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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개혁주의 삼위일체론

by 설렘심목 2010. 2. 7.

출처 카페 > 호주성산 조직신학 연구실 | 성산지기
원본 http://cafe.naver.com/systematic/341 

 

 서 론 : 삼위일체론의 중요성

 

먼저 부족한 사람에게 본 논고를 기술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당해 주신 개혁공보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을 삼위일체적 성령론(Trinitarian Pneumatology)으로 받은 관계로 여러 번 삼위일체에 대한 글을 요청 받았으나 아직 학문적인 연륜에서나 여러 면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사절해 오다가 이렇게 개혁공보에 글을 올리게 되니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필자는 몇 주간에 걸쳐서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이라는 제목으로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을 기재할 것이며, 그 전개 방법으로 전반부에 3-4세기의 삼위일체 논쟁(니케아 종교회의 전후)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의 형성 과정을 서술할 것이며, 후반부는 조직신학의 중요 주제들을(신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개혁주의 삼위일체적 관점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와 타종교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신학적 명제인 동시에, 개혁주의와 다른 교파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인 삼위일체론은 그 동안 신론의 한 분야로만 취급되면서 우리의 신앙고백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신학의 핵심적인 교리로 이해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개혁주의가 삼위일체론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우선 그것이 개혁교회의 전통 속에서 근본 교리로 이해되었고(적어도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이 교리는 여전히 오늘날 교회와 신학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교리신학의 핵심적 교리로 부활시키면서 전통적인 교의신학을 삼위일체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필자는 아래의 세 가지 요소들을 언급함으로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1. 삼위일체 신학의 현대적 부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를 거쳐 형성된 삼위일체론은 신학적 논의 대상이기 보다는 예배의 대상으로서 신비적 유산 같이 보존되어 왔다. 종교개혁 시대에 세르베투스(Servetus)와 소시니안주의자(Socinianism)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주장을 폈지만 신학적 흐름의 주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19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거절 당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유주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교의학 맨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삼위일체론은 현실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신앙인의 절대 자기 의식에 대한 직접적 진술이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사변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적 삼위일체에 대한 부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19세기 자유주의의 태동을 불러왔고 20세기의 현대주의도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위협 받고 있는 현대적 상황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뿐이다. 마치 4세기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자 아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면서 아라우스를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였듯이, 20세기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의 신학적 바탕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존하였다. 개혁주의 변증학의 대표적 신학자인 반틸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이외의 어떤 근거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즉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고 강조하였다.

 

2. 종교다원주의 세계 속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날 한국 신학과 교회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새로운 변증적(neo-apologetics) 시도 없이는 기독교의 존재의 위기까지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켰다면,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새로운 신개념을 정립하고자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그들의 신 개념인 초 경험적 실재(trans-empirical reality) 혹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다원성을 이루고 있는 가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타종교와 갈등 구조를 이루고, 이것이 곧 기독교를 고립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존 힉은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전환하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화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개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은 지구촌의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며,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변증학적 신학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기독교 변증학이 없이는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도전에 대하여 위기에 처한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신학적 작업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인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21세기 개혁주의 변증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신론에 대한 재인식이며, 신론에 대한 재인식은 바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을 확고히 하는 유일한 신학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는 후현대주의 세계 속에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3.  삼위일체적 칼빈주의(개혁주의)

필자는 칼빈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적(엄격히 말해서 기독론적 삼위일체론)임을 말하고 싶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후기 스콜라 신학에서 볼 수 있는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신학과는 다른 신학적 방법론을 도입한다. 또한 루터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 머무른 반면에, 칼빈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도 삼위일체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뼈대로 고대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의 틀로 삼으면서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칼빈은 초판(1536)에서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로 4분하여 해설하였고, 최종판(1559)에서는 전 4권으로 삼위일체적 구조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일차적으로 전체 성경에 대한 주석이요 둘째로 교회가 삼위일체 신학과 신조로 그 성경을 읽었던 방식에 대한 주석이다.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하게 될 것 . . . .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을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에 칼빈의 성경에 바탕을 둔 삼위일체적 신학이 없었다면, 개혁주의는 중세의 그늘 뿐만이 아니라 루터의 신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제 1 장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 I
          
                           

1. 들어가는 말
삼위일체 교리는 터툴리안(Tertullian)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하나의 실체(una substantia)를 갖고 계시며, 삼위의 위격체(tres personae)로 존재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 속에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적 표현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1)에서 완성되었는데, 여기서 정통 교회는 삼위일체론의 대표적 이단자 아리우스(Arius)를 정죄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본질(homoousios)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은 독생하시고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신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독생자 . . . 그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 . . .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 되시므로, 낳으심을 입었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한 본체(homoousios)를 이루신 분이로다." 
하지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가 완성되기까지 초대 교회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단일성("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과 세 위격("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의 관계, 특히 성부(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단일성과 성부를 동일시 하였음)와 성자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결국 초대 교회의 군주론자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성부에게 종속시키거나 아니면 성부의 외현 혹은 양태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군주신론의 출현 배경에는 초대 교회가 너무 경륜적 삼위일체에 치우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필자는 먼저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경륜적 삼위일체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고, 초대 교회의 대표적 반삼위일체론인 양태적 군주신론과 종속론을 언급하고자 한다.

2. 니케아 회의 이전의 삼위일체 -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비록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연구가 현대 삼위일체 논쟁에서 비로소 도출되었지만,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논의 속에서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구분은 역사 속에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시는 방법(경륜적 삼위일체)과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법(내재적 삼위일체)의 차이로 이루어진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경륜적 혹은 기능적 측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2세기 말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Irenaus)의 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레네우스는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기능적으로 구별하였다. 터툴리안도 경세(oikonomia)를 근거로 세 위격을 구별하면서 각 위격은 “그들의 존재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등급을 통하여,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형태를 통하여, 그들의 힘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현현을 통하여 구별”된다고 말한다. 한 하나님 안에 계신 세 분의 신적 “페르소나”(persona)는 각기 맡은 분야가 있다. 아버지는 창조와 그 후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인류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었다. 그 구원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들이 성육신(Incarnation) 하셨다. 그리고 성령은 아들이 수행한 구원을 결실하도록 했다. 이러한 경륜적 구조에서 아버지는 절대자로서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아들이 제 이의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제 삼의 위격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협조하여 구원을 완성하신다. 경륜적 삼위일체란 이와 같은 구원을 위한 구조 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초대 교부들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원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면서 삼위의 사역을 경륜적 혹은 기능적(functional)으로 구분하였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이고 초월적인 측면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계시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발전되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적 존재임을 확신케 했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가 함유하고 있는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종속주의(subordinationism)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륜적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위계 질서가 나타난다. 즉, 신성의 제일 원리 혹은 근원은 성부 하나님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으심을 받은 제 이의 위격이고 성령은 제 삼의 위격이 된다.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는 오리겐에 의해서 종속주의로 발전되고 아리우스(Arius)에 의해서 성자의 신성이 부인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니케아 회의를 전후로 해서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로 전환되고 만다.

