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고대와 중세역사(BC 300~AD 1500)
[2]로마제국
(서로마BC 753-AD 476, 동로마 BC 753-AD 1453)
[2-1] 전설적 시대와 공화정 시대
1]전설적 시대(BC 753-BC 510,240년간)
본래 이 지역의 이름인 이탈리아라는 '송아지의 땅'이라는 뜻의 고대 이탈리아어 Vitelia에서 유래하였으나, 한번도 이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이 되지 못하였다. 1861년 에마누엘레(임마누엘)2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정식 국가의 명칭으로 쓰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BC 10세기 전후 철기시대에 이탈리아 반도에 사람이 정착하였다.
BC 8세기이래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 그리고 켈트인 등이 이주해왔다.
BC 7, 6세기에는 로마인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여 로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설적 건설자는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이아스는 앞장 트로이 전쟁에서 소개하였다. 아이네이아스가 티베리스(현: 테베르)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라티움 땅에 사는 사람을 라틴족이라 하였고 그들이 쓰는 언어를 라틴어라고 하였다. 라틴어는 1세기부터 세력을 얻었으나 그 후 BC 3세기부터 로마가 그리스문화권과 접촉하여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고전 라틴어가 형성되었다. '코이네(Koine) 그리스어'가 그리스 세계 전체에서 쓰이게 되었고, 신약성경도 이 언어로 쓰였다.
그의 후손에는' 레아 실비아'라는 소녀가 후계자 위치에 있었으나, 음모자들은 그녀가 후계자가 되지 못하도록 무당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들에 바람을 쐬러 나아갔다가 군신 마르스와 관계를 가져 임신하여 '로물레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를 여신 베스타의 도움 받아 낳았으며, 그녀는 남 모르게 요람에 담아 테베르강에 버렸다고 한다. 이 쌍둥이를 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며, 이들이 성장하여 파렌티노 언덕에 도시국가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것이 BC 753년이라고 한다.
로마는 로물레스와 레무스 두 형제의 이름에서 왔다고 하며, 이후로 7왕이 다스렸다고 한다. 마지막 왕은 *에트루리아인이 왕이었으나 *'루크레티아 사건'으로 로마 상층민이 추방하고, BC 510년경부터 공화정치를 하다가, 옥타비아누스 이후부터는 실제적으로 황제정치 시대가 되었다.
*에트루리아
그들의 기원은 잘 모른다고 하며, BC 10세기경에 로마 북쪽에 정착하였다. BC 7세기부터 BC 4세기까지,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까지는 로마를 지배하였다. 그리스와 동방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문화를 로마에 전하여 주었다. 이들이 거주한 곳이 현재의 토스카(가죽이 유명)지방인데, 로마는 이들이 사는 지방을 투스키아라고 하였고, 이것이 토스카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는 이들로부터 정치적으로는 관직과 관복 및 관직의 표지를 받아들었으며, 스포츠는 마차경주와 검투사 경기를 받아드렸다.
건축은 아치와 돔형이 신전건축에 도입되었고, 이것은 후에 로마네스크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아치와 돔형의 특징은 기둥을 많이 세우지 않아도 됨으로, 큰 건축물이나 다리를 놓은 데 편리하였다.
*아피아 가도(성경: 압비오)는 아치와 돔형의 건축방식으로 만든 유명한 도로이다.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 페니키아 문자→ 에트루리아 문자→ 로마 문자→ 영어가 되었다.
*루크레티아(BC?-BC509)의 사건
로마에 루크레티아라는 굉장한 미인이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콜라티누스'라고 한다. 당시 로마를 다스리는 왕은 에트루리아왕 '타르퀴니우스'이었다. 그런데 에트루리아의 청년들이 그녀를 납치하고 왕의 아들이 그녀를 능욕하였는데,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결하였다.
이 이야기가 전하여지자 민중과 상층민이 일어나 타르퀴니우스 왕을 무력으로 추방하여, 에트루리아 왕정은 끝나고 로마는 이 때부터 공화제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로마제국의 첫발을 내 딛게 되었다.
그 때의 주역인 부르터스는 로마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세익스피어는 '루크레티아의 능욕'이라는 이름으로 각색하였다.
*아피아 가도(성경:압비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을 만든 도로이다.
BC 312년에 아피오 글라디오(그의 이름에서 유래)가 시작하여 황제시대에 공사를 마쳤다. 로마로부터 사방 29개의 도로가 약 90,000Km에 달하였고, 마차 두 대가 왕복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인들이 행군 할 때에 무기가 부딪치지 않는 넓이, 행군시에 병사가 지치지 않도록 삼나무와 소나무로 가로수를 만들으며, 강에는 다리를 놓고, 산은 뚫어 가능한 직선으로 하였다.
도로는 다진 후에 돌을 박은 것이 지금은 탱크가 달려도 파손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자와 군사이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든 고대 고속도로라 하겠다. 일부는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의 가로수인 소나무는 지금도 로마의 가로수로 남아있다.
당시에 땅 전체를 측량하여 도로를 계획하였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지금도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당시에 만든 길로 관광버스 두 대가 교차하여 지나갈 수 있다. 카이사르는 이 길을 따라 일주일에 900Km나 달렸다고 한다.
압비오(사도행전 28:15)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이 길을 따라 갔는데,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로마에서 60Km나 떨어진 여관 3개(삼관)가 있는 역까지 마중 나왔다고 기록되었다.
로마는 바울이 처음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마중 나온 신자는 누가 전도하였을까? 또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3000km가 넘는 장거리여행 중에 통신망도 없었를 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의문도 생긴다.
이 신자들의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는,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한 날을 생각할 수 있다. 이날 3000명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10절에 보면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두 번째는 바울이며,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믿게 된 사람들이 로마로 이사와서 살게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으로 이방인이며, 베드로에게 전도 받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의 전도에 의하여 믿게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을 정확하게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고넬료의 통신망을 통해서가 아닐까? 그러면 마중 나온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로마 근교에 가면 압비아 가도 밑에 무덤이 있고, 이 무덤동굴이 유명한 지하교회 카타콤베이다.
압비아 가도가 갈라지는 곳에 베드로가 주께 물었다는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교회가 있다.
도로 이야기
군인이 지나갈 때에 창에 걸리는 것은 모두 철거하였고 한다.
또 다리나 배 위에서는 싸움을 금지하였는데, 이것은 불리하면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대신 싸우다 불리하면 이곳으로 도망하였다.
처음에 우측 통행을 한 이유는 칼을 빼서 공격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되어,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총 때문에 좌측통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마차 사고로 사람이 죽을 경우, 우측에서 사고가 나면 우측에 있던 마부는 사형당하였고, 좌측 마부는 추방시켰다. 좌측에서 사고가 나면 반대로 하였다.
