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9. 주일설교<엡4:17-24. 옛사람과 새사람>
인도네시아 쟈바 섬 해안에는 때만 되면 거북이가 산란을 위해 줄지어 올라오는데 들개들의 회식이 시작된 겁니다 계속 잡아먹어도 끊임없이 줄을 지어 올라옵니다. 마치 죽으러 올라오듯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장면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고 이윽고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떠올린 후 염세철학자가 되어 세상을 비관하는 모든 이론을 추려내기 시작합니다. 생태계는 먹이사슬로 돌아가는데 먹이사슬은 죽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적절한 숫자가 함께 생존하는 훌륭한 자연계의 조절방법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면 그건 위로부터 온 총명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옛사람과 새사람인데 그 부제는 총명입니다. 여기서 뭔가 떠오릅니다. 시각과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총명은 시각과 관점이 사람의 그것을 떠나 하나님께 붙잡히며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의 손을 놓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을 부족하나마 이 땅에서 보여주게 됩니다.
아직은 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품고(빌3:12) 죄와 세상을 상대로 부단히 다투며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게 지상의 전투교회이고 저와 여러분을 통해 그러한 불완전한 가운데 주님은 그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본문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길에 우리가 마땅히 이뤄야 할 옛사람으로부터의 떠남과 새사람을 덧입는 것에 관한 바울사도의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과 헌신을 바로 감당하려면 먼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교회의 기초구성원인 각 성도가 과연 교회가 요구하는 성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깊은 성찰과 함께 끊임없이 연약한 자신을 아파하는 노력이 계속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도의 바른 정체성과 그 삶에 있어서 저와 여러분, 반드시 이뤄갈 몇 가지를 함께 도전받고자 합니다. 먼저 썩어가는 구습에 매어 새사람을 덧입지 못하는 안타까운 성도들의 공통된 특성을 살피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구습에 묶인 자들은,
18절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이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총명하지 못해 어두워졌다, 무지하다. 마음이 굳어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
1. 하나님을 떠나 있다.
1) 허망한 일을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는 것은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을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하는 어리석은 삶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enlightment with empty handed.. 빈손의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이는 세상의 마지막 소망이신 예수를 알지 못한 채 진리와 생명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황금만능 사상과 겉은 번지르르하고 세속과 인본으로 가득한 문화와 정서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세상은 차고 넘칩니다. 눈에 보기엔 그럴싸해도 그것들은 믿음으로 영원한 나라에서 볼 때 얼마나 허망한 것들인지 모릅니다.
2) 총명이 어두워져 무지합니다. 18절 상반절을 함께 읽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총명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는 “이해, 터득하다, 통찰력, 사고력, 지각” 등의 뜻입니다. 정리한다면 내면, 속사람의 형통을 말합니다. 속마음의 세계가 하나님을 향하여 환하게 열려있고 잘 통한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과 환하게 통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깊은 교제가 이뤄지면 통찰력이 밝아지는데 사람들이 사과 속에서 씨앗을 볼 때 총명이란 씨앗 속에서 사과농장을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얼른 보기에 총명한 듯해도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사29:14절엔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하시면 똑똑하단 사람의 지혜와 똑똑함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의 총명과 지각은 먼지만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셔서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시며 세포까지도 헤아리십니다. 그리고 평생을 한눈에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차라리 아는 게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것이 무지한 인생의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그 겸허한 깨달음과 통찰력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가 택한 백성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릴 겁니다. 엎드림, 이게 본문에서 말하는 총명입니다.
