 19일 여수에 이어 20∼21일 사이 사건은 순천·광양·구례·곡성·보성 등 전남 동부 지역 일대로 확산됐다. 정부의 대응 차원도 달랐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됐다. 일주일 만에 여수는 함락됐다. 그러나 여수 함락이 반란의 끝은 아니었다.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의 무장봉기로 시작된 여순사건은 많은 희생자를 낳은 채 일주일 만에 진압됐다. 사진은 진압에 나선 국군이 반란군과 양민을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모습. [중앙포토]
◇신생국 정당성 흔들=10월 19일 오후 8시 지창수 등 14연대 하사관들이 회식 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고 무기고를 접수하면서 사건은 시작됐고, 20일 날이 다 새기도 전에 여수 전역으로 확산됐다. 20일 오전 1시쯤 부대를 빠져나온 군인들은 여수의 주요 관공서와 경찰서를 점령했다. 여수의 좌익 세력은 사전에 군인들의 반란 계획을 알지는 못했지만 사건 발생 후 곧바로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며 반란에 동조했다. 오후 3시 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열린 인민대회에선 다음과 같은 6개 항의 결정서가 채택됐다.

“인민위원회가 여수 지역의 행정기관을 접수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선언한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주동자나 동조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해방구가 생긴 것이겠지만 신생 독립국 정부로서는 존재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사건이었다. 사건 초기 3∼4일간 반란군 치하 지역에서 친일 협력자, 경찰, 우익 청년단원 등이 처형당했다. 정부는 21일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한 데 이어 22일에는 여수와 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으며 강력 진압작전을 펼쳤다.

◇비극의 악순환=여수 탈환 직후 진압군은 주민들을 지역 국민학교 등에 소집했다. 반란군 잔당과 좌익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자 색출·처형 과정에 비인간적 ‘국가 폭력’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좌익의 폭력에 우익의 보복폭력이 이어지는 비극의 악순환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 여수군청에 근무했던 고 김계유(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2008년 7월 19일 타계)씨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다”(‘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 부역한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별할 여유도 없이 곳곳에서 즉결 처형이 잇따랐다고 한다.

강력한 진압작전을 거치며 여수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다. 막대한 인명·재산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전남도 발표에 의하면 11월 11일 현재 여수와 순천 두 지역의 사망·행방불명자가 각각 4800명과 1953명이다. 사망·행불자가 많았던 이유를 밝혀내는 일은 역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좌익 테러와 우익 테러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보다는 짧은 기간 동안 좌익이 점령한 이후 계속 우익이 점령했다는 점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죽임을 당한 이들에겐 ‘빨갱이(공산주의자)’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유족들에겐 연좌제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각인시켰다. 여순사건 연구로 첫 박사 학위를 받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를 민족에서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중요한 계기였다”며 “반공으로 무장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됐다”고 설명했다.

◇국가보안법 등장=국가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은 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 49년 11월 계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강화하고 분산돼 있던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는 한편 학도호국단을 창설해 반공교육을 강화했다. 여순사건 이후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사건은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미군 철수와 한국 정부 수립 계획이 구체화하면서 주한미군은 48년 초부터 한국군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했고, 이 와중에 병력 지원자에 대한 면밀한 조회 없이 좌익 청년들을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 여순사건의 여파는 군대 내 좌파의 숙청으로 이어지며 4800여 명을 솎아 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군번 1번부터 100번까지의 최고급 장교 중 약 4분의 1이 좌파 혐의로 숙청됐다. 숙군 대상자 가운데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육사 2기 박정희도 포함돼 있었다. 육사 6기는 281명 가운데 60명이 숙청됐다.

여순사건 없이 6·25전쟁이 발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안보 기반을 단단히 하는 계기가 됐다. 48년 말로 예정됐던 미군 철수도 49년 6월로 연기됐다. “미·소 양군 철퇴하라”는 주장이 반란군의 구호 속에 포함돼 있음을 상기하면 이 또한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당성에 도전했던 사건이 가져온 역설적 결과였다.

