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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호남의 눈물 -허주

by 설렘심목 2018. 12. 6.

  호남의 눈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

 호남인은 다 죽이고 일본인을 그곳에 이주시켜라"

호남 대학살은 계획된 살육이었다.   

 

남원성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명군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파견한 천병(天兵)이라는 대국 이미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뿐 아니라 당장 중국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전라도를 중국 수도권과 연결되는 중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산둥(山東)반도와 바로 마주한 대안(對岸)이 전라도이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전라도를 지켜야 하고, 그 관문인 남원을 사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經略複國要編’)

 

왜군이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성까지 무혈 입성함으로써 서해와 호남을 장악했다.

 왜군이 전라도에서 서해를 건너 산둥반도 혹은 베이징(北京)으로 바로 쳐들어갈 수도 있는 전황이었다.

 

 조선도 전라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은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라도가 없으면, 비록 다른 도가 있어도 나라의 근본을 삼을 데 없다.

이 때문에 왜적은 전라도를 기어이 빼앗으려 하고, 우리는 꼭 지키려 하는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는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왜군의 수상쩍은 움직임만 보이면 도주하려 했다. 선조의 도피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늘 나를 겁쟁이로 여기지만 짐의 안위를 서둘러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실록)

 

임진왜란 때의 왜군과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확연히 그 행위가 달랐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을 죽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라는

 주인장(朱印狀·붉은 도장이 찍힌 명령서)에서 군사들의 약탈, 난폭, 방화 등 불법적 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납치 등을 하면서도 무자비한 학살은  덜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왜군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고 히데요시도 이를 묵인했다. 

 그런데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히데요시는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호남을 이렇게 하라고 명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호남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의 서도(西道) 사람을 호남에 이주시킬 것이다. 

십년을 이렇게 하면 일본 땅이 된다.(난중잡록) 히데요시는 처조카 히데아키를 왜군 총대장으로 임명하며 지시한 말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 자식이 대를 이어 조선을 굴복시킬 것이니 장기전을 펼치라고 장수들에게 주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일본 서도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는 말은 그냥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군에게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상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으로 보내 농사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군사로 훈련시켜 조선 전부와 중국까지 들어갈 것이다. (선조실록)  

조선인을 잡아서 일본의 노예로 삼고 대신 일본사람들을 병력으로 차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히데요시가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가 빈 땅을 만들겠다고 집요하게 지목한 곳이 바로 호남이다.

 조선이 지금까지 버틴 것은 조선 수군과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호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기피하는 왜군들에게, 전쟁은 출세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고 선동하였다.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점령지에서 포로 사냥, 재물과 식량 약탈, 부녀자 겁탈 등을 무제한 허용했다.

병사들이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보증까지 섰다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본 뒤 그 실정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전라도는 병화(兵禍)가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습니다.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고.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은 흙집 속에 숨어있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의욕이 없었습니다. 입에 풀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심되고 참담하여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선조실록)

 

이제부터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땅이다. 1911년 봄, 전라도 나주군 왕곡면의 한 할머니는 자기네 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어요. 일본 사람 하나가 헌병과 순사까지 데리고 와서 논두렁에 팻말을 박는 것이었어요.

할머니는 한걸음에 달려가 소리쳤습니다.“남의 논에서 무엇을 하는 게요?” “보면 모르겠소? 여기는 동양 척식의 땅이라고 표시를 하고 있소.” “누, 누구 땅이라고? 여긴 내 땅이오. 내 땅!”

할머니는 팻말을 뽑으려 달려들었다가 일본 헌병에게 떠밀리고 말았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였기에 남의 논에 팻말을 박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걸까요?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12월, 일본인을 한국에 이민시키는 회사로 설립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도울 책임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세워 자원을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려 합니다.

 경험이 많고 부지런한 일본 농부를 한국에 이민시켜 농업 기술을 가르치는 회사를 운영하는 한국인에게 돈도 빌려 주겠습니다.”

 

그런데 자원을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킨다던 회사는 헌병들을 앞세워 헐값에 땅을 사들이기 바빴습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차지하려고 농민을 협박하거나 농사를 방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지요. 특히 날씨가 따뜻하고 농사가 잘 되는 남쪽 지방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살기 좋은 곳에 일본 사람을 이민시키려는 계획이었지요.

일본은 왜 일본인을 한국에 이민시키려고 했을까요?

 

당시 일본은 빠른 근대화를 거치며 여러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도시 사람들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산업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렸지만, 집이나 식량이 부족해 고통을 겪고 있었지요. 품삯마저 적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보내려 했지만 두 나라가 모두 거절했합니다. 그래서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페루 같은 곳으로 농업 이민을 보냈고, 물좋고 산좋고 가까운 한국으로도 눈을 돌립니다.

