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J.P.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을 평생 유지했던 그녀는 <제2의 성>으로 여성문제를, <노년>으로 노인문제를 부각시켰다. 1954년 공쿠르 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은 지식인의 문제를 다룬 걸작이다.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세계의 작은 일부분을 자기의 영지로 분배받는다.그리고 법률이 그녀를 남자들의 행패로부터 보호해 주지만, 그 대신, 그녀는 남편의 신하가 된다." - S. 보봐르, <제2의 성> 중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의 나이 24 세에 시몬느 드 보봐르와 만난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력을 느낀 두 사람은 ‘필요할 때는 찾고, 상대의 외도에 대해서는 서로 용인해주는 세기적인 계약결혼’을 하기로 합의,그 후 두 사람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키며 한시대를 풍미했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다. 반 정도나 읽었을까..? 그녀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도 문학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우연히 주워들은 그녀의특별한 생애에 대한 강렬한 인상때문이었다.그녀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많은 여성들이 한때는 그녀의 계약결혼을 동경하고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이상은 이상일 뿐 그것을 평생 자기의지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성 개방이라는 말조차 시대에 뒤떨어진 것 처럼 들리는 현실이고 보면,계약결혼이란 것 역시도 지금 이야기하기엔 지루한 것일 수도 있겠다.어쨌거나 그 시대에 그녀처럼 평생을 자기 의지대로 살아냈다는 것 만으로도 존경할 일이 아닌지.두 연인(그들은 평생 연인이 아니었겠는가...)이 자신들만 만족하다면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외도의 상처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치유하며 살았을테니까...어쨌거나 그녀는 멋지게 살다 갔다...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그녀의 족적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복잡한 것은 그들에게 패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포스팅을 하려고보니 내가 아는 것이란 겨우 이 정도...자료도 모은다고 모은 것이지만 너무 긴것은 내가 또 안좋아하고...그래도 이번 이야기는 다른때보다는 길어졌다.편하게 담아다 놓으면 어떨까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그래서 이웃의 시몬느 드 보봐르를 한번 보고싶은 마음도 컸었다. 그러나 보고나면 의기소침해져서 더 못할 것 같아 그냥 했다... 나는 나니까...+_+
시몬느 드 보봐르 '제2의 성' [제2의 성]이 출판되었을 때 보봐르는 41세였다. 당대의 제일가는 실존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로 명성을 독차지하고 있던 사르트르와 2년간의 계약결혼을 한 지 20년이 지나고, 그녀 자신 [초대받은 여자]로 유행 작가의 위치를 획득한지 6년이 지나고 있었다. 명성의 절정에 있는 여류 작가 보봐르의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주제의 이 책의 [인류 역사의 재구축 작업]은 여간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카뮈는 "프랑스의 남성을 웃음 거리로 만들었다"면서 분노했다. 여성의 평등한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던 때에 여성이 교육, 직업선택, 배우자 선택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워야 하며 출산의 자유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보봐르의 [제2의성]은 전후 세계의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을 획하는 것이었다. [여자? 아주 단순한 거지. 단순한 공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여자란 자궁이며 난소이다. 여자란 암컷이다. 이 암컷이라는 말은 여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남자의 입에서 암컷이란 형용사는 경멸하는 말처럼 발음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기의 동물성을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그를 가리켜 저건 수컷이야 하면 더욱 득의 만만해진다. 이 암컷이라는 말이 경멸의 언사로 들리는 이유는 여자를 자연 속에 놓아 두지 않고 그녀의 섹스(성) 속에 감금시키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은 오늘날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50년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보봐르가 여성의 자기 발견을 촉구하는 논리 전개를 위해 동원한 성에 대한 표현들이 당장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흔히 말하기를 여자는 남자의 페니스를 부러워하며 그것을 거세하려고 한다. 