◇도움말 주신 분=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이사장·박종길 여순사건위원회 위원장· 이오성 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편사연구사,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 연세대 박명림 교수, 건국대 신복룡 석좌교수,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

특별취재팀 = 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출처] 여순반란사건의 역사적 의미|작성자 kdj8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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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사회, 공산주의 C (여순반란 사건) : 자유구국운동의 승리를 위하여>

구국결사대의 맑은샘.  자료출처, 글쓴이 : Convic

당시 진압군에 붙잡힌 반란 가담자들

A : <`여순반란 사건(10.19사건)` 의 전사적 고찰>

최근 일부 계층에서는 8.15 광복 직후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무정부적(無政府的) 반란(叛亂)과 폭동(暴動)을 특별법(特別法)을 만들어서라도 민중항쟁(民衆抗爭)으로 그 성격을 바꾸고 이를 진압한 군.경을 피해자 입장만 고려한 체 양민학살자로 매도 하려는 주장이 활발히 전개 되고 있다.

현대사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군관련사건(軍關聯事件)의 진상규명 노력은 크게환영하는 바이나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는 일부 <좌경성향의 민중운동논자들>이 있어 사상적 혼미(昏迷)의 원인을 제공하고 국가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모독을 주는 등 우리 사회에 큰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또한 이들은 당시 발생한 사건의 원인이 <민족,민주,통일>에 있다고 호도(糊塗)하고 이는 자생적 민중운동(自生的民衆運動)으로서 진정한 해방과 통일을 위한 민족적 항쟁이며 민족통일운동이라 고 미화 하고 있다. 그러나 여순반란 사건이 절대로 (자생적 민중운동(自生的民衆運動))이 아닌 것은 이 사건의 배경과 발발에 당시 <남로당 프락치>가 개입,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런 좌경 일변도의 모순된 발상과 주장이 횡행(橫行)하고 있는지 국가정체성 훼손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지구촌은 국경을 초월한 세계화.국제화의 커다란 용틀임 속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 이념도 과거 적대 관계도 모두 버리고 동분서주하는 현시점에서, 지나간 우리 역사의 단면만을 깨내어 좌익만이 애국자요 통일의 기수로 변한단 말인가? 이것은 심대한 역사왜곡일 뿐이다.

우리는 광복이후 혼란과 격동 속에서도 피와 땀과 수많은 고통을 이겨 내면서 이나라를 이렇게 나마 이끌어온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국기(國基)에 기반을 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나라의 진정한 미래를 위하여 총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며 과거 우리역사의 일부 단면만 가지고 국력을 소모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최근 범람하고 있는 잘못된 역사 왜곡을 바로 잡기위해 군(軍) 관련사건의 일부인 여.순 반란사건에 대한 전사적(戰史的) 고찰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1. 事件發生의 背景
여.순 10.19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중인 육군 제14연대내의 <남로당 요원 40여명이 주동>이 되어 제주도 폭동 진압 차 출동하는 부대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지방좌익세력이 가담하게 되어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면서 여수.순천 일대를 공산천하로 돌변시킨 건군사상 그 유례가 없는 군대의 반란사건이었다.

가. (南勞黨의 軍內 浸透工作)
(김남식,실록 남로당(하),신현실사,1975,pp. 447-450)
여.순10.19사건의 주동자는 남로당의 연대조직책인 지창수(연대인사계, 상사) 였다.
그러면 여기서 남로당원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군내부에 침투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광복후 공산당은 좌익의 무장력으로 조직된 "국군준비대(國軍準備隊)를 장차 "인민공화국"의 정규군으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청내 "국방사령부"가 설치되고 1946년 1월 15일 동 사령부 예하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미 군정청은 1946년 1월 21일부로 모든 사설 군사단체를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군준비대"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남로당에서는 국방경비대에 대한 침투공작을 시작하였다.
당시 경비대는 모병시 신원조사를 통한 사상과 신원조회가 없었음으로 좌익청년들이 얼마든지 잠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비대의 사병들은 대부분 빈농(貧農)출신으로 광복 후 득세했던 좌익투쟁에 가담했던 층이 많았다. 또한 이들은 소도시나 농촌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서 추적당하게 되면 경비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단 입대하면 경찰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당시 경비대의 사병 층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남로당은 1차적인 공격대상을 경찰에 두고 경비대원들과 반목대립(反目對立)을 조성하여 폭력적인 정치투쟁을 전개 하려고 하였다.
남로당에서는 군 장교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로 사관학교 내에 이미 침투하였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서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무조건 입교시키는 경우와 이미 임관된 장교로 지인(知人), 동창(同窓), 혈연(血緣), 지연(地緣)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포섭하였다.