 3. 양태적 군주신론
초대교회에 반삼위일체론의 한 형태인 양태적 군주신론은 서머나 출신 노에투스(Noetus)에 의해 발생되는데,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의 세 양태 이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분이지만 세 역할, 즉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 삼중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양태론의 대표적인 형태로 사벨리우스주의가 있다. 215년부터 로마에서 가르치고 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는 노에투스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성자와 성령을 이해하면서, 한 모나드(monad)로서의 성부 하나님은 세 가지 사역을 하신다. 하나님은 마치 태양과 같아서 한 실체가 열과 빛을 발산한다. 아버지는 본체 또는 형상이나 아들과 성령은 그의 사역의 양태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과 성령이 고유의 본체와 경륜적 사역 속에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존재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세기 신정통주의를 주창한 바르트 역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세 가지  존재양태 (three modes of being)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사벨리우스적 양태론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양태적 군주신론은 한국 교회 안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나" 라고 하는 한 위격은 필요에 따라서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며 한 어머니의 자식이 된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아버지의 양태로 신약시대에는 아들의 양태로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양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이심을 양태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양태적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빨리 버려야 한다.
4. 종속론
초대 교회의 종속론은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리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단일성과 성부를 동일시하였다. 즉, 성부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만을 모든 신성의 원천으로 이해한 오리겐은 성자의 신성이 성부로부터 파생되었음을 말하면서 불가피하게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 등급을 두고 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관계적이고 위격적인 구분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이해하면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영원한 종속관계(subordination)로 발전시켰다. 오리겐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육신 하시기 전부터 영원의 영역에서 아버지에 의해 낳아지신 분이므로 본질과 신분상에서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성자가 성부께 종속된다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종속론을 발전시켰다.

 

 

제 2 장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 II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앞의 논지에서 니케아 회의 이전의 삼위일체적 논의는 경륜적 삼위일체(역사 속에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시는 방법)라고 설명하였고, 경륜적 삼위일체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부를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는 두 가지 반삼위일체적 유형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말씀과 성령이 시간 이전에는 성부의 존재 안에 잠재해 있다가 거기서부터 마침내 경륜 속에서 세 양태로 나타나셨다는 양태적 군주신론이다. 다른 하나는 말씀과 성령은 그 존재의 근원을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므로 어떤 식으로든 성부는 종속적 우월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종속주의는 오리겐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오리겐은 성부의 존재로부터 성자와 성령을 도출해 냈다.
하지만 오리겐의 종속론을 계승한 아리우스는 좀더 심화된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가르치면서 성자와 성령이 존재하시지 않으셨던 때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리우스에게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아졌다는 의미는 곧 성자가 성부에 의해 시간 안에서 피조되었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어 졌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경륜적 구분을 전제로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신성을 공유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신학을 "경륜적 삼위일체"로 부르면서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혹은 시간 안에서 그의 아들과 그의 성령을 가지셨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학은 삼위일체가 영원 내에서가 아니라 오직 시간 내에서 존재한다고 간주하였다. 아리우스는 이 주장의 근거를 잠언 8:22에 대한 칠십인역에서 찾고자 했다. 잠언 8:22에 대한 칠십인역은 "그가 자기 일을 위해서 태초에 나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이단적 사상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되었는데, 니케아 회의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선언하면서 그 신학의 방향을 내재적 삼위일체(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법)로 전환하고자 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 이전에, 그 무엇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그 자체 안에서 영원히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그리고 이 삼위는 그 본질과 실체와 속성에서 동일하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본질의 동질성과 세 위격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니케아 회의에서 정립된 삼위일체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부들의 신앙고백이고 또 그렇기에 그에 의해 획득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2. 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인구 밀집 지역 가운데 하나인 바우칼리스(Baucalis)교구를 관장하던 장로 였으며 설교가로 유명했다. 그는 오리겐의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아리우스의 종속론은 오직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아들은 성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는 오로지 출생하시지 않고, 오로지 영원하시고, 오로지 시작이 없으시고, 오로지 참되시고, 오로지 불명하시고, 오로지 지혜로우시고, 오로지 선하시고, 오로지 주님되시고, 오로지 만물의 심판자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물론 여기서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본질은 절대 초월적이고 절대 불변하기 때문에, 성부의 본질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에 의하면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 아니다. 성자와 성령이 내재적으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면, 필경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창조되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하나님 만이 시초와 기원이 없으며, 아들은 시작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들은 동등하지 않으며 무한한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이해는 존재론적으로 동일본질(homoousios)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부와 성자가 계시하신 각 위격의 역할에 대한 종속적인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것이요"(요 6:37)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일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아들이라면 그는 아무 것도 받을 필요가 없고 원래의 아들로서 그것들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리우스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일 아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면 그는 그 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로서 그 날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창조된 것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경륜적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아리우스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존재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의 영원성과 통일성을 주장한다: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다. 성자의 출생은 영원하다. 성자는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존재(본질)로부터 출생한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 또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의 제3권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그는 항상 존재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둘째,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시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다. 셋째, 아버지에게 속한 것들이 아들에게 속한다면 성자와 성부는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그리고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요 17:10).

 