2]공화정치시대 (BC510- BC31년)
왕은 군사, 정치, 신전제사의 권위를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누렸으나,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현 국회 역할)이라는 민회가 권력을 제약하여 절대왕권은 아니다. 원로원(consulto)은 '죽음으로 떠밀리지 않은 사람'의 뜻이라고 한다. 귀족 중에 60세 이상의 노인으로 구성되었고, 특이한 것은 매부리코는 정치적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어 이 코를 가진 이가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재산으로 귀족(파트리키)과 평민(플레브스)을 구별하였으나, 귀족이 상속제로 고정되면서 재산이 많아도 귀족이 될 수 없었다. 재산으로 귀족을 구별한 이유는 정치에 필요한 많은 비용을 자비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 귀족들이 에트루리아왕을 추방하였다.
공화정 초기에는 원로원은 왕을 대신할 집권자를 귀족출신 중에 선출하였으며, 독재를 막기 위하여 2명을 선출하여 1년간 집권을 맡겼다. 그러나 평민은 전쟁에 참가하고 세금까지 내다보니, 가난하여 귀족의 노예가 되어갔다.
평민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BC 494년 무력투쟁하여 평민군인이 성산을 점령하여 권리를
관철시킨 사건을 '성산 사건'이라고 한다. 이로서 평민을 대표하는 2명의 호민관을 선출하여 평민의 권리를 지키려 하였다.
그래도 귀족이 계속 평민과 약속을 지키지 않자, BC 451년 평민이 다시 일어나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12표법을 구리판에 문서화하여 로마 한복판에 세웠다. 평민이 최초로 성문법을 만들어 법에 의하여 보호 받으면서, 평민도 법을 알게 되었다.
법의 변천사는 함무라비 법전→ 12표법→ 중세법→ 나폴레옹 법전→ 미국헌법→ 현대법 이다.
BC 4세기에 들어서 로마는 라티움 지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BC 280년 로마인들은 그리스인이 세운 남쪽 타렌툼을 공격하였다. 타렌툼은 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대가 없어 같은 민족인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재위BC 297-272) 왕에게 돈을 주고 싸우게 하였다. 이 왕은 코끼리부대로 전투를 잘하는 유명한 왕이다.
로마는 코끼리 때문에 두 번에 걸쳐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가 피로스왕 이다. 두 번째는 한니발이 가장 존경하는 피로스 왕에게서 배운 코끼리 부대를 로마본토까지 데리고가 싸운
포에니 2차 전투의 한니발이다.
피로스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기 위하여 로마를 기습공격하려고 밤에 행군하였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여 날이 밝아 작전은 실패하였고, 로마는 고전 끝에 피로스왕을 퇴각시켰다. 피로스왕은 오랜 전쟁으로 피로한 부하와 코끼리도 많이 잃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하게 된다.
[참고로 알렉산더 대왕, 피로스 왕, 한니발 장군은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이다.]
3]공화정 중기(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전쟁)
(1) 포에니 전쟁(BC 264-BC 133년)
지중해에는 로마의 진출를 막는 카르타고(Carthago)가 있었다.
카르타고는 BC 720년경에 고대 페니키아 인이 튀니스만에 건설한 도시국가이다. BC 280년 타렌툼을 구원하려고 온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왕이 로마를 물리치고, BC 276년 시칠리아로 진격하여 카르타고도 물리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 갔다.
BC 275년 피로스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주인이 없는 시칠리아를 두고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배권 다툼으로 포에니 1차 전쟁이 일어났다.
1. 제1차 전쟁(BC 264-BC 241년)
시칠리아는 전쟁의 장소가 되었으며, 로마는 육군이 강하였고, 카르타고는 해군이 강하여 육군은
이기고 해군은 패하였다.
로마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BC 260년 카르타고에 대승하였고, BC 256년에 아프리카로 진군하였으나
대패하여 다시 전쟁터를 시칠리아로 옮겨 대승을 거두어 배상금과 함께 시칠리아와 코르시카도 얻었다.
2. 제2차 전쟁(BC 218-201)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은 29살의 한니발은 피로스 왕의 전법인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사군툼을 점령하였다.
BC 218년 본토 로마로 진격하는 도중에 중간의 마실리아(현재 마르세유)에 있는 로마군과 싸움을
피하기 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당시로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것은 로마군이 상상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6만 명의 병사와 6천명의 기마병, 4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최초로 알프스를 넘은 장군이 되었다.
알프스를 넘어 살아난 병사는 2만 6천명이고 코끼리는 1마리만 살아 남았고 한다.
본토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승리는 칸나에(BC216) 전투였다고 한다.
큰(大)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가 본토로 진격하자, 다급한 본국은 한니발을 급히 송환하였으나
이미 지친 병사들은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한니발은 셀레우코스왕조 안티오코스3세에게 도망가 재기를 도모하다가 실현하지 못하였다. 로마가 그의 신변을 요구하자 그는 자살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르키메데스는 투석기와 거울을 이용하여 로마 배에 불태우는 병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땅 바닥에 원주율을 계산하고 있는데 로마병사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설화도 있다.
*아프리카누스(BC236-BC184)
아프리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인이 지중해 남해안의 원주민을 '리비아'라고 부르고 이 원주민이
카르타고 시민을 '아프리'라고 불렀다.
로마가 정복 후에 이 지역이 로마의 한 주가 되어 '아프리카주'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는 이 대륙의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아랍인은 '이프리키아'라고 불렀다.
명문 '스키피오가(家)'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전쟁에 참가한 장군 P.C.스키피오의 아들로
BC 210년 스페인의 카르타고을 격파하였다.
BC 205년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으며,
BC 204년 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였다.
BC 202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위대한 아프리카 대장군)’라는 존엄한 명칭을 받았다.
마케도니아전쟁을 수행하였고, BC190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싸웠다.
귀국 후 보수파인 대(大)카토 일파의 반격을 받아 실의 속에서 죽었다.
그의 장남이 양자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유명한 소(小) 스키피오이다.
한니발(BC 247-BC 183) 이야기
한니발은 흑인으로 알프스 산을 넘을 때에 장애가 되는 바위는 불로 달군 뒤에 식초를 뿌리면 바위가 쉽게 부쉈지는 방법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 한니발과 큰 스피키오가 로도스 섬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하며 대화 내용은 누가 위대한
장군인가의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니발은 알렉산더 다음으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한니발하고 스키피오는 두 번의 전투를 하였는데, 하나는 한니발이 본토 이탈리아에서 전쟁 한
것으로 유명한 칸나에 전투이며 이 때에 스키피오는 무사히 도망하였다.