그럼 여기서 제14연대의 경우 어떻게 좌익계열이 침투되었는가를 알아본다.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는 도당부(道黨部)에 군사부(軍事部)를 설치하고 군(軍)과 야산대(野山隊) 공작을 관활하고 있었는데 도당군사부에서 광주(光州), 목포(木浦)를 비롯한 각 시.군당 군사부에 사병추천 지시를 하달하면 이들은 면.리까지 다시 지시를 하여 입대자 명단을 받아 도당 군사부에 제출한다. 도당에서는 이 명단을 제14연대공작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조직책(일명, 오르그) 박태남(朴泰南)에게 주고, 박(朴)은 제14연대 연대 조직책인 연대인사계 지창수 상사에게 지시하여 대대, 중대, 소대로 배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대 인사계에 대한 침투 및 포섭공작이 무엇보다 선행(先行)되어야 하며 제14연대의 경우 약 반수의 사병이 전남도당에 의해서 침투되었다고 한다. (김남식, 위의책, p 449)

나. (第14聯隊의 創設과 左翼勢力)
여.순반란을 일으킨 제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광주주둔 제4연대에서 차출된 기간요원 50명으로 전남 여수읍 신월리(新月里, 전 일본해군 항공기지)에서 창설되었으며 광주의 제4여단에 예속되었다. 초대연대장에는 이영순(李永純 일본군 해군중위 출신)소령이 보임되었다.

5월 14일 제4연대 제3대대 안영길(安永吉) 대위(육사1기) 이하 1개 대대 병력이 편입되었으며 6월 1일에 제5여단에 예속이 변경되었다. 사건당시 연대장은 제4대로써 10월 7일 보임한 박승훈(朴勝薰) 중령(일본육사 제26기출신) 이었다.(육군본부, 창군전사, 육군인쇄공창, 1980년, p373)
연대 창설 당시 정세(情勢)는 1개월 전에 제주도에서 4.3폭동사건이 일어났고, 5.10선거 반대투쟁이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음으로 남로당의 침투공작은 기성연대보다 훨씬 용이했다.

또한 제4연대에서 떨어져 나온 1개 대대 병력 중에는 많은 좌익분자들이 들어있었다.
대대장인 안영길 대위도 좌익분자로써 후에 숙군대상이 되었다.( 김남식, 위의책, p 450)
이러한 제14연대의 병력구성으로 보았을 때 언제든지 동기나 명분만 있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음산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한편 남로당은 제주도의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않는 상태에서 군.경 토벌부대에 의해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던 중에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폭동 진압차 제주도로 출동하게 되었다는 기밀을 탐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을 저지시키고 이 부대를 역으로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고 장차 전국 각 부대의 조직책(組織責)에게도 같은 내용의 지령을 내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년, p 31 육군본부, 공비연혁, 1971년, p202)

이에 따라 남로당 군부적화 특별공작 최고 책임자인 이재복의 지령으로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주동)이 되고 동 연대 (김지회 중위(육사 3기, 대전차포중대장))(홍순석 중위(육사3기, 순천 주둔부대 중대장))가 반란이 일어난 이후부터 지휘관으로서 행동하기로 모의하였던 것이다.


2. 事件의 發生과 진압작전

가. (事件의 發生과 叛亂 狀況)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는 1개 대대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증원 차 출동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선적(船積)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저녁에는 출동대대의 환송을 겸한 회식이 장교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지창수 일당은 이때에 거사하기로 기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뒤로 미루었다.

