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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usic

쓰디쓴 커피 같은 브람스, 투박한 껍질 속의 달콤한 열매 [이채훈의 힐링클래식] 교향곡 4번 E단조 Op. 98.

by 설렘심목 2014. 11. 18.


 
브람스, 투박한 껍질 속의 달콤한 열매

교향곡 4번 E단조 Op.98                   &      

  (글쓴이 :  이채훈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전 MBC PD )

 

1853년, 스무 살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슈만과 클라라의 집을 처음 방문한 건 낙엽 지는 가을이었다. 그는 갓 작곡한 소나타 1번을 연주해 보였다. 슈만은 <새로운 길>이란 평론에서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나타난 거장”이라며 브람스를 격찬했다. 이 글 덕분에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선배의 큰 기대는 젊은 브람스를 무척 부담스럽게 했다. 슈만의 의도와 달리 브람스는 극도로 긴장했고, 자기 비판적인 성격이 더욱 굳어졌다.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은 낭만시대 작곡가들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환희의 송가>로 교향곡의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는 미래를 향해 날아갔다. 새로운 관현악법의 교향시와 거대한 악극으로 베토벤과 다른 세계를 열어 보였다. 브람스는 과거로 걸어갔다.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를 너머 팔레스트리나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옛 음악을 연구했다. 옛 거장들의 유산 속에 음악적 자산이 이미 다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교향곡에서 베토벤과 비교되는 운명을 피해 갈 수 있는 작곡가는 없었다. 

  
▲ 20살 무렵의 브람스(1853)
 

브람스는 교향곡을 섣불리 내놓지 않았다. 1876년 첫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0년의 산고를 겪었다. 그 기간, 브람스는 베토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했다. 첫 교향곡은 C단조의 조성이 베토벤 5번과 같았고, 4악장의 웅대한 행진이 베토벤 9번의 피날레를 연상시켰다. 이 곡이 초연되자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드디어 베토벤 교향곡 10번을 얻었다”며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이러한 평가에 브람스는 물론 기뻐했지만, 마음 한켠이 씁쓸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며 칭찬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 사람만 못하다는 말 아닌가. 

브람스는 이미 빈 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인사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과 비교하는, 칭찬인지 아첨인지 모를 평론가들의 입방아는 계속됐다. 한스 폰 뷜로는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위대한 3B”라고 치켜세웠다. 브람스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필생의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교향곡 중 베토벤과 비교되지 않은 건 마지막 작품인 4번 E단조, 단 하나였다. 

브람스는 ‘고통을 넘어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전형을 버리고, 마지막 4악장마저 어두운 색조로 칠해 놓았다. 이 피날레는 형식마저 바흐, 헨델의 파사칼리아를 연상케 하는 춤곡과 짧은 변주들로 이뤄져 있다. 트럼본이 힘차게 제시하는 샤콘느 주제가 무궁무진하게 변주되며 음악적 갈등이 심화되고,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숨가쁘게 치닫는다. 브람스의 복고 취향은 느린 2악장에도 나타난다. 호른이 연주하는 도입부는 중세 그레고리아 성가의 기법인 프리지아 선법으로 돼 있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호른 시그널을 클라리넷이 받아서 차분하고 엄숙한 색채를 더한다. 현악기의 서정적인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3악장의 지시어는 브람스로서는 파격적인 알레그로 지오코소(생기있게 뛰놀듯)다. 베토벤 교향곡 7번처럼 자유분방하며, ‘바커스의 축제’라 불릴 정도로 화려하고 힘차다. 피콜로와 트라이앵글까지 등장하여 화려한 색채를 더한다. 하지만 형식만큼은 전통적인 스케르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 1894년 무렵의 브람스
 

이 곡에는 낙엽 지는 늦가을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짙게 배어 있다. 브람스의 우수어린 색조는 만년이 될수록 짙어져 갔다. 평생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살다 간 브람스는 이 곡에서 완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다. 슈만은 브람스를 처음 만난 뒤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부인 클라라 슈만(1819~1896)은 평생 브람스의 음악적 연인으로 살았다. 브람스가 걸어간 인생길에 여러 여성이 교차했지만 40년 넘도록 한결같이 존중하고 아낀 소울메이트는 클라라뿐이었다. 
  
그녀는 “브람스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열매”라고 했다. 브람스는 4번 교향곡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산골 뮈르츠추슐라크(Mürzzuschlag)에서 말했다. “이 작품이 기후 영향을 받는 게 아닌지 두렵네. 여기서 생산되는 버찌는 결코 단맛을 내는 법이 없어.” 브람스는 아침마다 아주 진하고 독한 블랙커피를 마셨는데, 이 교향곡 또한 쓰디쓴 커피 맛을 닮은 게 아닐까. 그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무뚝뚝한 태도와 엉뚱한 언행으로 가린 채 살았다. 이 투박한 껍질은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4번 교향곡의 달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클라라 슈만 아니었을까?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낙엽 뒹구는 1895년 가을의 아침, 브람스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벌써 40년이 넘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인터메조를 연주했고, 브람스는 묵묵히 들었다. 77세 할머니가 된 클라라, 63세 초로의 브람스…. 두 사람은 지난 세월을 되새기며 힘없는 미소를 나누었다. 이듬해 5월,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브람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서둘러 출발했지만 그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이미 숨이 멎은 그녀를 보며 브람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떠나는 길을 향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장례가 끝난 뒤 브람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을 묻었다네.”  

  
▲ 브람스 교향곡 4번의 자필 악보
 

브람스는 4번 교향곡 자필 악보 1악장의 첫머리, ‘BG---EC---’ 음표 아래에 “오, 죽음이여, 죽음이여”라고 써넣었다. 이 곡을 클라라의 죽음에 바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비탄에 젖어 말했다. “이렇게 고독한데,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브람스는 이듬해, 1897년 4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