3.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의 전환  니케아 회의를 중심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신 삼위의 관계성을 설명하면서 발전되었지만, 아리우스가 주장하듯이,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신성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경우 경륜적 삼위일체의 위험천만한 결과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와 구원은 불완전하게 된다. 여기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훨씬 밑에 있는 하나의 피조물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리우스의 종속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교부들이 니케아 회의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시라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교리는 곧 교부들의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데, 이때부터 교부들의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신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하기보다는 본질(ousia)에 관한 질문을 먼저 하게 되었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 이전에 영원 전부터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서술이다.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는 다음의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용어가 양태적 군주신론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종속론에 대항하여 신성의 단일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아들의 신성이 아버지의 신성과 동일하며, 참으로 동시에 아들의 신성이 아버지의 신성이며, 혹은 아버지의 신성의 충만함이 아들의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질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는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삼위일체를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유일하시고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체에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바로 말하며, 믿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을 썼다." 즉,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본질(essentia)이시라는 것을 말하며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한 본성, 한 신성, 한 의지, 더 나아가서 한 활동만이 한 하나님에 귀속되지 세 위격들 개개 자신들에는 귀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본질의 동일성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나오심에도 적용이 되는데,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라면 당연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제 3 장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 III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앞의 논지에서 니케아 회의 이후 삼위일체적 논의는 경륜적 삼위일체(역사 속에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시는 방법)에서 내재적 삼위일체(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법)로 그 신학적 방향이 전환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니케아 회의 이후에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쟁이 내재적 삼위일체로 전환되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대표적 언어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 세 위격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위격의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과 신성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세 위격의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 보다 점점 더 신성의 단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다.
그리하여 다시금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데 사벨리우스적 양태론으로 빠질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나지안주스)들은 삼위일체의 위격을 좀더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위격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상호침투" 혹은 "상호공유"의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삼위일체의 위격 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먼저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논한 후에,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경륜적 관점에서 조명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의 삼위일체론이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상호침투"하신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방법은 삼위일체의 기본적인 표현인 "하나의 본질(mia ousia), 세 위격(treis hypostases)" 중 하나의 본질보다 세 위격의 통일성에 대한 신학적 발전을 모색하였다는 것이다. 나뉠 수 없는 한 하나님은 세 분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필자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공헌한 것 중의 하나는 "ousia"(본질)와 "hypostasis"(위격)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두 단어는 캅파도키아 교부들 이전에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hypostasis"(위격)가 더 이상 본질을 의미하지 않고 위격을 의미하는 반면에, "ousia"(본질)은 신성 그 자체에 대한 전문 용어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단일성은 그분의 "ousia"(본질, 존재)이며, 삼위일체는 "휘포스타세스"(hypostases)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휘포스타시스 안에서 우시아가 충만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둘째,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를 성부 하나님의 위격(hypostasis)에 둔다는 것이다. 비록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성자나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부의 위격(hypostasis)이 삼위일체의 최고 원천(principle), 혹은 최고의 근원(origin)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 동방 신학의 권위자인 지졸라스(J.D. Zizioulas)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의 세 모형은 그 실체에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즉 아버지에게서 은혜를 입고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단일성의 궁극적인 배경은 성부라고 주로 주장한다: "세 인격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는데, 그 세 인격의 일체성의 배경은 바로 성부이다."
셋째,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이전에 행해졌던 것 보다 더 분명하게 삼위일체 안에서 위격들의 특성을 규명하였다. 바실은 성부에게는 "아버지되심", 성자에게는 "아들되심", 그리고 성령에게는 "나오심" 혹은 "성화"를 귀속시켰다. 이러한 위격 간의 상호 관계적 구별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는 양태론적 경향을 막아줄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하고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성부는 성자와의 관계에서 "아버지되심"의 속성을 소유하고 계시고, 성자도 성부와의 관계에서 만이 "아들되심"의 독특한 속성을 소유할 수 있다. 또한 성령께서도 성부와의 관계에서 "나오심"의 독특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내재적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캅파도기아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상호침투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원한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다음과 같이 페리코레시스를 설명하고 있다: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은 세 인격들이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각각의 인격이 다른 두 인격의 생명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 공동체'(a community of being)라는 이미지가 자주 상용된다. 존재 공동체 안에서 각 인격은 각각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인격들을 통찰하며 또한 다른 인격들에 의하여 통찰 된다."

 

3.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내재적으로 "페리코레시스"의 관계 즉, 상호공유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대로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경륜에서 각기 다른 시점에서 다른 존재의 양식(양태론적 이해)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삼위일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세 분의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행위에 상호공유의 관계로 위격적으로 참여하시는 것이다. 내재적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공유의 관계는 경륜적인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에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재적 상호 공유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과정에서도 서로 도우시며 사랑하시는 상호공유의 역동적 관계로 사역하신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흔히 발생하는 큰 오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뚜렷하게 계시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예수 위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은 한결같이 세 분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마 28:19). 또한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고후 13:13).
또한 성경에서 우리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발전시킨 상호공유적 위격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 7-10).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자와 함께 계셨고 성자 안에 계셨다. 성부의 위격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성자의 위격도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성령의 위격도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위격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공유적 위격의 개념은 곧 예수께서 그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 14:11; 17:21)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완성된 상호공유(perichoresis)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 끼친 영향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니케아 신조서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은 이 세상에 대한 경륜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의 관계 이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적이심을 고백한다. 이러한 내재적 삼위일체는 곧 경륜적 삼위일체로 연결이 되는데,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경륜 과정에서 자신을 그대로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전승을 따라서, 위격의 개념을 "관계적" 혹은 "상호공유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통일성과 통일성 안에서 삼위일체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삼위의 관계를 상호공유적 관계로 이해하며, 이러한 분리될 수 없는 위격들간의 상호공유는 곧 삼위일체의 공동체성(community)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오,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그 분을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상호공유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양태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4장 10절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강조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전승을 따라 상호공유적 개념을 그의 삼위일체론 안에 도입하였다.

 


제 4 장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 IV
       

                                 

1. 들어가는 말
니케아 회의 이후 발전되기 시작한 내재적 삼위일체론(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법)은 서방의 대표적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 완성된다. 어거스틴은 399년부터 419년에 걸쳐서 15권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썼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삼위일체 내의 위격들의 본질이 하나이시라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교리를 더 역설하면서, 위격들을 분리될 수 없는 관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
지난 주 우리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 끼친 영향은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페리코레시스"라는 상호침투 혹은 상호공유적 위격의 개념을 그들의 삼위일체론에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발전시킨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로 비교되면서 하나님의 단일성보다는 위격들간의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단일 군주신론적 배경을 가진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 혹은 "다신론"이라 비난하였다.
이러한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안에서 "삼신론"의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인식한 어거스틴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적 유산을 계승하면서(특히 위격의 구별성과 관계성을 강조함)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다. 어거스틴은 모든 심혈을 기울여 강조하기를: "삼위일체는 어쩌다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 또한 하나님은 구별되는 세 위격체로 존재하심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어거스틴은 강조하기를 한 본성, 한 신성, 한 위엄과 한 영광이, 더 나아가서 한 의지만이 그리고 한 활동만이 한 하나님에 귀속되지 세 위격들 개개 자신들에는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치고 아버지만 혹은 아들만 또는 성령만이 일하시는 사역이란 없다. 어거스틴은 아들의 성육신에 있어서 아들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고 할 정도로 엄격하게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위해서 삼위일체의 사역은 "밖을 향해서는 언제나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 즉,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언제나 함께 역사한다는 명확한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필자는 먼저 어거스틴의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위격의 관계성을 논한 후에, 어거스틴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경륜적 관점에서 조명할 것이고다.