19:00시경 회식이 끝나고 연대장이하 참모들은 다시 여수항에 나가 선적작업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출항 예정시간은 이날 밤 24:00시였다. 연대 인사계 지창수는 김지희 중위와 다시 모의한 끝에 부대 출발 직전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제1대대는 식사 후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고, 잔류부대인 제2대대는 제1대대의 출동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지창수는 연대 좌익세포 40여명에게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게 하고 20:00시에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출동대대 병력을 연병장에 집결시켜 놓고 다음과 같은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반란에 가담하도록 선동하였다.(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위의책, p 31 육군본부, 공비연혁, p 203)
ㅇ 지금 경찰이 우리에게 쳐들어 온다. 경찰을 타도하자ㅇ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ㅇ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자ㅇ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ㅇ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지창수의 선동에 하사관 3명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지창수 일당은 이들을 즉석에서 사살하자 연병장은 순식간에 공포분위기에 휩싸이고 비상나팔에 의해 영문도 모르는 채 집합한 출동병력은 겁을 먹고 맹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창수는 "탄약고를 이미 점령해 놓았으니 각자 탄약고에 가서 실탄을 최대한 휴대하라" "장교들을 모조리 사살하라"라고 소리쳤다.

이리하여 연대병력을 반란으로 이끄는데 성공한 지창수는 자신이 해방군의 연대장임을 선언하고 여기서 그들이 계획한 대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의 반란군 지휘체계로 편성하였다. 편성이 끝나자 부대 내에 잠적(潛跡)한 장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대부분 사살하고 그들이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창고 안에 우선 구금시켰다. 재빨리 반란 행위임을 직감한 장교들은 피신을 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진압하려 나오다가 반란군에게 발견된 장교들은 거의 사살되었는데 그 수는 20여명에 달하였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구판 1권), 1967년, pp 454-455 반군에게 사살된 장교는 대대장 3명, 연대정보 및 작전주임, 그외에 중위 2명, 소위 13명 등 20여명이었다.)

연대장은 반란상황을 보고 받고 먼저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을 들여 보낸 뒤 환송 차 여수에 온 제5여단 참모장(오덕준 중령)과 함께 연대에 들어가던 중 총성이 사방에서 나고 반란군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여단 참모장과 함께 해군경비정을 타고 피신하여 목포 경유 오덕준 중령은 서울의 육군본부로 가서 진상을 보고하고, 연대장은 광주의 제5여단 본부로 들어갔다. (육군본부, 공비연혁, p 203)

반란주동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반란이 성공하자 연대부근에서 반란군과 합류하기 위해 미리 대기 중이던 (여수지구 남로당 핵심 분자 23명과 합세)하였다. 얼마 뒤에 반란군 3,000여명은 지창수의 지휘 하에 모든 차량을 동원하여 여수시내로 진출하였으며 먼저 봉산(鳳山) 지서를 습격한 후 20일 01:00시경부터 시내 도처에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200여명의 여수경찰 병력은 수 천명의 반란군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여 기세등등 해진 반란군은 여수 시내를 완전히 휩쓸고 말았다.

이때 시내에서는 좌익단체 및 학생단체 600여명이 "인민공화국 만세"와 "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치면서 반란군을 환영하였다. 반란군은 무기와 탄약을 이들에게도 분배하고 좌익단체의 선도로 20일 09:00에는 각 관공서와 은행 등 주요 공공기관을 점령하였다.
시내는 여수경찰서가 전소되고 거리에 인민대회의 포스터가 나붙었으며 "인공기(人共旗)"가 전 여수시내에 휘날렸다. 시민들은 인공기를 들고 중앙동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① 제주도 출동 절대반대②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③ 인민공화국 수립만세 등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남로당 여수 읍 당 위원회에서도 재빨리 읍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保安署)를 설치하고 10시경부터 경찰과 우익인사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김남식, 위의책, p 452)
한편 여수를 완전 장악한 반란군의 주력은 10월 20일 09:30 여수에서 열차편을 이용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무렵 순천에 주둔중인 제14연대 예하의 2개 중대는 홍순석 중위 지휘하에 여수에서 이동 중인 반란군의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의 군 반란 정보를 입수한 순천경찰서는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여수와 광양으로 연결되는 도로 길목에 경찰 1개 소대를 배치하고 순천교 제방에 경찰주력을 배치하여 반란군의 순천 진입을 저지할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조치도 반란군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 아무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광주에서 급거 출동한 제4연대의 1개 중대는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중대내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대장과 반란을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란군과 합류함으로써 반란군의 세력은 확장일로에 있었다.