그녀가 남성의 생리 기관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페니스가 남성의 모든 특권을 구현하고 있다고 간주할 때뿐이다.] [프랑스의 의사인 드로랑은 이성과 분별이 충만한 남자라고 불리는 이신에 가까운 동물이 어째서 점액으로 더러워진 채 육체의 맨 아래 부분에 수치스럽게 위치해있는 여자의 치부에 끌릴 수 있느냐고 분개하면서 자문했다.]. 당시로선 이런 정도의 서술마저 문제거리가 됐다. 카톨릭 작가 모리악은 [제2의 성]을 가리켜 [포르노]라고 혹평하면서 반보봐르 운동을 이끌었다. 교육자들은 청소년들이 직설적성표현을 쓴 이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고 난리를 쳤다. 좌파도 보봐르를 공격했다. 여성 해방은 노동자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여성들이 분파적 행동을 벌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반대가 거셀수록 [제2의 성]과 보봐르의 이름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오늘날 여성학자들은 [제2의 성] 출간을 페미니즘 이론과 연구의 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고대 신화 분석은 물론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 철학, 문학에 대한 해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을 두루 동원하면서 여성이란 무엇인가, 여성 억압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규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은 60년대 미국에서 여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제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보봐르는 50대까지 왕성한 저술 활동을 전개했지만, 나이 60 이후엔 책상 앞에 앉아있기 보다 여성운동의 실천가로 활동했다. 여성의 출산과 피임, 낙태의 자유를 위한 시위대열에 참가했고, 전세계 여권운동가들의 모임에서도 상석을 차지했다. [조선일보/박해현기자]
위기의 여자 안정된 중류가정의 한 행복한 여성이 어느날 뜻하지 않던 암초에 부딪친다. 인생을 사랑과 결혼에 걸고 그 결혼에 성공했다고 굳게 믿고있는 모니끄, 그녀는 어느날 밤 남편 모리스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남편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된다. 자타가 공인해온 모범부부 사이의 균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놀라운 분노, 초조,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에겐 처음으로 자기성찰이 시작된다. 결국 오랜 회의와 절망의 수렁 속에서 그녀는 다시 어두운 현실로 돌아온다. 누구에게도 청할 수 없다. 문은 자기 스스로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 문을 열리라는 것을 자각한다.
「타인의 피」중에서같은 카페들, 같은 상점들, 그러나 9월 이후로 무엇인가 변해 있었다. 전에는 내 삶은 이 높은 집들 사이에 완전히 갇혀 있었듯이 보였었다. 이 집들은 늘 여기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만이 단지 잠시 동안 지나갈 뿐이었다. 내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랜 후까지도 이 집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으리라. 난 그 집들은 바라보았다. 이미 이 집들이 다르게 보였다. 무감동한 덩어리가 아니라 임시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돌들의 쌓임같이 보였다. 전에는 각 집의 전면이 특수한 모습을 간직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강철의 뼈대로 겨우 지탱되는 부서지기 쉬운 재료로 겉을 바른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내일 남을 것은 구부러진 강철의 뼈대와 무너진 벽과 석회와 검게 탄 돌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폐허 한가운데에 똑같은 나로서 여전히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미래는 이제는 이 길의 미래와 혼동되지 않았고 다만 나에게만 속해 있었다. 아무것도 나를 가두는 게 없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고 나의 힘 밖에 있었다. 갑자기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 ==============----------------------------*****------------------------=================생각의 탄생 -- 註:신금자
여섯 살 때부터 시몬느 드 보봐르의 꿈은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21세기가 기억하는 보봐르는 어떤가. 샤르트르와 함께 20세기 중반, 세계를 풍미했던 실존주의 철학의 큰 별로 자리매김했다. 실로 그녀의 철학과 문학의 지적 편력을 헤아리기에도 숨이 차다. 애당초 사람들은 그녀의 삶이 정신이상자처럼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무릇, 여자이기에 언제나 그 여성성이 복잡하게 얽혀 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는 철학적 신념으로 삶을 이끌어나갔다. 이를테면 그녀는 소설가와 극작가로 진로를 열며 그에 버금가는 열린 논객이 되었다. 더 나아가 여성문제와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맹렬한 운동권 지식인을 자처했다.
계약결혼
보봐르는 1929년 샤르트르를 만났다. 두 사람은 꽤 까다로운 철학교수시험을 통과하고 2차 시험 준비를 하면서 만나 계약결혼을 했다. 이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흥밋거리였다.