2.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기본적 표현인 "하나의 본질(una essentia), 세 위격(tres personae)"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하나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의 본질(One Essence)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로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그는 삼위일체 논의 가운데서 양태론적 경향을 피하기 위해서 한 본질 이신 하나님은 결코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하나 되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었으며 언제나 그러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아리우스주의적 종속론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본질적으로 하나이심을 강조한다. 필자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어거스틴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제시한 위격간의 구별이 "삼신론적" 신관을 내포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삼위"란 "삼신"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본질의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요 10:30)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하나(One)는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본질의 하나이다. 즉 영원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곧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이시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격적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삼위일체의 출발점을 하나의 단일한 본질로부터 출발했다. 단일한 본질이신 한 하나님께는 한 신성과 한 영광이 있을 뿐이며, 내재적으로 하나의 신성과 영광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그 자신 그대로를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세 위격은 한 원리를 제시하신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이기 때문에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둘째,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한 본성과 한 신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그는 분리될 수 없고 양태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세 위격의 구별성과 관계성을 강조한다: "또 하나님에 대한 말이 그 모두가 그의 본질에 관한 것도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나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 같은 것이다. . . 오직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부라고 부르며, 따라서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이 명칭들은 본질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 . 상호 관계에 대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 없이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며, 성부 없이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 없이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한 본질과 한 신성 혹은 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한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성부 없는 성자로 해석할 것이 아니며, 성자 없는 성부로 해석해서도 안되고, 성부와 성자 없는 성령으로 해석되어서도 안된다. 어거스틴은 "성부가 페르소나시요, 성자가 페르소나시요, 성령이 페르소나이시므로, 확실히 세 페르소나가 계시다"라고 말하므로 삼위일체 안에 세 분의 위격(persona)이 계심을 확신함과 동시에 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면서 위격적으로 구별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은 "사랑의 원리"를 그의 삼위일체론에 도입하였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요한일서 4:16)이시며 성부의 신적 본질과 성자의 신적 본질을 묶어 주는 하나의 끈이다. 어거스틴의 사랑의 역학 안에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가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을 받는 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성부가 자기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성자를 필요로 한다.
어거스틴은 성자 없이 성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성부 없이 성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사랑의 역학" 안에서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성부와 성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두 위격의 활동은 서로 일치하며 서로를 보완해 준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부와 사랑 받는 성자는 사랑의 연합 안에서 위격적으로 구별됨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어거스틴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역사 속에서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어거스틴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하나의 본질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세 위격을 관계적으로 구별하는 정통적 삼위일체론이다. 이러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구별성은 곧 경륜적 삼위일체에 그대로 계시되었음을 어거스틴은 그의 성경 주해를 통해 밝히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성서 주해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관계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원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며"(마 11:27), 영원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요 3:35), 영원전부터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 17:5). 창세 전에 영원한 지혜는 "그 (하나님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며"(잠 8:30)라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전부터 동일한 본질의 통일을 이루며 나눌 수 없는 동등성을 이룬다는 것을 가르친다. 어거스틴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이신 성자께서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렇게 영원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한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 속에 동등한 관계로 나타나셨고, 사역하셨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요 5:21)는 말씀을 주해하면서, 어거스틴은 성부나 성자께서 따로 따로 기사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한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났으므로 성자는 성부가 아시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므로 성부나 성자가 아니심을 강조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제 5 장 삼위일체적 기독론
               

       
1. 들어가는 말
개혁주의 기독론은 사도신경에서 진술되었고,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에서 다듬어졌으며, 칼케돈 신조(451년)에서 완성된 삼위일체적 기독론을 믿고 고백한다. 칼케돈 신조에서 완성된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며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사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셨지만 죄는 없으신 참 인간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한다. 또한 한 위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양성이 혼합없이(without composition), 혼동없이(without confusion), 전환없이(without conversion), 분리없이(without separation)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양성의 구별이 연합으로 제거되지 않고, 각 성의 속성들이 한 위격 안에서 보존되고 협력하신다는 것을 고백한다."
칼케돈 신조서에 나타난 기독론은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시고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간(눅 2:7, 40, 52; 요 19:28; 마 4:2, 11)이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요 1:1, 10:30, 20:28; 롬 9:5; 빌 2:6; 골 2:9)이심을 고백하는 전통적인 교리이다. 그리고 이 신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어떻게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혼합, 혼동, 전환,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시며 연합하시는 것에 관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초대시대부터 현대까지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다만 예수의 신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었을 뿐이다. 예수의 신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오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참 인성을 취하시기 위해서 신적인 속성을 포기하셨다는 "케노시스 기독론"이다. 이 케노시스 기독론은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19세기 경부터 발전하였는데, 케노시스론(kenotic theory)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신성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다는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존재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 간주하면서, 그 인간 예수를 성령(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여 신적으로 행동하게 하셨다는 "성령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신적인 인간으로만 이해한 성령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로 그들의 논리적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안의 성령의 특별한 내주 하심이 예수를 신적으로 살 수 있게 하였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케노시스 이론과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대항할 유일한 길은 칼케돈의 신앙고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칼케돈의 기독론을 "삼위일체적 기독론"이라고 정의하고자 하며, 특히 삼위일체적 기독론을 논하고자 할 때 먼저 독일의 루터란이 지지하는 "케노시스 이론"과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령 기독론"을 삼위일체적 기독론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한다.

 

2.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
케노시스 기독론은 빌립보서 2장 5-7절의 본문을 가지고 19세기 중엽 독일의 몇몇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을 형이상학적 논증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발생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신학의 반발로 예수의 온전한 인간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의 신성의 일부를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케노시스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비워 종의 형태를 취하셨다고 하는 헬라어 동사(케노, keno)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케노시스 이론은 "비우다"(to empty)라는 동사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영원 전에 계신 성자께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성의 일부 혹은 전체를 포기하셨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능, 전지, 무소 부재 등의 일부 신적 속성을 비우셨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성을 취하시고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제한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노시스 기독론은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볼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공유적 관계의 파기를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일찍이 박형룡박사는 "케노시스 기독론"(1933) 제하의 논문에서 이를 이단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케노시스 기독론 . . . 에비온파, 소시너스파, 유니테리안파, 러설파보다 나은 것이 없는 이단이오, 조선 기독교 장로회에는 결코 용인하지 못할 이단이다."

 

3. "성령 기독론"과 종교 다원주의
"성령 기독론"이란 2세기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의하여 표현된 영과 관련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개념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도교부들은 대체로 그리스도를 하늘에 속한 영이 육신을 입고 지상에서 활동하다가 모든 사역을 마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 분으로 이해했다. 성령 기독론은 칼케돈 신조에 의하여 확립된 삼위일체적 기독론 보다 훨씬 초기의 기독론이었다. 이러한 성령 기독론이 1970년대 이후 캠브리지 대학의 신학과 교수였던 램페(G. Lampe)에 의해 좀더 폭 넓게 사용되어지기 시작하였다.
랩페가 주장하는 성령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주체는 성육신한 로고스(아들)가 아니라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랩페의 견해에 따르면 영원한 삼위일체적 관계에 존재하시는 성자가 선택자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온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라는 한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완전히 사로잡혀 신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세상 속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 안에 특별한 형태로 충만하게 내재하시게 된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램페의 성령 기독론은 예수의 본질적인 유일성보다 그의 보편성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독론의 모델을 찾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다원주의자가 바로 존 힉(John Hick)이다. 존 힉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정통 기독교의 주장은 인류의 큰 다수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시킨다고 본다. 그는 이 사실 때문에 정통 기독론을 거부한다. 
더불어 존 힉은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전적으로 의식한 자로 본다. 그는 종교간의 대화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전통적 기독론에서 탈피하여 다른 종교들뿐만 아니라 세속적 신앙 속에서도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에 민감히 반응하는 성령 기독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예수 안에 계셨던 성령은 세상 속에도 보편적으로 항상 내재하여 사람들을 감화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자유롭게 자신을 개방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존 힉은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전환하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했다.
램페와 힉이 주장하는 성령 기독론은 단지 성령은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한 양식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의 성령 기독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 안의 위격적 구분을 부인하는 사베리우스적 양태론이다. 그러므로 성령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내재적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즉 성령에 대한 예수의 관계는 그의 성육신과 세례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본질적인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삼위일체적 기독론 뿐인 것이다.