 일본 사람을 이민시키면 가난한 도시민 문제도 해결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다스리기 쉽다고 생각했지요.

 

소작농, 소작이란 논밭을 갖지 못한 농민이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가을걷이한 곡식을 땅 주인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소작인은 나쁜 주인을 만나지만 않으면 추수한 곡식을 땅 주인보다 많이 가져갈 수 있었어요.

 또 특별한 사정이 아니라면 땅을 계속 이용할 수 있지요.

  국가가 소유한 땅도 소작료와 약간의 세금을 내면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땅 주인이 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회사와 농민은 농사를 짓기 전에 계약을 맺어요.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계약 기간 동안만 농사를 짓게 했고, 소작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을 깨거나 다시 계약을 맺지 않았어요. 소작료도 껑충 뛰었지요.

 더욱이 땅 주인이 내야 할 세금, 비료 값, 씨앗 값까지 모두 소작인에게 떠넘겼습니다.

 이것을 내지 못하면 동양 척식은 농민의 집을 쓸어 가다시피 했어요.  볏짚이든 물동이든 이불이든 그릇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갔어요. 어떤 집에서는 물건을 모두 빼앗아 광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우고 가 버렸습니다.

 

“다 가져가거라. 밥 먹는 숟가락은 이제 필요도 없다.” 먹을 게 없으니 숟가락마저 필요 없다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한국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 주었어요.

만약 돈을 제 때 갚지 못하면 빌린 돈보다 훨씬 값나가는 땅을 강제로 빼앗아갔습니다.

 농민들은 동척(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줄임말)이 아니라 도둑질해가는 ‘도척’이라며 아무리 급해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서는 돈을 빌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조선 농민들 간도와 만주로 쫓겨 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자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본격적으로 일본 이민자를 모집합니다. 한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면서 한국인은 농사를 지을 곳이 없어졌어요. 가난한 농민들은 살 곳을 찾아 간도로, 만주로 떠나야 했습니다.  

농민들 대부분이 추운 겨울에 만주로 떠났어요.

가을걷이를 끝내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추운 겨울, 가난한 농민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짐이라야 이불 보따리 하나, 옷가지 몇 개, 숟가락이 전부였지요.

 남편이 단출한 이삿짐을 등에 지고, 아내가 아이를 등에 업으면 이사 준비는 끝이었습니다.

 

“일본 사람은 쌀밥 먹으러 한국에 오는데 우리는 잡곡밥 먹자고 만주로 떠나는구나!”

간도나 만주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우리 민족이 땅을 일구었던 곳이에요.

 국경 쪽에 살던 사람은 자연재해나 전염병으로 농사를 망치면 강을 건너 간도로, 만주로 갔어요.

아침에 간도에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거나, 봄부터 가을까지 간도에서 지내며 농사를 짓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춥고 비가 적게 내려 논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만주에서 한국 사람은 가장 먼저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오랫동안 날씨를 연구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한국 사람을 단체로 이민시켰습니다. 일본은 그럴듯한 말을 내세워 이민자를 모집했습니다.  “한국처럼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가난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광활한 만주는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한국인 마을을 만들고 집까지 지어 놓았으니 이민을 신청하십시오. 농기구나 씨앗도 모두 줍니다.

일본은 만주만 가면 저절로 부자가 될 것처럼 떠벌렸고 한국 사람은 그 말에 속아 이민 길에 올랐지요.

그러나 만주는 일본이 말한 모습과는 정반대였어요. 척박한 땅에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전부였어요.

 

한국인 마을은 독립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동포들이 사는 마을을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요.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 거친 땅을 일구고 밤이면 흙성을 쌓거나 구덩이를 파는 일에 시달렸습니다.

이 무렵 동양 척식주식회사는 만주까지 진출해서중국의 황폐한 땅을 값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거나 힘들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이자와 세금으로 뜯어 갔습니다. 한국 농민들은 만주에서까지 동양 척식주식회사의 횡포에 시달렸지요.

 

만주와 간도, 만주는 압록강, 두만강 북쪽이 중국 땅을 가리킵니다. 역사적으로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습니다.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말갈족,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 등이 점령했습니다. 간도는 만주 지역 중에서도 한국인이 특히 많이 사는 지금의 옌볜 지역입니다.

 

조선인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만주 동양척식회사 사장에 조선인 사업가 김연수를 임명하였습니다.

 김연수는 민족 지도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입니다.(다음에 계속) 허 주 제공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