“나의 생애에는 하나의 ‘필연적인 사랑’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보봐르와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우연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보봐르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샤르트르가 보봐르에게 동의를 구한 결혼계약서다. 곧 일부일처제를 거부하며 두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과도 성적인 관계를 열어두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평자들은 그녀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그가 제시한 계약서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실제 샤르트르가 갖고 있는 ‘결혼함으로 인한 구속에 대한 두려움’을 대강 눈치 챌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떠나보낼 용기가 없었다. 그 곁에 머무르고 싶었으니 그 자유를 얼마간 보장해 주어야 했다는 말이다. 대신 그녀가 요구했을지도 모를 똑같은 자유가 그녀에게도 주어졌다.
그렇더라도 이를 평생 지키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놀랍게도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허름한 호텔 아래위층을 전전하면서 결코 결혼도 동거도 가사일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 그러면서 평생 계약의 끈을 놓지 않고 인생의 반려자로 살았다.
그녀의 속정
둘은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 ‘생제르맹 데 프레’ 다방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서 늘 토론하고 글을 쓰고, 서로의 원고를 읽어주고 밥을 시켜먹으며 사랑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샤르트르의 원고는 그녀를 거치지 않고 책을 낸 일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샤르트르는 그녀를 믿었고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도우며 함께 컸다. 그러다 그녀나 그의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생기면 초조한 심정을 드러내기보다 쾌히 연인으로 인정해주고 가족처럼 모여 지내기도 했다. 그와 그녀의 이런 속정은 요란하지 않게 내내 이어졌다.
다만 두 사람의 끄나풀은 그 누구도 끊지 못했다. 마음이 초조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원고를 정리하고 책을 쓰는 일과 철학과 신념이 다른 일로도, 심지어 연인과 함께 서로를 찾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미국에서 사귄 친구랑 브라질을 여행하며 밀월을 즐기고 있을 때이다.
샤르트르가 책을 써야 한다고 보봐르에게 전화를 하자 그녀는 바로 그를 버려두고 샤르트르에게 달려왔다. 그를 끔찍하게 사랑하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샤르트르의 원고와 자료 찾는 일을 도우며 같이 지냈다. 그 연인은 그들의 작업실에 찾아와 차라리 결혼을 해버리자고 졸랐다.
하긴, 그들은 서로 우발적인 애정행각을 이해한다지만 제3자는 어째야 되는가. 미리 계약결혼을 했다고 밝혔지만 트러블이 전혀 없을 수가 없다. 그 트러블들을 포함하여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보봐르는 소설을 썼다. 집필이 보봐르의 가장 좋은 여행이고 피난처였다. 그 피난처에서 시차를 둔 이기적인 삶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녀가 쓴 대부분의 책이 그렇게 씌어졌다.
내 가장 소중한 작품은 내 인생이다
그랬다. 그녀의 작품이 곧 행동이다. 보봐르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법은 행위의 한 형태인 대화다. 그녀는 작품 ‘제2의 성’과 ‘만다린’에서 세밀하고도 깊게 여성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실제 여성들의 역할, 삶의 단계에 따른 특성들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문제까지 괴기스럽게 탐사하였다.
긍정적인 여주인공이 없다. 원래 이 사회는 남성이 만들었다. 때문에 체계적이고 권위주의적 동물인 남성이 만들어낸 사회가 유동적이며 감성이 자유로운 여성에게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보봐르가 뽑아든 핵심 내용은 “사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였다. 이 구절은 지금껏 그녀를 대변한다. 그리고 초기 여성운동을 펼치는 페미니스트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보봐르와 샤르트르는 자유롭고 열린 관계를 지향했기에 그녀는 연인 알그렌, 란츠만, 그리고 실비 르 봉과 같은 여성과도 말년을 허허롭지 않게 보냈다. 그러니 보봐르를 지속적으로 지켜보지 않았다면 편협적인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개개인의 관심분야에 따라서 충분히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보봐르 자신이 그 어떤 오해도 개의치 않았고 어디까지나 사회적 중재자로서 그 범주를 넘나들었다. 마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신념에서 그리 한 것도 같다.