두 번째는 BC202 년에 2차 포에니전쟁으로 카르타고 본토에서 회군하여 지치고 피곤한 한니발
군대를 자마에서 물리친 일로 이 때에는 스키피오가 승리하였다.
칸나에 전투의 교훈
BC216년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의 대승하여 포로로 잡은 병사를 헬라에 노예로 팔았다.
20 년 후에 로마가 그리스를 도와 마케도니아를 물리친 후 칸나에서 잡혀 팔렸던 노예 1200명을
로마가 비용을 부담하고 전국을 뒤져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6.25동란 때에 포로로 잡혀간 군인들을 어떻게 하였는가?
미국은 포로를 구출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공을 드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국민은 조국을 믿을 수 있어야 조국을 위하여 목숨걸고 싸울 것이다.
칸나에 전투의 교훈은 국가가 결코 국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되었다.
우리 나라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방치하는 것을 보고서 칸나에 교훈이 생각나서 적어 보았다.
3. 제3차(BC 149-146)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완전히 멸망한 전쟁으로 BC 2세기에 카르타고가 다시 부강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로마는 BC150년 누미디아를 시켜서 쳐들어가게 하였다.
카르타고는 무력으로 맞섰고, 이것은 '전쟁은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로마와 맺은 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로마는 카르타고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카르타고는 무기를 넘겨준다는 것에 동의하고 무기를 반납하였다. 해상 상업을 할 수 없는 내륙지역으로 옮기라는 규정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기 없이 2년 동안 로마와 처절하게 맞서 싸웠다.
BC 147년 카르타고를 정복했던 대(大)스키피오의 양손자(養孫子) 소(小)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가
항복하였을 때는 약 25만 명의 인구가 5만 명만 살아 남아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당하였다. 카르타고의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2) 마케도니아전쟁(BC 215-BC 168)
지중해와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로마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마케도니아왕국 및 셀레우코스 왕조와 충돌하였다. 이것을 마케도니아전쟁이라고 하며 3차에 걸쳐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코스(안티고노스) 귀족의 가문이 세웠기 때문에 안티오코스(성경:안디옥) 왕조라고도 한다.
1. 제1차 전쟁(BC 215-BC 205)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는 로마와 포에니전투를 하던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도전하였으나, 승패 없이 끝났다.
2.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BC 200-BC 197)
필리포스 5세가 주위의 여러 도시에 압력을 가하자, 이들 도시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여 일어났다. 로마는 키노스케팔라이전투에서 필리포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리스 여러 도시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포기시켰다.
3. 제3차 마케도니아전쟁(BC 171-BC 168)
필리포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잃은 패권을 되찾으려 하다가 BC168년 로마에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 대제국은 얼마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4]공화정 후기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 133-BC 121년, 22년간)
로마는 대 농장의 경영이 늘어났고 로마지배지역에서 들어온 값싼 곡물 때문에 곡물경작이 붕괴되었으며 농민들은 장기간 전쟁에 나가 땅을 경작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들었고, 부자들은 몰락한 농민의 땅을 사들였다. 땅을 잃은 농민들을 병사로 징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군대는 약화되었다.
BC 133년에 호민관으로 뽑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국유지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인 원로원의 반대로 티베리우스는 살해되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뒤,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식량을 사서 싼값으로 서민에게 팔렸고 하였다. 그는 2번째로 호민관에 오른 뒤 더 많은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에 반대파의 노력으로 호민관 선거에서 졌다.
그는 BC 121년 무력으로 개혁을 준비하던 중에 폭동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처형되어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5]공화정 몰락과 제 1삼두정치(BC 121-BC 31년)
이 시기에는 장군은 지원병을 채용하여 그들을 노후까지 돌보는 사병제도가 생겨 세력이 큰 사병집단이 생겼으며, BC 56년 세력이 큰 집단 3명이 공동정치를 한 것을 제1 삼두정치(Troica: 트로이카)로 *카이사르(시저), 폼페이우스(시저의 사위), 크라시우스이다.
이들은 3대 부자로 자가 땅을 지배한 것이다. 시저는 갈리아의 사령관을 맡았고,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의 사령관을 맡았다. 동방의 부호 크라수스는 동방의 사령관직을 맡았으나 동방원정 중에 제일먼저 사망하였다. 제1 삼두정치는 사적으로 맺은 정치이다.
이들이 죽고 다시 공적인 제2 삼두정치가 옥타비아누스(당시 19세),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이다. 이들 각자는 자기 땅에서 사실상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원로원의 명령을 인정하였고, 원로원은 그들의 사유권을 인정하였다.
초기 로마의 황제는 자기 소유의 땅을 다스리는 형식을 취하여 황제는 최고 부자인 셈이었다.
*카이사르(시저, BC100. 7.12-44. 3.15)(성경: *가이사라)
겔트족의 갈리아족(현 프랑스)을 정복하여 BC 58-52년 갈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의 군사활동을 갈리아 전기로 기록하였는데 프랑스, 영국, 독일에 관한 최고(最古)의 역사사료이다.
내용은 헬베티아(스위스)족이 갈리아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을 차단한 일을 비롯하여,게르만족 침입과 격퇴, 갈리아 반란의 제압, 2번에 걸친 브리타니아(영국) 원정 등으로 그 가운데 제7권은 문학작품으로도 가치가 높다.
서양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 중에 한사람이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이나 조상은 유명한 사람이 없어 자신이 착실하게 명성을 쌓아 대 정치가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59년 집정관에 취임하여 국유지 분배법을 만들어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0년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을 2번, 브리튼 섬(영국)을 2번 원정하였다.
동쪽의 크라수스가 쓰러지자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 충돌하였으며,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라오라는 원로원의 결정을 통고 받았다.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올 때에 비무장으로 와야 하는 엄한 규칙을 어긴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시에 주사위는 없었기 때문에 후세에 번역할 때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바른 번역은 '동전은 던져졌다'라는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 동전을 던져 점을 쳤는데, 황제 그림이 나오면 황제 편, 뒷면의 S.C는 원로원인가(sentus consulto)가 나오면 원로원 편이라고 단정하였다.
로마에 입성한 시저는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스페인까지 쫓아가 격파하였다. 이집트로 도망가는 폼페이우스를 따라왔으나 이미 암살 당한 후였다.
이집트에서 왕위계승 전쟁에도 휘말렸는데, 그는 승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그녀에게서 아들 카이사리온(카이사의 아들 뜻-프톨레마이오스15세)을 낳았다.
BC 47년 소아시아(현: 터키의 아마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원로원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세 마디의 유명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정적인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잔당을 소탕하였다.