이날 17:00경 반란군은 순천의 전 시가지를 완전 점령하고 좌익분자들과 중고등학생을 선동하여 무장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반동분자를 색출하게 하여 500여명을 인민재판이란 미명 아래 학살하였다.
특히 순천지역 일대에서는 경찰관 400여명이 반란군 진압작전을 펼치던 중에 전사하거나 반란군에 의해 학살 되었다.
이렇게 반란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자 민심은 동요되고 소박한 주민들은 실제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으며 반란군의 선동과 강압으로 이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속출하여 무장폭도들의 수는 수 천명에 달하였다.

순천에서 세력을 확장한 반란군은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1천여명으로 편성된 주력은 북쪽의 학구(鶴口) 구례 방면으로, 1개부대는 동쪽의 광양(光陽)방면으로, 1개부대는 서남쪽의 벌교(筏橋), 보성방면으로 분진(分進)하면서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였다.

한편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반란군의 일부는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 인공기를 게양하고 순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인민행정(人民行政)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모든 우익인사들을 즉석에서 살해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400여명을 처단하였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1권), 1967, p 458)

한편 여수에 "인민공화국"을 만든 좌익세력은 20일 15:00시경 인민대회(人民大會)를 중앙동광장에서 열고 약 4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용기(李容起)를 비롯한 5명의 의장이 대회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에서 좌익단체인 노동조합대표, 농민조합대표, 여성동맹대표, 청년대표의 "인민공화국 수호"를 외치는 연설이 있었고 5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김남식, 위의책, p 452)

ㅇ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ㅇ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ㅇ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ㅇ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ㅇ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한 인민대회는 막을 내리고 인민대회에 모였던 시민들은 곧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좌익 군중들은 여수 군청을 비롯한 각 기관들을 접수함으로써 하루 만에 여수시내는 좌익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고 말았다.

한편 비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民愛靑)", "민주여성동맹(民主女性同盟)", "합동노조(合同勞組)""교원노조(敎員勞組)", "철도노조(鐵道勞組)"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 그 이튿날(10.21) 여수시내 좌익분자들은 한독당(韓獨黨)을 제외한 한민당(韓民黨),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의 간부와 단원들을 반역자로 적발, 체포하였으며 이들은 이날 인민재판을 개최하고 제일먼저 여수경찰서장 고인수(高寅洙)를 비롯한 사찰계 직원 10여명을 처형한 것을 서두로 수 십명을 숙청하였다.

특히 이들은 여수경찰서 소속의 여순경 2명을 붙잡아 대낮에 발가벗긴 채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부분에 총을 쏘아 죽이고, 한명은 총알이 아깝다면서 죽창으로 국부를 찔러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엔터프라이즈, 1988년 5월호) 그리고 그들은 "여수일보"를 접수하고 "여수인민보"라는 좌익신문을 발간하였다.

이들의 우익세력에 대한 인민재판은 계속되어 처형된 수가 4백여명을 넘었다.(김남식, 위의책, p 457)

나. 鎭壓 作戰
정부에서는 여수.순천지구 반란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 육군준장을 임명하여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지휘하게 하는 한편 10월 21일에는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반란군 토벌에 동원된 병력은 5개연대 10개 대대였으며 1개 비행대와 함정들이 이를 지원하였다. 당시 진압작전을 위해 출동한 부대 및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육군본부, 공비연혁, 1971, p 206)
전투사령관 육군준장
송호성제5여단장
육군대령 김백일
제2여단장 육군대령 원용덕
비행대장 육군대위 김정열 (L형 연락기 10대)
수색대장 육군대위 강필원 (장갑차)
작전부대제4연대 (3개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이성가
제3연대 (2개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함준호
제6연대 (1개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김종갑
제12연대(3개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백인기
제15연대(1개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최남근