그러다보니 미친 여자 취급은 물론, 페미니즘, 레즈비언, 부도덕한, 그리고 기인으로 묘사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로서 보기 드문 자서전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면서 당당히 말했다. “내 가장 소중한 작품은 내 인생이다.” 라고.
지금쯤 파리 몽파르나스 역 떼제베가 내달린 꽁무니에 마로니에 꽃이 한창이겠다. 낮게 깔린 안개비 탓일까. 샤르트르와 보봐르가 죽치던 다방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 날이다. ================================================================
여성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즉시 하나의 예비적인 답변을 제공한다. 내가 이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다. 남성은 특별히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책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정의하려면 나는 먼저 “나는 여자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모든 토론도 이 명제에 달려있다. 남자는 성의 구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지 않는다. 남자는 단지 남자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어휘는 법조문과 같은 형식적인 내용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대칭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로 양성간의 관계는 전기의 플러스-마이너스와 같이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남자는 “man”이라는 단어가 인간 자체를 나타내듯이 긍정적으로나 중성적으로 나타나고, 그 반면에 여자는 일방적으로 제한된 기준(limiting criteria)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종종 남성이 “당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사용함을 알게 된다. 그때에 나는 오직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답변을 하게 되며, 이 답변에는 이미 나의 주체적인 자아가 제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런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남자이기 때문에 옳고 여자는 여자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은 자궁과 난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여성을 그녀의 주관성에 가두어 놓고 그녀의 본성의 관계 속에 투입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성이 선(腺)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성은 그들도 고환과 같은 선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선이 호르몬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는 그의 육체가 그가 객관적으로 자각한다고 믿고 있는 이 세계와 직접적이며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간주하며, 여성의 육체는 여성의 특수한 성격에 의하여 이 세상의 방해꾼이나 감옥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은 몇 가지 성질의 결핍에 의하여 여성이 되며, 여성의 본질은 자연적인 결핍(natural defectiveness)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성을 “불안전한 남성”이며 “우연적인 존재”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사실을 「창세기」가 - 보쉬에(Bossuet)의 표현을 빌리면 - 이브를 아담의 “남아도는 뼈”(a supernumerary bone)로부터 만들었다고 기록한 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남성이며, 남성은 여성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에서 정의한다. 그리하여 미슈레(Michelet)가 여성을 “상대적인 존재”라고 말했고, 벤다(Benda)는 「라포르트 뒤렐(Rapport d'Uriel)」에서 더욱 정확히 “남성의 육체는 여성의 육체를 떠나서도 의미가 있지만, 여성의 육체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남성은 여성 없이도 자신을 생각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 없이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성은 남성이 명명(命名)한다. 여자는 성(性)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에 대한 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성이다. 그 이하도 아닌 절대적인 성이다. 여성은 남성에 따라서 정의되고 구분되지만, 남성은 여성에 따라서 정의되고 구분되지 않는다. 여성은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이다. 남성은 주체이며 절대자이다. 그러나 여성은 타인(Other)이다.
+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키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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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병은 '존재'합니다. 이 물병은 이 모양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어떤 제작자에 의해서 디자인되었을 겁니다. 물을 담을 의도로 구상되었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 물병은 특정 용도를 위해 제작되었고, 특정 모형 틀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존재를 가지기 이전에는 하나의 본질(즉 물을 담는 용도와 기능, 가능성)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그저 단순히 우선 '존재'할 뿐입니다. 나의 인격은 전에 미리 계획된 모델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나는 늘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세계 또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나의 '실존'은 늘 열려 있고 나의 본질과 기능, 생의 의미는 아직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다른 사물과는 달리 실존이 본질에 앞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른 모든 존재와 차별되는 인간만의 존재 양식, 즉 '실존'입니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합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1929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각각 수석과 차석으로 합격하면서 같은해 11월 부터 계약결혼에 접어든다. 처음 그들은 2년간의 계약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 계약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50여년이 넘도록 유지된다. 계약결혼의 내용은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 등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단순히 계약내용은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은 그들의 사유를 실행하는 과정이었고, 사유와 경험을 작품을 통해 형상화해 내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런 까닭없이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첫째는 자기 자신을 사물같은 존재로 여기는 유형, 두번 째 유형은 인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로 사르트르는 이러한 형태를 자기기만의 형태로 취급하면서 통렬하게 비판한다. 세번째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리는 유형으로 여기에서 타자의 존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자는 나의 존재 이유를 담고 있는 자이다.