폼페이우스 편을 들어준 원로원의 지배를 타도 하려고 하였고, 또 종신 독재관으로 군림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원로원의 옹호파들 중에 브루투스 등이 주모자가 되어 원로원의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시저를 폼페이우스 동상앞에서 암살하였다.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에 받은 그리스학자 아르테미도루스의 암살기도의 보고서를 읽어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항상 운명의 여신이 자기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여 '인사(人事)를 다하고 신의 도움을 기다려라'라는 격언을 남겼으나, 마지막에는 여신이 눈을 감았나 보다.
그는 도로·항만·구제사업 등의 민중이 원하는 개혁을 하였으며, 풍부한 웅변술, 정적의 포용력, 탁월한 전략가이자 민심을 정확히 판단하는 장점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는 대머리에 정력가로, 바람기가 대단하여 4번의 아내를 바꾸었으며, 또 그를 '모든 유부녀의 남편이자 모든 남편의 아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양성애자라는 이야기도 전하여 진다.
*가이사랴(행21:8, 10:1, 21:8)
헤롯이 12년 간 확장하여 견고한 성읍으로 만들었고,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를 존경하는 뜻으로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로마총독부가 있어 유대 지방의 수도 격이었다.
베드로가 만난 로마군인 백 부장 고넬료가 있었고, 간다게 여왕(에티오피아)의 내시를 전도한 집사 빌립이 딸4명과 함께 이곳에 살았다.
바울이 2년 간 이곳 감옥에 있을 때 아그립바에게 설교하였으며, 베스도가 바울을 이곳에서 로마로 보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헬몬산 근방에 있는데, 이 도시는 헤롯빌립이 도시를 확장하였으며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디베료)를 존경하여 붙인 이름으로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하여 뒤에 자기이름을 붙였다.
6]황제시대
BC 44년 시저가 암살 후에 전개된 내전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승리가 돌아가 BC29년에 원로원의 1인자가 되었다.
BC 27년 그는 공화제를 회복하였고, 특별한 권한을 포기하자 원로원은 보답으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자)라는 존칭을 주었다.[그는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였다고 하여 평화세대의 '구세주'로 추앙 받고 있을 때에 진정한 평화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우리에게 가장 큰 복된 탄생이다.]
그는 형식은 공화제이나 모든 권력이 그에게 있어 1인 원수정치였다. 모든 권한은 종신토록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는 로마 최대의 갑부로, 영토의 절반을 가지고 대규모 사병집단을 거느리는 황제이상의 권력이었다.
로마의 황제와 동양의 황제가 다른 점이 있다. 로마의 황제는 황제의 권위 위에 있는 원로원이 권한을 인정하는 자기소유의 것을 지배하는 황제이고, 동양 황제는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이고, 또 국가의 전 재산이 황제의 소유인 점이 다르다.
아우구스투스는 기본 원리와는 반대로, 권력의 세습을 고심하다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의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다.
8대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율리우스 왕가는 끝나게 된다.
로마의 국경은 동쪽은 유프라테스 강이고,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으로 국경이 되었다.
황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대: 옥타비아누스(BC31-AD14)(성경:*아구스도)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다. 서민출신이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BC 44년 시저가 암살된 후에 그의 유언장에 자신이 지명되어 있음을 알고, 그의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고 시저의 사병을 장악하였다.[후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황제들은 이 이름을 쓰게 되었다.그리고 독일은 '카이제르(카이저)', 러시아는 '차르'로, 각나라의 황제를 의미하는 명칭이 되었다.]
제2 삼두정치 때에 로마를 3등분하여 서방은 자신이, 동방은 안토니우스, 아프리카는 래피두스가
장악하였으나 래피투스를 탈락시키고 안토니우스와 BC 31년 악티움에서 *아그리파(아그립바)가
이끄는 군대가 승리하여 1인자가 되었다.
그는 장군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부하의 장악력으로 전 로마장군의 충성을 받아냈다. 특별 권한은 포기하였으나 제정과 군사를 장악하는 신중한 일 처리로 모든 권한을 잡게 되었다.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바꾸는 건축사업과 절제의 모범을 보이며,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도 넘어 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사랑하는 율리아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방탕하여 많은 사람과 바람을 피웠다. 율리아를 티베리우스에게 주었을 때에 그는 방탕한 그녀를 싫어하여 로도스 섬에 은둔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친어머니이며 아우구스투스의 부인인 리비아 두루실라가 아들을 위하여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고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였으나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녀의 첫번째 남편은 티베리우스와 사촌인 마르켈루스이다.
후계 문제로 고민하다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공동정치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누나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재혼하여 동생과 남편의 화해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애하자 이혼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유자녀를 돌보고 생활이 정숙하여 존경을 받았다.
*아구스도(눅2:1)
황제는 속주국 주민에게 호적을 하라고 명령하여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가서 아기 예수를 낳았으며, 그의 명령이 성경의 예언을 이루게 하였다.
*아그리파(마르쿠스 아그리파)
미술을 한 사람이면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석고로 그의 두상은 만들어져 뎃생의 모델이 되었으며 다비드와 함께 미남에 들어간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부장으로 BC 36년 섹스투스에서 폼페이우스에 대한 해전의 승리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교묘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하여, 안토니우스 함대를 격파한 것은 그의 절대적 공로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동료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호적조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그의 군사적 역량으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될 수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딸 율리아가 과부가 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주어 2번째 남편이 되어 *(大)아그리파(아그립파)를 낳았다.
그에게는 먼저 빕사니아 아그립파라는 딸을 두었는데, 이 딸이 티베리우스와 결혼하였다.
아그립바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부인 빕사니아 아그리파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를 티베리우스에게 주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의 다섯 아이들 중에서 대(大)아그리피나(아그리파)는 황제 칼리굴라의
어머니이며, 황제 네로의 외할머니였다.
그는 BC 20년 중엽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명한 판테온을 완성하였고,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도 그에 의하여 건설된 고가수로를 통해 공급되었다.
*(大)아그리파(BC14 ?-AD 33)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딸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이다. 통칭 대(大)아그리피나라고 불렸으며, 남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손이다.
AD 4년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양자가 되었고, 같은 해에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남편과 함께 동방원정(東方遠征)에 따라갔으나, AD 19년 남편이 동방 안티오키아(안디옥)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다시 로마로 귀국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남편을 질투하여 독살시켰다는 말도 있어 황제를 의심하며 적대시하였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황제에 의하여 AD 29년 판다테리아섬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단식 끝에 죽었다.
남편(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동생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이다.
아내 대(大)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 칼리굴라, 소(小)아그리피나, 드루실라 등 9남매를 두었다.