본문 18절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총명을 잃어 무지한 가운데 있다고 증거합니다. 인간의 행불행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몰라도 될 걸 열심히 배우고 익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텅 빈 허망입니다. 불신자들은 총명을 잃은 이방인들입니다. 영적무지는 끝내 총체적인 무지가 현실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납니다. 무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엉뚱한 곳에 엉뚱한 일로 치르지 않아도 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3) 마음이 굳어 갑니다. 본문 18절과 19절에선 “그들의 마음이 굳어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 굳은 마음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딱딱한 돌밭 심령입니다. 말씀의 씨가 심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말씀의 공급이 멈추면 곧 시들기 시작합니다. 딱딱한 심령에 어떤 명설교나 말씀도 스며들지 않습니다. 굳은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영적 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악인지도 몰라 졸지에 인생을 무너뜨려 불신앙이 두렵지도 않고 마냥 편안하게 해 결국 목 앞에 사망이 왔을 때 비로소 알고 후회하게 합니다. 이쯤되면 사단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조여 옵니다.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5년 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맞이했다 그러자 내 전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행운의 무지개를 따라 살았는데 그 허망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거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과 술 취해 기분 좋은 게 더는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었다. 예수를 만나 목적 있는 새 인생을 출발한다는 건 생명을 받는 일이다."
19절입니다.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단은 무감각해진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 이제 얼마나 편안한가? 주중에 계속 일하고 좀 편히 누워 쉬어야지. 교회 꼭 가야 하나? 만날 사람도 많고 갈 곳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얼마나 즐거운 일이 많은 세상인데” 방종하여 세월을 탕진하게 합니다. 이번엔 엡5:16-17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을 함부로 방탕에 풀어놓은 자에게 세월이 악하다고 충고합니다. (빠삐용의 죄 : killing time)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토록 부족하고 연약 중에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을 통해 배운 그대로만 하라고 하십니다. 21절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총명을 잃고 마음이 굳어버려 어두워져서 허망한 것과 방탕한 것에 자신을 맡기는 건 그리스도의 교훈과 거꾸로 간 겁니다. 성도의 길은 주안에서 받은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안에서 받은 교훈은 뭡니까?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 그리스도를 따라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새사람을 입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 교묘히 숨어있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숨어있는 옛사람의 정체를 밝힐 때 주의 영이 함께 하셔서 옛 자아를 꾸짖고 쫓아내어 신령하고 능력이 넘치는 새사람을 덧입혀 주실 줄 믿습니다.
1) 쫓겨나가야 할 구습의 옛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지금 말하는 구습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가는 못된 옛 습관을 말합니다. 그것들은 오랜 기간 우리를 지배해 왔고 사람들은 매우 익숙하게 길들어 있습니다. 익숙한 건 편합니다. 변하려면 틀을 깨야 하는데 대부분 그 수고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썩어가는 구습은 반드시 부서져야 합니다. 밖이 낯설고 춥다고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시작되지 않고 거기서 썩어버립니다.
껍질을 깨는 결단엔 허물을 벗는 기쁨이 따릅니다. 깨어나다, 깨닫는다, 깨부수다 같은 어원입니다.
2)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새사람입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는데 새롭게 된다는 건 먼저 심령이 거듭나야 한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구습에 매인 우리들의 영이 새롭게 되면 그 새사람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하심으로 거듭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붙잡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요, 오직 성경 안에서만 살고자 함이 진리요, 세상 헛된 것을 물리치는 건 거룩입니다. 그런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세상이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해 인생을 병들게 하고 총체적으로 상하게 하는 악한 영이 멀리 달아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의 새사람을 덧입어 과연 능력있고 권세가 넘치되 늘 찬미예수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기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111:10절을 음미하며 기도로 마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주님 우리 가운데 내놓을 것 없어도 오직 하나님과 거룩하신 독생자 예수와 그의 몸된 교회를 섬김이 최선의 삶이고 자랑인 줄 압니다. 허망한 것에 끌리지 말고 남은 생애 잠시면 지나 그날이 올 때 주님께 칭찬받게 하소서. 세상은 우리를 초라하게 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다독이며 오늘도 위로하셔서 가장 찬란한 생애를 가고 있습니다. 늘 함께하셔서 승리의 노래를 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