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한국교회를 향해 쓴 소리를 던졌다. 이 교수는 교회개혁실천연대(개혁연대·공동대표 오세택 백종국 박득훈) 총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며, "좌절하지 말자"며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한국교회의 개혁 작업을) 시작하셨다는 확실한 보증이 있을 때까지 이 작은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를 내부에서 가장 타락하게 만드는 요인이 바로 기복신앙과 황금만능주의며, 성경적으로는 바알 신앙과 맘몬이즘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예언자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가 1970년대와 1980년를 거치며 성장을 했지만,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다고 했다. 교회 성장 자체가 목표가 됐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말씀에 입각한 교회 상이 중심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정당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에 적을 걸어두고 행세하는 그런 존재들인지 조차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요, 사회 지도자 그룹에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변화와 개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개혁연대가 만 6년이 채 되지 않는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건강성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며, 앞으로 이 일들을 더 겸손하게 감당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좌절하지 말자며,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사명에 충성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만열 교수의 축사 전문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19세기 말에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한국 수용과 함께 성립됐습니다. 그 동안 한말의 고난과 일제하의 역경,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장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에 힘입어 1980년대 말까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100주년이 되던 1980년대 중반에 한국 그리스도교인 수는 한국 인구의 25%, 4분의 1이라는 숫자로 제시됐습니다. 그 동안 군부정권 하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진보진영이 인권과 민주화에 힘쓰며 군부정권과 대결하는 동안, 그 다른 축인 보수진영에서는 전도와 선교에 힘써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스스로를 위안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혼선과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나 상가에는 교회가 난립하고 교회 간판이 행인들의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성장 자체가 목표처럼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말씀에 입각한 교회 상이나 십자가와 부활이 기초가 되었던 초대 교회 중심 메시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오로지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정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단의 난립은 교회의 직제와 권징을 어지럽혔고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은 교회의 영적 수준은 물론 종교인으로서 도덕성마저 떨어뜨렸습니다. 신자들은 늘어났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인지, 그저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에 적을 걸어두고 행세하는 그런 존재들인지조차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성장하는 동안 많은 부작용 나타나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 행태가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살아있는 이 세상과 죽어서가는 저 세상의 정도로 이분화 되던 신앙 행태가 점차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과 실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세속과 성역 등을 구분하면서 믿음은 실천과 분리됐습니다. 신앙생활이 예배와 전도와 선교 등으로 국한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는 믿음의 영역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치부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영역에서는 세속인과 다름이 없었고, 오직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정도였습니다.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요,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교적인 변화와 개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을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잘 살아보세’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세속적인 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운동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을 무렵, 거기에 발맞추기나 한 듯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복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3서 2절의 말씀에 입각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시대조류에 잘 적용하여 예수 믿는 복을 받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는 복 사상이 유포되어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을 현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복 사상의 강조는 바로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기복사상과도 짝짜꿍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진정한 복은 한국교회 속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기복사상으로 둔갑한 사이비 그리스도교가 팽배될 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지성들은 스스로를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예언자적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고에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인 보수 교회에서는 누구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를 내부적으로 가장 타락시키는 요인은 바로 이 기복신앙이요 황금만능주의이며 이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바알신앙이요 맘몬이즘입니다. 한국교회 지성인들은 기복주의를 왜 바알신앙으로 규정했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경계하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바알입니다. 출애굽도상의 이스라엘인들은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곳에 고정된 벽돌집 대신 때마다 옮겨야 할 천막이 있었고, 곡간에 저축해 둔 곡식 대신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40여 년의 광야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때마다 가장 유혹받은 것이 바로 "우리는 언제쯤이면 천막 아닌 벽돌집을 짓고 매일 받아먹어야 하는 만나 대신 몇 달 몇 년씩의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화려한 벽돌집에다 창고에 듬뿍 쌓아놓은 곡식을 담보해 주는 신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역경과 고난 속에 헤매며, 바로 그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는 그런 유혹들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잘 살아보세' 운동과 교회 성장, 대형 교회의 출현과 함께 이런 유혹이 심화 확대되었던 것은 한국교회의 불행이었습니다. 여의도의 모 교회를 비롯해서 강남·북에 있는 대형 교회가 바로 그런 바알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40년간 출애굽의 길 같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그 행리(行李)를 가볍게 하고 저 순례자가 걸어야 할 고독의 길, 가난을 실천하고 영성을 회복하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 대각성운동 이래 예언자적인 외침과 회개운동 그리고 개혁 운동을 나름대로 전개해 왔습니다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난해의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반 그리스도교적인 정서는 봇물을 이루어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반 그리스도교적인 기치를 내걸고 투쟁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과거 소수적인 위치, 약자의 위치였다고 생각하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약자도 소수자도 아닙니다. 사학법 재개정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의 삭발 사건은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여 문제를 해결하려한 대표적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이와 함께 대형 교회들에서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목회 직 세습행태와 목회자 납세문제 등도, 한국 그리스도인이 NGO 후원금의 7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자랑할 만한 추산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단군상 파괴 행위에서 보여준 무모한 행동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과 역사에 그렇게 둔감하냐는, 한국 지성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차기 정부의 대통령은 다시 대형 교회 장로로서 그 인맥이 벌써 한국 정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교유착의 가능성이 보이는 차기 정부의 행적 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또 어떻게 비판 혹은 비난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가속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시급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개혁연대의 사명은 더욱 분명해지고 그 사명은 더욱 지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 특히 난세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당시의 종교계를 주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그 시대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이들과 대결했을 정도로 갈멜산에서 외로운 투쟁을 했습니다. 북왕국 아합 왕과 남왕국 여호사밧 왕이 군사행동을 위한 정치적인 판단을 요청했을 때 시대에 영합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오직 미가야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어려운 때에라도 하나님은 아합 치하의 궁중 관리 오바댜를 통해 50명씩 1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놓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시대의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런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서 더 활기차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저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왜 예언자들의 회개운동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재앙과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종종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교회 지도자의 부패,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점을 넘어서게 될 때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과거 많은 시대가 당했던 그런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근심스런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불교적 기반 위에 있던 고려가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으로 변화하기 전에 고려 사회에는 불교 승려들의 심각한 타락행위와 불교사찰의 온갖 세속화된 모습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거울삼아 보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실천에 앞장 서 왔던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한 번 더 제 간절한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칫 여기서 한국교회의 목 곧음과 우리의 약함을 이유로 혹은 핑계 삼아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이 일을 중단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맙시다. 이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과 심지어 절망의 인식이 오히려 하나님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시작하셨다는 확실한 보증이 있을 때까지는 이 작은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한 것보다는 더 큰 역사를 한국교회사에 남겨줄 것으로 또한 확신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사명에 충성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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