*아그립바와 드루실라(행12:23, 24:24, 26:1-26)
헤롯은 아그리파 장군과 절친한 친구가 되면서 손자 또 증손자와 증손녀 이름에 아그립바를,
드루실라는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라는 이름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자세한 기록은 그리스도 세계 안에 있는 헤롯족보와 아리스트블러스의 자손을 참조하세요.
2대: 티베리우스(BC12-AD37)(성경: *디베료)
그는 곰보에다 못났고 성품은 음침하여 시기심이 많았다. 아들과 이름이 똑같은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행정관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함대 지휘관을 지냈다.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남편과 사촌이었으며, 티베리우스를 낳았을 때 13세였다.
리비아가 둘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을 때에, 그녀의 미모에 이끌린 아우구스투스는 역시 임신 중이던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결혼하였다.
어린 티베리우스는 아버지한테 남았으며, 몇 개월 뒤 동생인 드루수스가 태어나자 동생도
아버지에게로 보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죽을 당시 티베리우스는 9세였기 때문에,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어머니 리비아에게로 가서 황제와 함께 살았으며, 그는 장성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정복 사업을 도왔다.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와 3번 째로 율리아와 강제 결혼시킬 때 그는 30세였고, 율리아는 27세로 5명의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었다. 율리아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나 황제가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비난하면 티베리우스는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었다. 그는 방탕한 그녀를 싫어하여 BC 6년 로도스 섬에 은둔하였다.
AD 4년 옥타비아누스의 양자가 되면서 후계자로 지목 받았다.
AD 14년에 황제가 죽자 그는 56살에 공동정치에서 제위로 등극하였다. 초기에는 정치를 잘하였으나 후에 폭군으로 변하였으며, 궁중에 음모가 난무하여 그는 카프리 섬으로 은둔하여 공포정치를 하다가 암살되었다.
그의 제위 15년 되는 해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그도 후계자가 문제이었으며 실질적인 권리를 가지고 살아 있는 후계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도 아우구스투스처럼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후계자를 골랐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大)아그립바(아그리피나)와 결혼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 칼리굴라를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임을 고려하여 양자로 삼았다.
티베리우스는 동성연애자로 성을 위하여 미소년들의 이빨을 다 뽑았다고 전한다.
*디베료(눅3:1)
눅3:1에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디베랴(티베리아스) 도시는 AD 20년경에 헤롯 안티파테르(안티파텔,안디바스)가 건설한 도시(성)로, 당시의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디베료, BC 12-AD 37)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였고,
이 도시의 이름을 따라 갈리리호수를 디베랴(요한6:1, 21:1) 호수라고도 하였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이 이곳에 거할 때에 화려한 궁전과 연회장 그리고 경마장이 있었다.
3대: 칼리굴라(AD37-41)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비슷한 이름이 많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군인들이 그가 어릴 때 신었던 군화식의 유아용 구두가 귀여워 지어준 별명이 칼리굴라이다.
티베리우스가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후계자인 칼리굴라는 황제로 제위 계승의 소식이 전하여졌다. 근위대는 새 황제에 대한 지지를 선포하였다.
이 와중에 티베리우스는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나 로마의 명망가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것을 해결한 사람은 근위대 사령관인 마크로이었다. 다음날 그는 티베리우스를 담요로 질식시켜 죽였다.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 정책으로 환영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이 인간세계에 나온 신(神)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고 제사하게 하였으며, 그는 낭비로 재정을 파탄시켰다. 불륜관계인 누이들에게 과도한 애정을 쏟았으며, 특히 아끼던 누이 드루실라가 죽었을 때에 그녀를
신격화하였다. 이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여자를 신격화한 일이었다.
그는 주피터신의 황금 턱수염을 모방하여 자신도 대중 앞에 설 때에 황금수염을 착용하여 주피터와 동일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그는 살아남은 형제 2명을 죽였으며, 3명의 여동생을 강간하였는데, 그래서 네로도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이 중에 악녀로 유명한 *소(小) 아그리피나(아그립파)가 있다. 또 그리스총독의 부인을 소환하여 몇 차례 강간한 후 일생동안 누구와도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의 부인은 키에소니아인데 아주 미인이라고 한다. 부인을 귀족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거나, 귀부인을 선택하여 나체로 만들어 감상하였으며, 연회장에서 성관계를 한 후에 느낌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애마(愛馬)가 있었는데 애마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고, 직위에 해당하는 사무실과 상아로 만든 마구간을 주었으며, 황제가 수여한 황금 잔으로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잔혹한 독재와 부하를 함부로 죽이는 광폭한 행동 때문에, 27세 때 경호원에게 암살당하였다.
*소(小) 아그리피나(AD15-AD59)
그녀는 대(大) 아그리피나(아그립파)의 장녀이며, AD 28년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하여 네로를 낳았는데, 혹자는 네로는 칼리굴라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AD 49년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하여, 황제의 친아들 대신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후계자 겸 양자로 삼게 하였다.
네로를 황제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네로를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하게 하였으며, 황제의 전처였던 *메살리나 발레리아의 살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황제의 친아들 브리탄니쿠스를 독살하는 등 네로를 권좌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AD 54년 황제인 남편을 독살하기 위하여 황제에게 독버섯을 먹였는데, 전의가 버섯을 토하게 하기
위하여 깃털을 목에 넣은 것이 잘못되어 질식사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섭정하려는 욕망으로 네로를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였으나, 그녀도 섭정 때문에 네로의 명령을 받은 노예에게 피살되어 모든 욕망을 접었다.
그녀는 성을 즐기기 위하여 문란한 도시 폼페이의 창녀촌에서 자진하여 밤새도록 남자를 상대하였는데, 날이 밝는 것을 섭섭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메살리나 발레리아(AD 25경-48)
귀족출신인 그녀는 15살 때 50세인 클라우디우스의 3번째 아내가 되어 옥타비아를 낳았다. 초기 자료에 따르면, 황제를 조종하고 자신의 탐욕과 정욕을 채우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비서들과 통정을 하였다.
황제가 남자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욕구불만 해소책으로 밤마다 황후를 비롯한 유부녀 마님들이 술을 마셔가면서, 춤을 즐기면서 하룻밤 상대를 물색하는 '요상한 파티'를 하였다.
그것도 모자란 그녀는 금발 가발을 쓰고 젖꼭지는 금빛으로 칠한 후, 가명으로 매음굴에서 평균 20명을 상대하고 화대를 받으며, 다른 창녀들 보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아주 열심히 몸을 팔았다고 한다.
