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4. 주일설교.(딤후3:1-5. 말세의 고통)
세상 살며 어떤 일을 오해하거나 모르면 그게 그대로 손실과 고통이 되고 거기에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성경을 오해하면 공연한 두려움이나 자만에 빠집니다. 실제 계시록 등 예언서에 나오는 엄청난 장면은 바로 알 때 두려운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는 이를 먼저 들어 올린 후 세상을 심판의 불에 넣는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분명히 교회가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다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설교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도 자칫 오해하면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이름처럼 끝까지 우리가 받을 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세에 타락할 교회와 거기 따른 엄청난 고통을 예고합니다. 마24장은 이 세상 끝날에 당할 끔찍한 장면들을 거듭 소개하는데 눅23:30-31절입니다. “그때 사람이 산들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차라리 산들이 무너져 덥쳐 깔려죽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거고 31절은 믿는 자들도 이런데 불신자들이야 오죽하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십자가를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과 이어서 29절에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뭡니까? 눈앞에서 자녀의 비참한 걸 보게 될 걸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는 나처럼 혼자 살라”고 한 말은 말세가 눈앞에 보이는 관점에서 주신 내용입니다.
성경은 조금도 빈틈이 없습니다. 오래전 일러드렸듯 이런 말세의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10군단장 티투스에 의해 정확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일전 우리가 본 Masada, Never again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말세의 고통은 그거로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에 무관히 계속 효력을 발생하는 복음은 말세라는 시제가 예루살렘 성의 함락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진행중이며 또 분명 미래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다가올 일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미래의 재림은 주님이 하시고 과거의 예루살렘함락은 교훈이지만 중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진행 중인 말세와 말세에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 부분을 시간이 되는대로 다룹니다.
☞ 먼저 말세입니다.
세상의 끝이 말세인데 여기서 말세라는 단어를 봅니다. 세상이 끝나지 않아도 개인에게 말세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평양감사도 내가 싫으면 그만, 좋은 직장도 내가 사표내면 끝입니다. 말세를 자신의 세계 안으로 불러와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극심한 고난과 아픔 그리고 곤혹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기꺼이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왕상17:12절에 사르밧과부는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양식이 없어 아들과 먹고 죽으려다가 마지막 말을 엘리야선지자에게 합니다.
대상10장4-5절에도 “사울이 자기의 무기를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의 무기를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행하기를 원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니 5 무기 가진 자가 사울이 죽는 걸 보고 자기도 칼에 엎드러져 죽으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릴 때 사람은 기꺼이 죽음을 택합니다. 이건 세상의 종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말세는 고통과 더불어 온다는 건데 말세를 행복한 마음과 설렘으로 기다릴 순 없을까? 오랫동안 인류의 숙원이지만 결코 마지막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인생의 난제로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 정말 난제일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과 복음은 항상 거꾸로 간다는 것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죽음이 절망과 끝인 세상과는 달리 죽음이 소망이요, 시작인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걸 알고 보지 못한 걸 보았습니다. 주께서 열어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세상(독,말,악종) 중에 세상사람입니다. 우릴 구원하신 주님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보면 절망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린 주안에서 구원받은 소망의 무리들입니다. 막강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사랑은 고통이 아니라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세의 고통이 소망이 될 수 있을까?
마24:3절에 예수님께 사람들이 묻습니다. “주의 임재와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6절 대답이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속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이어지는 무서운 일들은 21절에 그 정도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정말 그땐 환난이 대단할 겁니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고통과 환난의 목적이 무어냐는 겁니다.
성도의 고통은 깨달음에 목적을 두고 깨달음은 실체를 아는 일에 목적을 둡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깨달으면 깨닫는 즉시 하나님의 진심과 오해하고 있던 모든 일이 불행의 원인임을 안다는 겁니다. 세상은 언젠가 무서운 마지막을 맞이하며 그간의 불신앙과 때늦은 후회로 깨닫게 될 것을 우린 압니다. 시119:67절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욥기서의 끝에 욥도 다 잃고 마지막 같은 고백을 합니다. 욥기 끝장 42: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겁니다. 10자녀가 다 죽고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잿더미에 앉아 깨닫는 진리,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고난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자초하든 억울하게 당하든 주께 온 마음을 두고 사는 자, 고난은 헛고생이 아닙니다.
결국, 주님 얼굴을 본다는 겁니다. 우리 잠시 일대일성경공부 Q.T과목에서 공부한 거 복습해봅니다.
말씀묵상을 많이 해야 하는데 묵상에서 발견하는 2가지, 하나는 하나님 발견이요, 다음은 자아발견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면 먼저 그분과 깊은 교제가 일어납니다. 깊게 교제하면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의 성품을 배우게 되고 그가 하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을 예배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자가 되어 찬양자가 되고 결국 그분을 선전하게 됩니다.
다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드디어 참으로 비참한 자신의 타락한 몰골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피조물인 자신은 하나님 사랑을 받는 사랑의 대상자, 자녀로서 의미와 사명이 있는 귀한 존재임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유없이 고난 속에 버려두지 않는다는 건 성경이 거듭거듭 일러주는 사실입니다. 묵상의 유익을 잠시 기억해봤습니다. 즉, 고난은 깊은 묵상을 하게 해서 결국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한다는 건데 말세에 고통은 인류와 교회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범세계적이고 지구의 말세에 신음과 절규속에서 찾는 하나님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 속에서 찾는 하나님 음성과 말세지말의 현상에 따른 신앙회복과 하나님의 형상회복을 살피며 설교를 정리합니다.
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거룩하지 않으며,
하나님 대신 자신을 사랑하면 말세가 온 거라고 알면 됩니다. 자기애는 자기자랑과 자기애착으로 나타나는데 이거 참 비참하게 자신을 이끌게 됩니다. 그건 겸손과 반대편의 교만이고 거룩하지 않습니다.
3절,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런 때에 일어나는 일들이 이미 개인적 말세를 불러온 겁니다.
4절,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사람이나 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합니다.
말세에 사람 조심해서 만나고 사귀어야 합니다.
오염되느니 차라리 외로운 게 훨씬 좋습니다. 외로우면 주를 찾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세에 고통스러워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 고통은 거듭남의 신호입니다. 고통없는 성장은 없고 죽음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손톱 만한 죄에도 밤새워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예리한 영의 감각으로 영적인 거인들이 다 되시면 그는 이미 말세의 고통을 지나 지금 환희의 부활과 재림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니다.
한 주간을 여는 비전메시지)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오래전 우리교회설교를 기억합니다.
"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피하고 싶은 게 더 많은 세상"이란 말은 동삭동에 오면서 우리교회가 만든 전도브로우져에 올린 글 중 하나입니다.
능력성도란, 들은 설교를 삶에서 적용해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월요일 남들은 힘겨워할 때 우리는 부활주님 분명히 가슴에 새기고 말씀이 앞서시니 힘을 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진정된 기쁨은 환경을 뛰어넘은 영혼의 권능이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진주조개는 인기가 많고 고가품입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몸안에 큰 불행과 고통의 원인, 즉 외부침입의 불순물을 안고 평생 시름하며 그로 인해 겹겹이 내공의 인내로 빛나는 진주를 둘러싸, 가슴으로 안고 사는 녀석이 진주조개입니다. 상처로 진주를 만든 진주조개,..
신앙인격의 眞髓, 참된 가치와 근거는 고통으로 빚어지는 내공의 힘입니다.
[욥28:28b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우리 서로 기도해주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