이 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으로 10월 23일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토벌부대에 쫓겨 구례방면으로 이동하여 백운산으로 입산하였고, 광양 반면의 반란군도 백운산으로 일단 입산하였다가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서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남조선 빨치산의 시초가 된 것이었다.
또 이 빨치산들은 나중 6.25를 겪으면서 북한 인민군과 합세함으로써 엄연한 국가 전복자, 공산 빨갱이들이 되었다.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는 반란사건이 발생한 지 5일 만인 25일 순천.벌교.보성.광양을 탈환하였으며 여수지역은 27일에야 치안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9일만에 완전히 진압되고 그 후부터는 지리산.백운산 등지로 입산 도주한 반란군에 대한 토벌작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토벌작전이 끝나고 국방부는 11월 10일 작전기간(10.21 - 10.27)중 전과 및 피해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1988년, p 16)
ㅇ 전과- 반란군사살 : 363명
- 포로 : 2,116명 (선동민간인 650명 포함)
- 소화기 : 2,595정- 기관총 : 36정
- 각종포 : 22문
- 자동차 : 40대
ㅇ 피해- 전사 : 61명- 부상 : 119명- 실종 : 4명

3. 事件의 爭點과 視角 (오문균, 여.순내란과 역사의 시련, 향군 6월호 (1992))

가. (국가정체성 수호의 視覺)
여.순 발란사건에 대한 올바른 시각은 "남로당이 그들의 군내 세포조직을 통해 일으킨 반란이며, 그들은 지방 좌익세력과 더불어 여.순 지구를 일시나마 공산천하로 만들었던 국가적 대반란이었다"는 것에 대해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자생적 민중운동) 또는 (민중항쟁 및 농민운동)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사건의 단면을 편향적 분석으로 결론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여기서 몇가지의 사례만 알아본다.

여순반란사건의 주역인 제14연대는 창설된지 불과 5개월여에 불과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 장병들이 남로당의 골수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빨갱이 연대"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바로 그 14연대가 별명에 부합되게 반란을 일으켜 신생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유관종,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 현대공론(1989년 2월호) p 421)

`박헌영 선생께서 전략의 엄격한 비밀보장을 위해 이를 서울 당 지도부는 물론 전남도당에도 알리지 않고 직접 지창수 동무에게 지시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여.순반란사건은 우리나라 민족사에서 비극의 한 장이기는 하였으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군 부대 내에서 남로당 조직을 완전히 제거시킬수 있었으며 1949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남로당 유격투쟁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남로당의 군부대 당 조직은 수차에 걸친 폭동으로 완전히 파괴 됐을 뿐만 아니라 인민들로부터의 고립이 더욱 가속화 됐다. (김남식, 남로당 연구, 돌베게, 1984, p 389)

이와 같은 주장은 여.순 반란사건이 공산당(남로당)의 골수분자가 많이 모인 제14연대에서 박헌영의 비밀지령을 직접 받아 일으킨 반란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군내부의 공산세력을 축출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과 군내부의 숙군과정을 통해 공산세력을 발본색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자들의 피의 혁명투쟁이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하고 국민으로 부터 고립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군부대가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을 올바로 수호하는 시각은 여.순10.19사건이 공산당의 정부 전복을 위한 반란이며 민중운동 또는 농민운동으로 미화시켜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국가 보안법”은 이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나. (民衆運動論者, 좌익의 視角)
다음은 민중봉기 또는 인민항쟁으로보는 민중운동론자의 주장을 들어본다.
단정단선을 반대하는 2.7 구국투쟁, 제주도 4.3 민중봉기, 여.순항쟁을 살인적으로 탄압하여 10만명 이상을 죽이고 강력한 제도적 장치인 국가보안법(1948.12.1)을 만든다. 이러한 살인적 파괴와 테러를 통해 민중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반공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제로 사고하게 되었다.(전남대 총학생회편, 조국의 하나됨을 위하여, 남풍, 1989, p 5-6)

이승만 정권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두고 각지의 병력을 대량으로 동원, 10월 22일 여.순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군은 반란군 및 일반시민에 대해 무차별 살상전을 감행하였으며, 남한 주둔 미군은 항공기 및 전차부대를 계속 투입하여 반란군과 시민을 공격하였다. (고준석, 민족통일투쟁과 조선혁명, 힘, 1988, p140)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에 제주도 민중봉기 진압 명령이 하달되자 이를 거부하는 군인들의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무장봉기는 여수. 순천일대를 장악하고 민중폭동으로 급진했다. (한동혁, 지배와 항거, 도서출판 힘, 1988, p 48)