사르트르의 사유체계 안에서 인간은 항상 주체성을 유지해야하며 사랑 역시 타자와 내가 모두 주체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맺는 관계여야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인간은 타자를 사랑하거나 타자의 사랑을 구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는 '말' 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스스로 생산해 내는 모든 기호를 사르트르는 언어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살펴볼 때 그들의 계약 결혼은 육체와 정신을 좀 더 알기위한 단순한 결합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유를 기초로 한 삶을 살았고, 그들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관계의 이상을 세우려하였다. 작고 못생긴데다 사팔뜨기인 사르트르는 지적 반려자 없이는 살 수 없었고, 말과 글을 더 없이 사랑했던 보부아르에게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였던 사르트르는 그가 가진 육체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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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봐르와 샤르트르의 사진과 사연을 유우머컨텐츠보관함에 블랙커미디라는 이름으로 옮겨 두었다.
아래의 일기로 위의 두 사람의 천박함과 이들을 세기의 지성으로 알고 있는 머리가 고장난 이들을 평가한다.
2020.02.23.주일.
아이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이라며 1929년도 프랑스 전국교수임용시험에서 1,2등을 나란히 차지한 쟝 폴 샤르트르와 보봐르, 그들은 기존의 틀을 부수고 계약 결혼해 51년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다. 당연히 자녀는 없었고 계약대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 이성 교제로 사실은 매우 괴로웠다. 연하의 연인과 열애하는 보봐르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샤르트르는 십대 여성에게 임신을 시키는 등 술과 마약으로 문란한 성생활은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지성이란 말은 자신이 소유한 지식, 지혜 등 내면을 잘 살핌으로 가장 선한 삶을 찾아가는 총체적 인격을 말하고 있다. 그를 세기의 지성, 실존주의 대가, 시인으로 말하는 후대사람들의 안목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학교에서 그의 문체만 보고 그리 가르치고 있다. 마귀가 주장하는 세상이다.
인생은 출생(B : birth)과 죽음(D : death) 사이의 끊임없는 선택(C : choice)이라고 했던 샤르트르,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함으로 안 보이는 본질보다 보이는 실존에 무게를 두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손 안에 있다.”고 함으로 실존무신론자로 살며 그의 밀대로 “생각만큼 맛이 없는 것은 없고 육체의 맛이 더 낫다.”는 말로 육체의 향락을 높이 평가하여 동시에 4명의 여성과 밤을 지낸 왕성한 샤르트르는 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짐승 같은 성욕을 마음껏 불태웠다. 계약된 남편 샤르트르의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내 보봐르에게 다른 여인과의 합궁에서 매우 자극적인 일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까지 했다. 이런 수모가 결코 수모가 되지 않아야 하는 계약은 그러함에도 진실한 사랑으로 피차 괴로웠다. 남편이 손녀 같은 아이에게 낳아온 아이를 양자로 받은 보봐르는 죽어서도 가족묘지에 묻히지 않고 샤르트르 옆에 묻혔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 여자로 양육된다.”고 말해 페미니즘(feminism)의 장을 연 보봐르, 사람들은 이 부부를 예나 지금이나 상당한 지성으로 높인다.
가장 혐오스런 것을 가장 자유롭다고 보는 견해는 성경과 반대편에 있다. 마니교가 무너져 사라지듯 이런 흉측한 사조도 속히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영혼들은 모든 행복의 원점과 목적을 육체에 두기에 주저치 않고 결코 진리를 향해 눈을 돌리지 못한다. 공부 많이 한 “서(西) 사모어 해안의 팔롤로”들이 존경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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