 

4. 삼위일체적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령과 함께 존재하셨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초대 교부들이 발전시킨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적 기독론이다.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모든 기독론적 진술은 언제나 삼위일체의 특정한 이해를 내포하며, 그 반대로 모든 삼위일체적 진술도 동시에 기독론의 진술을 포함한다. 삼위일체 교리가 나타나게 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냐?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계시하신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부와 성자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먼저 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칼케돈 정의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또한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탄생, 성장, 세례, 시험, 사역에서 성령과 동행하시는 것을 그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지상 사역 동안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행동하신 것은 그의 인성이 신성과 혼합, 분리, 변질되는 것을 막고 온전하고 거룩한 인성을 유지하기 위한 삼위일체적 사역이었다. 즉,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예수의 지상사역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말씀(아들)의 신성이 온전한 인성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거룩하고 악의가 없고 더러움이 없이(히 7:26) 존재하는 거룩한 자가 되실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눅 1:35).

4.1.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삼위일체적 비판: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케노시스 기독론은 현대의 이성적이고 과학적 사고 위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셨는가? 라는 전통적 교리를 설명하고자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영원히 성부와 모든 신적 속성에 있어서 동등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던 성자께서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경륜 속에서 신적 속성의 일부를 포기하셨다면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기독론에서 강조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자께서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참으로 "전능하시지도, 전지하시지도, 편재하시지도" 아니하셨다면, 과연 우리의 구속을 하나님으로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결국에 케노시스 이론은, 아리우스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케노시스 기독론을 원칙적으로 부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인성을 취하는 그 순간에도 성부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상호공유의 관계로서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시는 성부와 성자는 아들의 성육신에도 그 영원한 신적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가는 성자의 탄생에 성부께서 함께 계셨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 .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또한 요한은 태초에 말씀(성자)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증하면서, 구원의 경륜에서도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은 보다 본질적으로 성부와의 삼위일체적 관계 가운데서 입증될 수 있다. 예수는 영원 전에 성부와의 관계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이신 것이다. 영원 전 성부와의 상호공유적 관계에서 성부와 동일본질로서 존재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때에도 그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4.2. 성령 기독론에 대한 삼위일체적 비판: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성령 기독론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으로 나타나신 성령이 단지 예수를 하나의 신적인 인간으로 승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인간이 아닌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예수께 임하신 첫 번째 목적은, 예수의 삶 전체가 온전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진정한 성령의 사람 혹은 신적인 인간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 오늘날 우리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이러한 입장은 성령이 예수께 임하신 두 번째 목적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탄생에서 성령으로 마리아를 덮으시고 강림하신다는 약속은 하나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실 분은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고(눅 1:35), 거룩함과 죄 없음을 유지함과 동시에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과 사역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예수의 출생이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는 개념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전혀 새로운 구속사적 일을 성취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나사렛의 예수라는 사람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거나 신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하신 삼위일체적 관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서, 그리고 성육신을 통해서 온전한 인간 예수가 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의 성령에 의한 동정녀 잉태는 요한복음 8장23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나는 위에서 났으며"라고 강조하는 말씀의 근거가 된다.

 


제 6 장 삼위일체적 성령론 I -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본 논고를 시작하기 전에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전반부에는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을 논할 것이고, 후반부는 조직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중심으로 논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이제 삼위일체론의 형성과정을 마치고 삼위일체론과 다른 신학적 주제들의 연관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교의신학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 하나는 전통적 신론에 대한 재해석으로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각된 것이다. 필자가 앞으로 3회에 걸쳐 논의하고자 하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이 두 가지 신학적 흐름 속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중요한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서방교회가 "성령의 나오심"에 대하여 초대 교회가 고백한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고백에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구절을 첨가함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서방교회가 휠리오크베 교리를 정식으로 채택한 581년의 톨레도(Toledo) 회의 때부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은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분리시키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이 현대의 삼위일체론과 함께 다시 논의되고 있다. 동방 신학자들은(특히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동방 신학자 블라드미르 로스키) 서방 교회가 휠리오크베(filioque)를 신조서에 삽입함으로써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의 존재의 원천인 성부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고 주장한다. 더 중요한 것은 서방 교회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의해서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의 위치가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성자에 종속시키는 종속론을 야기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서방 교회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강하게 변호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교리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서 완성된 삼위일체론을 더욱 정확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휠리오크베 교리는 성자의 신성과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성자를 통한 "성령의 나오심"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요 15:26)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면 당연히 성자는 "성령의 나오심"에 참여한다.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는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 원리"이심을 강조하면서, 성령은 성자로부터도 나오심을 신학화했다.
필자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논의 되어 온 휠리오크베 교리를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며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비교 연구함으로서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휠리오크베 교리의 형성과정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2. 휠리오크베 구절의 첨가(The inclusion of the filioque clause)
교회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들 중의 하나는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이 만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에 대한 일치이다. 381년에 작성된 신조서에 성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영광받으신다 . . ." 이 신조서에서 동방과 서방 교부들은 성령에 대해서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신앙을 고백한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침묵과 특별히 "성령의 나오심"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구절을 가르쳤고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Spirit is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그리고 589년의 톨레도(Toledo) 대회 때에 서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였고, 675년 브라가(Braga) 회의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아들에게서도"(filioque)라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덧붙여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라고 변경했다.
그 이후 "성자로부터"라는 의미의 라틴어 휠리오크베(filioque)는 서방 교회가 행한 이 덧붙임을 가리키게 되었고, 1000년대를 전후하여 서방교회의 예전에 일반적으로 휠리오크베가 채택되었고, 1014년 황제 하인리히 2세의 대관식에 교황으로는 베네틱트 8세가 처음으로 휠리오크베를 신조에 삽입한 뒤, 로마의 예전에도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결과적으로 휠리오크베 교리는 서방 교회 내에서 규범이 되었으며, 서방 교회가 표방하는 중요한 신학이 되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이중 발출"(double procession)의 개념인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휠리오크베 교리는 동방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서방교회 단독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1054년)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의 역사적 발전 과정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을 의미하는 휠리오크베 교리는 서방의 대표적 신학자 어거스틴이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서방교회의 전통적 교리가 되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와서 성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피조물을 성화하기 위해서 성자에게서 나오시며, 동시에 두 분에게서 나오신다."
그러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어거스틴이  휠리오크베(filioque)를 신학적으로 정립한 거의 400년 후인 9세기경 동방의 포티우스(Photius, 810-895)와 서방의 안셀름(Anselm, Archbishop of Canterbury)에 의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선교사가 불가리아(Bulgaria)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신조서에 휠리오크베 교리를 삽입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발로 서방교회의 교황과 서방 신학 전체(특히 서방의 삼위일체)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포티우스(Photius)는 휠리오크베 교리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 신학적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첫째,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의존한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그들의 삼위일체론에서 신적 존재(divine existence)의 근원을 본질(essence)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성부의 위격"에서 찾고 있다. 포티우스(Photius)는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하기 위해서 성부 한 분만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유일무이한 최고의 원인이며 근원이다.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 되며(begotten), 반면에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ing). 이 두 용어는 성자와 성령이 다른 방법으로 성부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티우스(Photius)는 주장하기를 성부만이 유일한 모든 신성의 기원이요 원천이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한 분이신 성부 안에 신성의 두 가지 원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만일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실 때 성자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주장한다면, 성령도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실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구분 짓는 "낳으심"(generation)과 "나오심"(proceeding)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에 각 위격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새로운 형태의 양태론(modalism)으로 보았다.
셋째, 포티우스(Photius)는 성경적 증거(요한복음 15:26)를 제시하면서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보내심"(sending)과 "나오심"(proceeding)은 같은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나타난 "아들의 영"(the Spirit of the Son),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라는 표현을 오직 구원의 경륜 속에서만 이해할 뿐, 내재적 관계의 "영원한 나오심"(eternal procession)과 분리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포티우스(Photius)는 주장하기를 휠리오크베 교리는 부당한 삽입이며, 성부의 주권(monarchia)을 파괴하여 삼위 안의 위격적 존재를 상대화 시킨다는 것이다. 포티우스(Photius)는 동방교회의 입장에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신학적 논쟁의 핵심으로 부각시킨 장본인이며, 성부의 위격을 좀더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좀더 경직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티우스(Photius)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from the Father alone)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동서간의 분열에 도화선을 당긴 최초의 동방 신학자이다.
포티우스(Photius)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난에 대해서 서방은 11세기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1098년 바리 회의(the Council of Bari)에서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가 안셀름(Anselm, Archbishop of Canterbury)에게 공식적으로 동방의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반박할 것을 요청하면서 휠리오크베 논쟁은 가속화 되었다.
안셀름은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공격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의지하고 있다. 안셀름은 주장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고 아들의 신적 본질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분명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성령의 신적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관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의 영"(the Spirit of the Father)인 동시에 "아들의 영"(the Spirit of the Son)이시기 때문이다.
안셀름은 또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아들로부터 "보내심"(sending)을 받은 성령(요14:16; 15:26)과 성령이 아들로부터 "영원한 나오심"(eternal procession)을 구분한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반박하고 있다. 만일 내재적으로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면 성령은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도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그리고 만일 아들이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령을 보내시면(sending), 성령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eternal proceeding)는 것이다. 안셀름은 영원한 하나님과 구원의 경륜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안셀름은 주장하기를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요10: 30)되심을 증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제 7 장 삼위일체적 성령론 II - 개혁주의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고백한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지난 주 휠리오크베 논쟁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오늘은 휠리오크베 논쟁의 신학적 배경과 개혁주의가 휠리오크베 교리를 고백하는 신학적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2. 동방과 서방의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대한 신학적 배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에 대한 신학적 배경은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있다.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을 위격이 아닌 본질의 단일성과 위격의 상호 관계성을 강조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휠리오크베 교리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캅파도키아 교부(Cappadocian Fathers)의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그들의 삼위일체론에 도입한 상호침투적 개념의 페리코레시스를 저버리고 오직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면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반박하였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논의이다. 동방교회는 삼위 간의 내적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부는 무출생자로서 "무출생성"(unbegottenness)을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갖고 계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의 내재적 관계에서 "출생성"(begottenness)과 "나오심"(procession)의 신적 속성을 각각의 위격(hypostasis) 안에 소유하고 계신다. 하지만 삼위의 관계에서 성부의 수위성은 무출생성에 의해 보장되므로 성부는 신적 존재(ousia)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성부는 그 존재의 근원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지만,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근원을 성부와의 영원한 존재 관계에서 성부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부만이 온전히 신성의 근원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의 삼위일체는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성부와 성령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설명을 하였지만, 신성의 근원을 성부의 위격에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을 성부께 종속시키는 종속론의 문제가 남아 있다. 또한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동방교회의 진짜 문제는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성부 중심의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을 서방교회는 휠리오크베 교리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휠리오크베 교리를 동방 신학의 문제점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한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적으로 "성부의 위격"에 두지 않고 단일 존재로 보고 그 안에 세 위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위격들이 논리적으로 신적 본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은 성부의 위격이 아니고 삼위의 근원이 되신 "하나의 본질"이다. 성부와 성자의 위격의 동일본질(homoousios)로부터 출발한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는 본질적인 면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관계"와 동방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한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지난 번에 지적한 대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본질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동시에 삼위의 동등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의 기본 개념인 동시에, 휠리오크베 교리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휠리오크베 교리는 한 본질을 중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전통이다. 한 신적 본질을 중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관계'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휠리오크베 교리는 개혁주의가 그 신학적 전통속에서 받아들인 하나의 삼위일체적 신학이었다.