여수.순천 반란사건에서 군.경에 쫓긴 봉기자들이 대부분 산악지대로 올라가 유격대원이 되고 미 군정에 의한 좌익세력의 탄압 속에서 유격투쟁과 비합법적 활동만이 현실 가능한 투쟁양태였던 당시 상황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군.경찰 조직내 침투 및 도시에서, 농촌에서 격전을 벌려나갔던 것이다. 당시 유격구는 지리산. 태백산 등 주요 산악지대와 거의 영.호남 전역에 걸쳐 형성된 광범위한 구역이었으며 민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전대협,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 남풍, 1988, pp 45-46)

이와 같이 여.순반란사건을 민중항쟁으로 주장하는 측에서는 좌익폭동 세력을 선량한 시민으로 보고 그 시민을 정부가 살인적으로 탄압했다는 것이며 미국의 전차와 항공기가 동원되어 반란군과 시민을 공격했다는 사실무근의 외세동원 진압을 주장하였고, 군.경에 쫓겨 입산한 패잔공비를 인민항쟁의 주체적 존재로 미화 시키는 등 국가가 실존하는 상황에서 정부군을 매도한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4. 結 言

여.순10.19사건은 분명히 군대 내 <공산당의 세포조직에 의해 발생했고>,이는 반란 당시 지창수가 남로당 박헌영의 지령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숨길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반란의 주동자가 <*경찰타도, *제주도 폭동진압 반대, 그리고 *자기들 반란군은 북상하는 인민군으로 행동하며, *북한공산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그들의 반란목적을 분명히 밝힌바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극명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폭력 투쟁사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 사건은 광복 직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된 너무나도 잔인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의 역사인 것이다. 그 당시 비참했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다. 그리고 부모처자를 잃고 아직까지 악몽에 시달려 온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불씨를 만들어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되며 이 모든 아픔을 서로 달래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당시의 반란군 부역자나 부역자가 아닌 자라 할지라도 일부 억울하게 이쪽 저쪽에서 죽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살기 위해서 반란 주동자, 가담자가 즉, 부역자가 아니면 과연 누가 파르티쟌(빨치산)이니, 사회, 공산주의니, 인민군이니,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국가정체성을 제대로 알았을까?
아무리 억울한 사람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국가반란, 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일으켰고, 군인이 상부의 명령을 반역한 사건이라면 엄연히 계엄령 발동대상이 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공권력과 상응하는 폭력으로 진압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당시 사건이 비극적이라고 해도 첫째도 둘째도 “대한민국 국헌 수호”를 위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아무리 좌익이 이를 왜곡해석 미화 한다 하더라도 이를 묵과, 동조 할 수 없는 것이다. 야금 야금,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같이 반역하자는 말인가? 대한민국과 국민, 헌법을 바로 이해한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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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출동을 명받은 국군 14연대의 1대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이하 40여명의 좌익 분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세명의 대대장이하 장교 22명 포함해서 40여명의 영내 군인들을 죽이고 미리 내통해둔 여수시내 600여명의 남로당 분자들과 여수를 장악한 이들은 남로당의 비밀 지시로 역시 남로당 비밀조직원이었던 김지회 중위가 지휘권을 잡고 열차편으로 북상해서 같은 비밀 남로당원인 홍순석이 지휘하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까지도 접수했다.

이들은 국군의 반격으로 10월23일 순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된 뒤 대부분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공비가 되었다.


지창수는 벌교 토벌 단계에서 일찌감치 전사했고 김지회, 홍순석등은

국군의 토벌에 쫓기며 지리산과 덕유산등을 전전하다가 다음해 4월 지리산 입구에서 사살 당했다.

반란군은 며칠 사이에 경찰관 공무원 우익인사들 800여명의 대 학살을 자행했다.

반란군을 토벌한 국군과 경찰들의 보복적 살상도 극심해서 무고한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되었다.


이 반란사건을 기회로 국군의 숙정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 군내의 좌익계 인사가 대거검거 처형.
6.25 사변이라는 국난을 앞두고 군내에서 좌익계를 소탕해서 다행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좌익분자들에게 학살당한 우익인사 가족들의 통한이나 국군 소탕전에서 억울하게 죽은

유가족들의 슬픔 역시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민족 갈등으로 남아 있다.

아래 사진들은 라이프지에 실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의 사진들이다.  