그녀는 칼리쿨라의 총애를 받았던 연극계의 대표인 미네스타에 반하여 연극을 중단시키고 섹스시중을 명령하였으며, 그의 흉상을 금으로 만들어 궁중에 장식하자, 화가 난 황제는 왕비의 섹스신하 다수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접근을 무시한 원로원 의원 아피우스 실라누스와,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원로원 의원들을 황제를 부추겨 300여명을 처형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악명 높은 그녀도 애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에게는 요조숙녀로 변할 만큼 반하였고, 비밀리에 결혼하여 권력을 차지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황제에게 나르키수스가 밀고함으로, 그녀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하였다.
화려한 황후생활은 불과 8년으로 마감했지만, 남자에 관한 한 그녀는 원없이 즐겼으며 사상 최고의 호색녀로 꼽히며 방종과 궁정에서 벌린 살해 음모로 악명이 높았다.
4대: 클라우디우스(AD41-54) (성경: *글라우디오)
그는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다리는 절고 침 흘리는 병자라 공적 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근위병들에게 옹립되어 51세 때 제위에 올라서 재정을 다시 일으켰다.
AD 43년 남 잉글랜드를 평정하였으며, 평정한 장군의 이름이 부루투스라고 하는데, 그의 이름에서
브리튼(The Great Britain- 대영제국)이 왔다고 하는 설을 남긴 사람이다.
AD 49년 조카인 소(小)아그립파(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와 결혼을 하였으나, 5년후인 AD 54년 그녀에게 독살당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몸은 병자이지만 머리는 명석하였다고 하는데, 인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의 왕비 메살리나와 소 아그립파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글라우디오(행 18:2, 11:28-30)
황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유대인을 본토에서 추방하여 브리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로 쫓겨왔다(행 18:2).
아가보가 예언한 세계적인 대 기근이 이 황제에 실현되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에 도왔다
(행 11: 28-30).
5대: 네로(AD 54-68)
AD 54년 네로의 어머니(소 아그리파)는 섭정하려고 황제를 독살하였다. 근위병의 추대로 네로가 제위에 오르니, 로마 역사상 최초로 어린 나이 17세이었다.
근위장관 부루스와 철학자 세네카의 후원으로 초기는 선정하였다.
그러나 점차 포악하여 의붓동생을 죽이고, 어머니 아그리파의 배를 발로 차자 어머니는 치마를 찢으며, '여기를 쳐라, 너를 낳은 자궁을 쳐라'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배에 구멍을 뚫었으나 헤엄쳐 나오자 자객을 보내어 죽였다고 한다.
62년 오토(나중에 황제가 됨)의 젊은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부루투스가 죽고 원로원의 음모가 탄로나 세네카(고린도의 총독 갈리오의 형)와 추종자를 살해하였다.
AD 64년의 로마 대화재 후 폐허 위에 로마 시 전체의 1/3 크기인 궁전과 '황금저택'을 짓기 시작하였지만,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문학에 심취하여 예술 콩쿠르를 도입하였고, 4대 제전을 개체하며 직접 경기에 출전하였다. 갈리아의 반란과 함께 스페인 총독 갈바가 로마로 진군할 때에 원로원·민중·근위병까지 합세하자, 그는 로마를 탈출하여 재위 14년, 나이 31살에 '아! 이 세상은 위대한 예술가를 잃는 구나' 하고는 자살하였다.
재위 시는 미남에 활달한 성격, 초기의 선정, 진취적인 사고 때문에 인기 있는 황제로 알려져, 죽은 뒤에도 네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에 그는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크리스트교를 박해하였다.
쿼바디스 영화에는 그가 로마화재를 보면서 눈물항아리에 눈물을 담는 모습이 나오나, 실상은
56 Km떨어진 악티움 휴양지에 있었다고 한다.
네로가 죽은 후인 AD 68년 6월, 73세의 늙은 장군 갈바(6대)가 정권을 잡았으나, AD 69년 1월 오토장군(7대)이 갈바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3개월 후 비텔리우스(8대)의 반란에 쫓겨 오토는 자살하고, 비텔리우스가 정권을 잡았으나, 이도 반란군에 쫓겨나고 베스파시아누스(9대)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년 동안에 4명의 황제가 바뀌었다.
* 네로의 크리스트교 박해
네로는 로마화재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시키고 대학살을 감행하였으며, 저녁이면 그의 정원은 그리스도인 몸을 횃불로 삼고, 전리품으로 잡아온 여자들을 발가벗겨 병사들에게 범하게 하였다.
자신도 벗은 채 수레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하였고, 기독교도들의 처참한 몸부림을 즐겼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박해를 구경한데서 구경거리라는 뜻의 시어터(theater)가 극장의 어원이 되었다.
성경 계시록의 마귀의 숫자 666은 네로와 교황을 지칭하기도 한다. 바울은 네로에게 고소되었고, 베드로를 처형하였다.
9대: 베스파시아누스(AD 69-79)
베스파시아누스는AD66년 말 네로가 유대인 반란 진압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여 전과를 올렸다. 네로의 자살 후 혼란 속에 동방의 군단이 먼저 그를 황제로 추대하자 발칸도 뒤따랐다. 유대진압은 아들 티투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향했다. 그는 성실하였고, 국가회복과 반란의 피해를 복구하였으며, 사후에 두 아들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을 티투스가 예수님의 예언대로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기념으로 서쪽 벽만 남겼다. 유대인 110만 명을 학살하고 10만 명을 포로로 데려가 콜로세움의 건설를 시작하였다.
AD 71년 유대반란의 평정귀환식을 가졌고, 그때의 개선문(티투스 아치)이 지금도 남아 있다. 포로는 로마건설의 도구로 썼다가, 건설을 마치고 살아 남아 있는 유대인을 생매장하였다. 노예 소녀 체니스는 그의 정부로 있다가 결혼하는 바람에 노예에서 황후가 되었다.
10대: 티투스(AD 79-81)
즉위 후에 선정으로 환영받았으나, 79년의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시가 땅속으로 매몰되었으며, AD 80년 로마의 대화재와 페스트의 만연으로 불행이 잇달았다.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전력하여 민중의 추앙을 받았고 콜로세움을 완성하였다.
그는 유대를 정복하고, 그 기념으로 개선문을 건축하고 '티투스 아치'라고 하였다. 정복과 개선행렬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은 지금까지 이 개선문 아래로는 통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11대: 도미티아누스(AD 81-96)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원로원을 제압하였고, 비판자를 탄압하였다. 브리튼 섬(영국)의 로마화에 힘썼고, 군대를 스코트랜드까지 진군 시켰다. 근위장관과 결탁한 왕비에게 암살당하였다.
86년 그는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라고 부르게 하고 기독교인을 심히 박해하며 요한을 밧모섬에 귀양보냈다.