 

3. 휠리오크베 교리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서방교회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동방교회는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구별성을 강조하였다(특히 휠리오크베 교리를 반박함에 있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교리에 대한 주된 차이는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동방교회는 성령이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자로부터 나아가심과 그리스도의 영되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도 성령이 구원사적으로 성부와 성자의 파송(sending)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구원의 경륜 속에서 나타내신다. 하지만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별을 강조하는 동방 신학은 경륜적으로 나타나신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이 내재적 삼위일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동방교회는 성부의 주권을 신성의 유일한 뿌리와 근원으로 보면서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듯이, 성령도 성부로부터만 단일하게 나오신(proceeding)다고 믿는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휠리오크베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요 15: 26)라는 구절에서 서방교회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즉,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도 똑같이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것이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아버지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내재적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나오심에 함께 참여하시는 것이다.

 

4. 휠리오크베 교리는 성부와 성자께서 동일본질(homoousios)이심을 주장한다.
휠리오크베 논쟁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유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동방과 서방 모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서 형성된 근본적인 삼위일체 신학을 고백하지만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이 다르다. 동방교회는 삼위일체의 한 본질(una ousia)과 세 위격체(treis hypostases)를 해석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본질보다는 위격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한 동방교회는 니케아 이전의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강하게 나타난 군주신론적 삼위일체론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만, 동방의 삼위일체론 안에는 군주신론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방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군주신론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주권"(monarchia)과 "신성의 근원"은 성부의 위격이라고 강조하면서 삼위 안에 한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성부의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은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나오심은 성부의 주권적 사역인데 만일 성자가 "성령의 나오심"에 참여 한다면 하나님의 단일한 주권(곧 성부의 주권)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동방교회는 성자가 두 번째 원리라거나 혹은 성부와 더불어 한 원리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한다.
동방교회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발전시켰다면, 서방교회에서는 삼위의 신성이 하나라는 단일성의 원리이다. 서방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에 기반을 두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세 위격들의 내부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방교회는 신적 본질의 단일성을 크게 강조하면서, 그 단일성 안에 삼위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서방교회는 "성령의 나오심"에 있어서 "성령의 나오심"(proceeding)을 성부의 고유한 주권(monarchia)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는 각자의 위격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단일한 본질이시므로 신성의 근원을 성부의 위격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은 "성령의 나오심"은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본질이신 성부와 성자의 "이중 발출"(double procession)인 것이다.