왼쪽의 등을 지고 있던 토벌여단의 지휘관 송호성, 나중에 변절하여 북한측에 붙었다.

 

앞은 경찰서장 [또는 도경정보과장,] 그 오른쪽은 군산에서 내려온 12연대 백인엽 소령.

 

대한 청년 단원들이 색출해낸 좌익 의심 분자 등에 채찍자욱.. 

 

용의자 연행. 

 

좌익분자 심문중 구타. 

 

여수시내 수색중 저항하다가 체포된 어린 여학생들.
여수중학교 빨갱이 교감 송욱 때문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좌익화 됐었다.

골수 좌익화된 여학생들은 시내에 진입한 국군들을 유혹해서 허벅지에 숨겨둔 총신 짧게 자른 칼빈소총으로 사살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많은 어린 여학생들이 용서없는 죽임을 당했다.

반란군들은 여수탈출 때 이 어린 딸같은 학생들을 팽개치고 달아났다.

 

작전수행중 주먹밥으로 한끼를 때우는 국군병사.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료들이었던 14연대를 추격해 사살해 궤멸해야 하는 슬픈 작전.

 

 

국군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불안한 주민들...쫓기는 자 가운데 내 식구와 친지가 있다..

 

 

여수 시내수색에서 체포된 통비<무장공비와 내통한 불순> 분자들.

판단할 능력도 여유도 없던 시절...

김지회가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주력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국군이 여수를 탈환한 후 원인모를 큰 불이 났다. 경계근무중인 국군.

머리에 흰띠를 두른 것은 14연대반란 국군과 동일한 복장때문에 구분을 위한 것이었다.

 

 

지휘관 잘못만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비화된 전 14연대 소속 국군들.

길게 자란 머리를 보니 여순 사건 한참 뒤의 토벌 작전에서 체포 된 것같다.

 

 

국군은 여수 탈환 뒤, 여러 곳의 학교 운동장등에 40세 미만 전시민을 모아놓고

몇가지 분별기준점을 정하여서 통비분자를 찾아낸 뒤 학교 뒤로 데려가 총살처형했다.

 

 

통비분자로 지목된 자의 항의에 발길로 위협하는 경찰..

여순 사건에서 여경을 포함한 다수의 경찰이 잔인하게 학살당하여 경찰들은 극도로 흥분했었다.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좌익분자색출작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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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좌익과 우익을 갈랐는가? 이념은 무엇이며 사상은 뭐란 말인가?

농사짓고 아이들 바르게 키워 나처럼 고생안하고 잘 살게 하려했더니...어느날...

그럴싸한 말로 이놈 저놈이 속살거린다..그럴 듯해서 고개를 몇번 끄덕댔더니...

 

인민군 들어오면 아이들과 함께 인공기를 들고 환영해야 목숨을 부지했는데..

다음엔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와 태극기를 흔들어야 살아남는단다..그래서..

살려고 냅다 흔들었다..밀물에 끌려가 죽고, 썰물에 끌려가 동네 남자가 거의 다 갔다.

파랭이..빨갱이 그거다 어려워서 못알아듣겠다.

차라리 할아버지 시킨대로 벙어리 흉내내던 삼칠이는 살았다.

이후로는 남자란 자고로 입을 열지 않아야 장수하고 품위가 있다고 했다.

 

벙어리가 오래사는 방법인 줄 몰랐다. 

 

하나님은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북쪽엔 인간을 높여 우상으로 섬긴 나라로 살펴보게 하시고..

남쪽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국가로 놔두셔서..

반세기도 못지나 과연 어느쪽이 옳은 가를 알게 하셨다.

결과는 인류역사가 그러했듯이 뻔한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자리를 차지한 북쪽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악하며 비참한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기도하는 남쪽은 눈부신 풍요와 인권과 선교일등국으로 원조국이 되었다.

너무 잘먹어 이젠 비만을 걱정하는 선진국을 향한다.

한 가문을 둘러보아도 삼대째 예수믿어 일어나지 않은 집안이 없다.

여순반란사건..이제 누구를 정죄한단 말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목함이 마땅하도다.

성경만이 평강과 안전과 풍요를 보장할 것이고 다가오는 죽음이후의 새로운 영원한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시도다. 아멘. -<베나본설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