[2-2]서로마 제국의 멸망
[1] 5현제시대(12대에서 16대까지의 황제:84년간)
로마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하며, 이 때는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때의 영토는 북쪽은 라인강, 도나우강,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 사막,
남쪽은 사하라 사막까지 광대한 영토였다.
(1)네르바(96-98): 사회복지 정책을 폈다.
(2)트라야누스(98-117): 최초로 속주국 스페인사람으로 평생 속주국 순행을 하였다.
(3)하드리아누스(117-138): 그리스문화 애호가이며, 그의 기독인 박해는 자정을 맞이하였다.
(4)안토니누스 파누스(138-161): 경건하였다.
(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로마의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게르만의 침입으로 토지를 주어 제국의 방위를 게르만인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이 명상록은 60년대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 이 때에는 속국에 많은 도시를 로마식으로 건설하고, 신전, 극장, 원형극장(경기장), 공중목욕탕, 바실리카는 필수적으로 갖추었다.
바실리카는 공공건물로, 법정, 상업거래소, 집회장, 때로는 궁정 등을 말하며, 건물의 형식으로는 직사각형의 건물을 말한다.
도시들의 노화로 시민은 농촌으로 옮겨가고, 세금의 부담은 소작인에게 무거워져 갔다. 대농들의 노예는 한정되고, 비능율화로 생산은 감소되었고, 일반인의 구매력 감소로, 경제는 악화되어 위기시대가 오고 있었다.
[2] 군인황제시대(4대 61년간)
(1)코(콤)모두스(180-192):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전제정치를 하다가, 고문관들이 최우수 레슬링 선수 나르시소시를 시켜 그를 목졸라 죽이게 하였다.
그는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가, 검투사처럼 싸우거나 활과 화살로 사자를 죽이기도 하였고, 1,031번의 검투시합에서 승리하자, 자만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처럼 숭배하라고 하였다.
182년 누이 루킬라가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상당수의 원로원들을 황제가 처형하였다.
그의 잔혹한 실정(失政)과 내분으로 인해, 84년간 로마 제국이 누려온 안전과 번영의 시대가 끝났다.
동쪽은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와 맞서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검투사(gladiator')는 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으나, 조금은 역사와 다르다.
(2)카라칼라(211-217): 세금의 수익를 위하여, 제국내의 모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시민에게 민심을 사려고 큰 *목욕탕을 건설하였는데, 1600개의 좌석,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 목욕탕에는 도서관, 휴게실 등이 갖추져 있고, 바닥은 모자이크하였으며, 벽은 대리석으로 장식하여 조각상과 분수가 있는 화려한 욕탕이었다고 하는데, 유적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3)세베루스(222-235): 세베루스왕조의 마지막 황제, 살해 당한 후, 235년에서 285년의 50년 동안에,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가 되었다.
(4)데시우스(249-251)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의 새벽이었다.
그는 250년 포고령을 내려 로마 신에게 희생의 제사를 바쳤다는 증명서를 지니고 다녀야 무사하였다.
포고령은 많은 기독인의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와 멸망의 원인
그리스도교들은 황제가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하는 것을 배격하였고, 또 백성들이 섬기는 로마 신을 배격하여 로마 신전은 황폐화하였는데, 이 때문에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반대하며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하나님에게 평등하다는 것이 못 마땅하여,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를 배격하였다.
이 때에 기독교를 박멸을 위하여 조직적인 시도를 하였다. 로마는 모든 신앙에 자유를 주었으나, 그리스도교만은 네로 때부터 박해를 시작하여, 콘스탄티우스 황제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의 멸망 원인은, 휴머니즘의 상실로 노예와 식민지인의 평등주장을 탄압하였고, 풍요의 평안함 때문에 전쟁을 게르만인에게 대신시킨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목욕탕 이야기
로마 멸망의 한 이유로 목욕문화를 말하는데, 목욕탕은 군사훈련용으로 스포츠시설을 갖추고 점령지마다 만들었다.
목욕탕에는 당시에도 때밀이와 마사지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젊은 노예가 하였는데, 남자는 여자노예가, 여자는 남자노예가하였고, 목욕탕에도 창녀가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포라는 비누를 사용하였고, 귀족의 여인은 우유에 목욕을 하였다. 사포는 점토나 재를 우지(기름)에 반죽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켈트족은 비누를 사포(saipo)라고 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비누(soap)의 어원이다.
BC 600년경 페니키아 사료에는 산양의 기름에 나무재로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네로의 왕비 포파이아는 당나귀 젖을 사용하였고, 여행 할 때는 당나귀 떼를 몰고 다녀야 하였다.
로마는 소변비누의 인기 때문에 공중변소의 소변으로 다툼이 생기자, 황제가 허가권을 팔았다고 한다.
일본의 목욕탕은 남녀 혼탕을 한 때는 금지하였는데, 여자들이 다시 혼탕을 원하여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여자들이 목욕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같은 시간에 몰려 혼잡 한데 반하여, 남탕은 비교적 한가하였고, 여자들이 저녁 늦게 목욕 할 때는 무서워, 오히려 남자와 있는 것이 더 편안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욕탕에는 3가지의 돌이 있어, 필요한 곳의 털을 제거하였다고 한다. 일본 목욕탕에서는 술도 먹고, 유유자적하게 시간도 보내고, 토론도 하고 데이트도 하였다고 한다.
터키탕은 원래는 일본의 도루코탕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본은 터키를 도루코라고 부르는데서 기인한다. 도루코탕이 소프란도(비누세계-soap land)란 이름으로 바뀐데는, 터키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우리 나라도 일본과 같이 항의을 받고, 터키탕이라는 명칭은 못쓰게 되었다.
[3]콘스탄티누스의 제국
28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그는 황제가 하나 뿐이기 때문에 다툼이 계속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로마를 4개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하여, 로마시 안에 4명의 황제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가 서로 다투는 또하나의 폐단이 되었는데, 심지어 6명의 황제가 있어 서로 다투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강을 잡고 국력을 키우기 위하여 6명의 황제를 하나씩 제거하였다. 갈레리우스, 막시미안, 리키니우스, 또 다른 막시미안을 제거하고 마지막 막센티우스를 AD 312년에 격파하고 로마에 입성하였고, 다음해 AD313년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발포하여, 기독교는 자유를 얻어 박해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황제는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니케아 신경'을 공포하였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의 장애, 속죄 및 사제 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AD 330년 종교와 통치의 확장으로,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게르만을 격퇴하고, 게르만인을 제국 내에 정착하게 하여 국가방위를 맡기고, 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소작인의 이동을 금지하여 자유로운 시민 생활이 구속받게 되었고, 군사 국가는 더욱 강화되었다.