 

5. 휠리오크베 교리는 성자와 성령의 상호공유적(perichoresis) 관계를 강조한다.
우리는 앞의 논지에서 서방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동방의 삼위일체 속에 내재된 성부의 위격에 대한 성자와 성령의 종속적 위험성과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침묵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교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서 성령의 위치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삼위일체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보완하는 하나의 신학적 대안으로 상호 공유적 개념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도입해야 한다. 내재적으로 상호공유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대로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경륜에서 각기 다른 시점에서 다른 존재의 양식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세 분의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행위에 상호공유의 관계로 위격적으로 참여하시는 것이다. 내재적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공유의 관계는 경륜적인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에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재적 상호공유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과정에서도 서로 도우시며 사랑하시는 상호공유의 역동적 관계로 사역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원하신 상호 공유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사역하시는 아들(곧 말씀)과 성령의 동등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가 온전히 주장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 속에서의 성령과 성자가 상호 공유(perichoresis)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공관 복음서는 삼위일체의 상호 공유적 관계 속에서 성령님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지상 사역을 이끄는 모습으로 묘사하신다. 즉, 성령이 메시아 위에 머물 것이라는 것은 메시야가 성령의 강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물게 된 것은 그의 성육신 사건부터이다. 마태복음 1:20절에 기록되기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즉, 성육신의 사건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성자께서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신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의 세례 때도 예수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시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령이 확증하셨는데, 이것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마 3: 16-17). 시험을 받으실 때(마4:1),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마12:28) 등등 공관복음서에서 성령은 삼위일체적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끄는 관계로 묘사된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고, 성자의 뜻 가운데 활동하신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 14:16), 또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고 기록하고 있다. 성자는 삼위일체적 교제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파송 하시고 성령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모든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육시키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아들의 영"으로 묘사하므로, 구원의 사역 속에서 아들이 성령의 사역을 주도하시는 관계로 말씀하고 있다(롬 8:9; 고후 3:17; 갈 4:6; 빌 1:19).
성자와 성령은 영원 전에 상호공유의 관계로 존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시된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도우시며 상호공유의 관계로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상호 공유적 관계를 삼위일체 신학 안에 회복시키는 것을 휠리오크베 교리에 대한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 8 장  삼위일체적 구원론

 

 

 1. 들어가는 말
개혁주의 구원론은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든 성도들은 성부의 예정하심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기반 위에 성령의 능력 있는 사역을 통하여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찰스 핫지는 "성부의 구원계획"(예정),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속죄), 그리고 이 사역을 성도의 구원에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들을 구원론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구원론은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적 구원론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종교다원주의에서 주장하는 구원관과 구별이 되고, 알미니우스적 전통에서 주장하는 만인구원론과도 구분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먼저 삼위일체적 구원론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하고, 삼위일체적 구원론의 기본 구도로 칼빈의 5대교리를 중심으로 삼위일체적 구원론을 논하고자 한다.

 

2. 삼위일체적 구원론이란?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영원 전부터 계시던 세 위격(Three Persons)의 한 하나님(One God)은 계시 속에 나타나셔서 구원의 사역 속에서 "아버지의 예정", "아들의 대속", "성령의 인치심"으로 삼위일체적 구원사역을 완성하신다.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의 상호공유의 관계 속에서 창조와 그 후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구원  받을 자들을 택하셨다(엡 1:4-5). 아버지가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성령의 상호공유의 관계로 아버지의 택한 자들을 위하여 성육신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성육신한 아들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셨고 믿는 자들의 택하심에 동참하셨다(요 1: 1-5; 엡 1:4-5). 그리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성령은 함께하셨다(엡 1:7; 요일 2:1, 4:10). 성령은 아들 예수께서 이룩하신 구원을 결실 하도록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ilioque) 보내심을 받으셨다(요 15:26).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고 속죄함을 입은 자들의 중생(회심과 믿음)과 성화라는 실제적 사역을 주도하신다. 삼위일체적 구원론이란 이와 같이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아버지의 예정하심으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추구하는 신앙의 전인적인 삶(holistic life)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구원론이 바로 개혁주의적 구원론이고 칼빈주의적 구원론이라 말할 수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원론(혹은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일차적으로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하는 구원론과는 구별되며, 더 나아가서 알미니우스적 전통의 구원론과도 구별이 된다. 유일하고 참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그리고 그 분을 통해 계시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구원 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와 알미니우스적 전통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원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초월적인 신의 구원을 말하고 있거나 인간의 행위를 그들의 구원관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과 교제하며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삶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empowerment)과 충만함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는 능력 있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체험을 통하여 변화된 삶을 살며, 구체적인 삶의 현장 곧 사회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종교적 신비주의나 알미니우스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열광주의, 금욕주의, 반지성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주관적 체험주의, 분리주의, 공로주의 등과 같은 것들을 지양하며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한다.

 

3. 삼위일체적 구원론과 칼빈의 5대교리

3.1. 인간의 전적 타락
삼위일체적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피해야 할 한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자유주의 전통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신앙이다. 인본주의적 신앙이란 인간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의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해야 할 필요성이 없으며, 단지 바른 교육과 좋은 환경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적(Pelagian) 구원관이다. 또한 인본주의적 신앙은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하여 단지 부분적으로만 부패되어졌으며, 그러기에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알미니우스적 신앙이다.
하지만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되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상 죄로 죽은 자들임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이것이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적 구원론이요 삼위일체적 구원론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 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니 자력으로는 회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래 "모든 선에 대해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경주하게 되었다"(롬 5;19).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동시에 자원하여 범죄하는 죄인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3.2. (성부의) 주권적 선택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먼저 성부의 위격과 사역(예정, predestination)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날 성부는 점점 더 "잊혀진" 존재로 이해되어 지고 있다. 다른 위격들이 아닌 성부에게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전통에도 불구하고(주기도문), 우리는 구원의 계획자로서 성부의 특정한 역할에 대해 점점 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루터란과 알미니우스적 신학 전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신학 전통은 구원에 있어서 성부의 주권적 선택하심을 약화시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성부)의 작정에 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되고 어떤 자들은 영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의 영원 불변하신 목적과 오묘하신 계획과 기쁘신 뜻대로 영생하기로 예정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으니 이 선택은 피조자 속에 예견되는 신앙, 또는 선행 기타 그들이 갖고 있는 아무것도 조건으로 하거나 이유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일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찬송을 기리기 위함이다."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독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은 그 뿌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의 어떤 공로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그의 미쁘신 뜻대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성부의 선택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롬 8:29-30).

3.3. (성자의) 제한적 속죄
삼위일체적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즉,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성부와의 영원한 언약 가운데서 성부께서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택자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느니라. 또한 합당한 때에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고 성결함을 입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느니라. 택함 받은 백성 외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으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한 사람도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들과 구속된 자들이 동일함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 . .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 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 6, 9-10). 성자의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에 족하나 삼위일체적 관계 속에서 성자의 속죄는 성부의 주권적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유효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구속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3.4. (성령의) 유효적 혹은 불가항력적 은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유효적 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는 하나님이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사 저희의 본질상 속해 있는 죄와 죽음에서부터 나오게 하시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 . . 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 안에 예지된 어떠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으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 새롭게 된 후에 이 부르심에 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주시마고 하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에 의해 피택자들에게 유효케 되어 그들로 회개하게 하여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혀 성령 사역의 산물로서 인간의 영혼은 단지 수동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다.

3.5.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성도의 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성도의 견인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하여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 자들은 전적으로나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될 수 없다. 오히려 최후까지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얻게 된다." 참 신자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하여 범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타락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17).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내가 확신하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35-39).

 

 

제 9 장  삼위일체적 교회론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이제까지 약 9주에 걸쳐서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을 논하였다. 전반부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관하여, 후반부에서는 조직신학의 핵심 주제들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이제 집필을 마무리 하고자 하며 이제까지 부족한 필자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뿌리와 뼈대를 이루는 정말로 중요한 신학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인 삼위일체론은 그 동안 신론의 한 분야로만 취급되면서 우리의 신앙고백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신학의 핵심적인 교리로 이해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개혁주의가 삼위일체론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우선 그것이 모든 신학의 발전에 근본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그러므로 모든 신학은 삼위일체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 교리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와 신학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교리신학의 핵심적 교리로 부활시키면서 전통적인 교의신학을 삼위일체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제까지 필자가 전개한 삼위일체적 신학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필자 나름대로 개혁주의 신학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하나의 노력이었다.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으나 언젠가는 삼위일체적 교의신학을 정립하는 것이 필자의 꿈이며 소망이다. 바라기는 좀더 많은 동역자들이 필자의 꿈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의 마지막 주제로 삼위일체적 교회론을 선택하였다. 먼저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하고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을 지적한 후에, 삼위일체적 교회론에 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2. 개혁주의 삼위일체론: 본질의 단일성과 위격의 삼위성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삼위     일체론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학의 기초를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한다. 즉,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과의 관계 이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적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경륜 과정에서도 자신을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아리우스주의가 주장하듯이 위격의 삼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질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반대로 사벨리안주의가 주장하듯이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위격의 삼위성도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칼빈이 동방의 그레고리의 나지안주스 말을 인용한 다음의 정의를 따른다: "나는 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때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을 수 없고, 삼위를 명확히 발견하려 하면 즉시 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신적 본질의 단일성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안에 "하나의 영원하고, 전능하며, 전지한 신성"이 있는 것과 하나님 안에 "하나의 정신, 하나의 의지"가 존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신성은 위격과 구분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시지 않는다. 하나의 신성은 각 위격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세 위격 안에 동일한 본질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위격의 삼위를 생각할 때 한 하나님 혹은 한 신성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위격의 삼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위격의 삼위를 일체이신 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대신, 한 분 한 분이 분리되어 계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성부께서 스스로 계실 때에는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오직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아버지로 이해한다. 하지만 성부께서 하나님이심은 그 스스로가 성자와 성령과 분리되셔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고,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즉, 삼위의 상호 공유적 관계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의 신성이 나타나시기 때문에 성부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신적 본질은 세 위격의 상호 공유적 관계 안에서만 나타나시기 때문에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한 것은 세 위격의 "상호 공유적 관계성"이라 하겠다.

 

3. 세 위격의 상호 공유(침투)적 관계성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그들의 삼위일체론에 도입하였고, 서방의 어거스틴이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완성시킨 상호 공유적(perichoretic) 관계(혹은 사랑의 관계)로서 위격의 개념을 받아들여,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시면서 삼위의 "위격 공동체"이심을 고백한다. 상호 공유적 위격의 개념은 위격을 다른 개인들(other individuals)과 분리되는 개인(individual)의 개념이 아닌, 공동체적 혹은 관계적 위격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위격 공동체의 개념은 세 위격들이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각각의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의 생명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 공동체"(a community of being)라는 이미지가 자주 상용되는데, 존재 공동체 안에서 각 위격은 각각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위격들을 통찰하며 또한 다른 위격들에 의하여 통찰된다. 그러므로 성부의 위격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성자의 위격도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성령의 위격도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위격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공유적 위격의 개념은 곧 예수께서 그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 14:11; 17:21).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완성된 상호 공유(perichoresis)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의 신적 본질이시며, 세 위격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부터 역동적으로 서로 사랑하시고 섬기시며 교제하시므로 스스로 하나님이시다(출 3:14). 이렇게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역동적인 상호 공유와 교제 가운데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공동체적 본질을 계시하신다. 즉, 자신의 공동체적 삼위일체 형상(image)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창 1: 26-27; 2: 24) 구원의 섭리 가운데 나타난 교회 공동체(행 2장)와 영원하신 위격 공동체로 존재하시던 성자와 성령이 교회 공동체 속에서 상호 교제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 계신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시작한 교회도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끊임없이 그 공동체성을 발전시키고 그 안에서 참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4. 삼위일체적 교회론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다.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나간 어느 세기보다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시작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근원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인 인식과 영적인 교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론은 삼위일체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구성되고 역사의 삼위일체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부의 구원계획과 선택, 성자의 대속, 성령의 사역이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논하고자 할 때 삼위일체론의 핵심적 주제인 상호 공유적(perichoretic) 위격 공동체 개념을 적용시키고자 한다.
삼위일체적 교회론은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발전시키고 어거스틴이 완성한 상호 공유적(perichoretic) 관계로서 위격의 개념(the concept of person)을 받아들여, 그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동적인 위격 공동체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의 하나님이시지만, 위격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 공동체"를 형성하시며 각 위격은 각각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한 위격도 다른 두 위격들과는 분리되어서 존재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본질이시며, 세 위격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부터 위격적으로 서로 사랑하시고 섬기시며 교제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역동적인 상호 교제 가운데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 가운데, 즉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공동체적 본질을 계시하신다.
이러한 위격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위격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참된 공동체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위격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성부는 권위자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을 사랑하고 섬기며 교제하시기 위하여 존재하신다. 성자도 성부와 성령을 사랑하고 섬기며 교제하기 위해서 존재하신다. 성부는 성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성자는 성령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의 뜻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체로 존재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섬기시며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섬기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위해,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위해,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온전한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는 교회 공동체성의 표본이 되어 교회의 공동체 속에 투영될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을 형성시켜 나가신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떤 한 위격의 사역이 아니라 세 위격체의 공동체적 사역이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롬 12:4, 고전 12: 27, 엡 4:12)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개념은 교회의 유기체적 특징을 설명하면서 교회가 곧 성령의 "은사 공동체"(charismatic community)라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된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에 따른 다양한 은사를 활용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장소이다. 삼위일체적 관계에 바탕을 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공동체적 사역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상호 교제와 사랑과 섬김의 위격 공동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교회도 이를 따라 온전한 "공동체적 교회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최근에 한국 교계에서는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계급적, 위계적 질서에 강한 비판을 하면서 이러한 세속적인 개념들이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반성과 함께 교회 공동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이 위격적으로 서로 사귐과 교제, 봉사와 섬김의 삶 속에서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가 위격의 관계적 공동체가 되도록 창조하셨고, 이러한 관계적 교회의 개념 속에서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고 공동체를 섬기는 구체적인 영성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제의 관계를 반영하는 공동체성을 우리의 삶 속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내셨다. 다시 말해서 성자의 완전한 구속 사역이 오순절 이후 주의 교회가 성령 공동체가 된 것이다. 성령은 성자와 함께 직접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우시며, 그 공동체의 주인이 되셨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성자의 주관하심과 영원한 보증하심을 통해서 온전한 공동체로서 자라나간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을 가지고 20세기를 점검하고 도래하는 21세기를 맞이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