율리아누스(361-363)는 흐름을 역행하여, 이교를 부흥시키고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밀라노칙령
AD 313년2월에 주교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견한 것을 발표한 칙령이다. 기독교의 신앙 자유선언으로, 기독교 탄압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해 때에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고 종교재산과 감독자 세금면제와 병역면제 등을 시행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는 지금까지도 모든 종교에 대하여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1세(AD 306-337)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나, 306년에 아버지가 죽고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로마 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가 자기가 정통황제라고 자칭하므로, 그와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10년 10월 27일, 전쟁 중 저녁 노을에 '십자가의 깃발로 싸우라'는 글자를 보고 전 군대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싸워, 3배나 많은 적을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 뒤로 황제와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황제는 의회에 기독교를 권하였으나 의회는 거절하였다.
당시 100만명의 로마를 이교도에서 기독교화 하려다가 실패하여, 새로운 종교도시를 만들려고 하였고, 또 확장되는 로마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교통과 해상교역의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완전히 로마식의 대도시로 건설하여, 새로운 종교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도시의 이름을 '신 로마(New Roma)'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이름보다 황제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의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현재지명은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모든 권력의 주체인 황제와 귀족이 떠난 로마시는 빈 도시가 되어, 서로마를 지키는 군사가 모자르게 되어 게르만족들의 남자로 채웠는데, 이것이 서로마가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 비잔틴으로의 수도 이전은,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나쁘게 이야기하면 정치에 기독교를 이용하였다고 어느 역사가는 말하나 ,기독교가 지금과 같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그의 공로이며, 하나님이 로마제국을 이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로마제국의 재건자로 높이 평가하여 대제라고도 부른다.
[4]게르만의 이동, 로마제국의 분열, 서로마제국의 멸망
테오도시우스(379-395) 1세: 라인강과 다뉴브강 쪽에 훈족이 침입하여 AD 376년에 서코트족이 정착할 땅을 찾아 남하하였고, 황제는 정착을 허락하였다.
AD 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하여, 이교도의 탄압과 로마 신전의 제사를 금하였다. 황제는 全 로마를 다스리는 마지막 황제이다.
AD 395년 황제가 죽은 뒤에, 로마는 동, 서로 분리되어 동쪽은 아르카디우스, 서쪽은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여 로마는 동, 서로 분리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로마는 410년 서고트족에 의해 함락되었고, 6년후 476년 반달족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1,000년 역사의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494년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탈리아를 재정복하였다.
568년 멀리 스칸디나비아에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이 침입하여, 대부분의 반도를 여러 개의 공작령으로 나누어 지배하다가, 프랑크 왕국에 속하였다.
한편 409년 서고트족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586년에 왕국을 건설하였고,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이 자리를 잡아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생겼다.
갈리아(현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영국은 5세기 중반에, 앵글족과 색슨족이 점령하였다.
428년 반달족은 스페인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반달족 왕국을 세워, 서로마와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였다.
동로마제국을 비쟌틴 제국이라고도 부르는데, 1453(BC753년부터)년 오스만 터키에게 망할 때까지 무려 약 2200년을 지속하였고, 신성로마까지 합하면 약 2650년간이나 지속된다.
[동로마제국의 역사는 비쟌틴 제국에서 다룬다]
독수리 이야기
로마제국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유럽에서 지배자들은 로마와 같은 제국을 누리고 싶어, 너도 나도 독수리 문장을 가지려고 하였다.
962년 독일의 오토대제는, 신성로마 황제가 되어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은 것이, 지금까지 독일의 상징이 되었다. 또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로 가게되어, 지금도 독수리 문장이 오스트리아에 전해져오고,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이었던 폴란드도 이 문장을 가지게 되었다.
신성로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은 스페인도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다.
러시아는 로마황제보다 2배나 존엄하고 위대하다고, 머리가 2개인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고, 로마 '카이사르'의 이름을 러시아 황제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차르'라고 하였다.
나폴레옹이 1806년 신성로마를 멸망시키고 황제에 오르고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였다.
미국도 로마제국을 닮고 싶은지 독수리를 대통령의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강대국에 속하는 영국은 사자를 문장으로 하고, 프랑스는 백합을 문장으로 하였다.
[5]유럽의 인종
여기서 역사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유럽의 인종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유럽 인종은 인도 아리안계로, 아리안(Ariyan)은 '고귀한' 뜻으로 이란, 인도에서는 '아리야'라고 하며, 이란인은 스스로는 아리야(Ariya)인이라고 한다.
아리안은 큰 의미로 인도와 유럽을 말하였으나, 지금은 인도에만 국한되어 사용한다.
유럽의 아리안 순수인종은 게르만의 노르딕인을 말하는데, 이들을 코카소이드(북유럽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오늘날 문화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우월주의로 종종 유색인을 멸시하고, 독일의 히틀러는 '비 아리안의 청소'를 부르짖으며 유대인과 짚시를 대량학살하였다.
현재는 유럽어의 어족(語族)으로 인종을 분리하여, 대개
라틴족,
게르만족,
슬라브족,
켈트족
등의 4부류로 분리한다.
여기서 제외되는 종족은 유대인, 아랍인, 집시, 바스크족, 몽고족 등이다.
(1)라틴족
라티움에서 유래하고, 낭만적이고 키가 작은 편이며 가정적이고 여자가 가정의 중심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살고 있으나, 프랑스는 인간잡종으로 남쪽은 동게르만의 부르군트인, 북쪽은 서게르만의 프랑크인이 살고있다.
스페인은 동게르만의 서코트 인이 살고있으며, 그 외에 포르투갈, 루마니아에도 살고있는데, 루마니아는 '로마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2)게르만족
키가 크고 엄숙하며, 고집이 세고 성질이 거칠다.
금발머리에 벽안(파란 눈)이며, 남자가 가정의 중심이고 아이와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로 여긴다.
본래 게르만 원시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유틀란트 반도와 북독일에 있었다.
AD375 아시아에서 *훈 족이 침입하여 동게르만의 코트인들이 대이동을 시작하여 각지에 게르만왕국을 세웠다.
게르만을 3부류의 종족으로 나누어 본다.
동게르만- 동코트인(이탈리아 점령), 서코트인(스페인 점령), *반달인(북아프리카 점령),
부르군트인(남프랑스 점령)
서게르만- 앵글로와 색슨(영국 점령), 아라만인, 프랑크인(서프랑크-프랑스, 동프랑크- 독일)
북게르만- 덴마크인(덴마크, 네덜란드), 노르만인(스웨덴, 노르웨이) 이동하지 않은 게르만이다.
*반달리즘(Vandalism)
반달리즘은 문화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5세기초 로마와 지중해 연안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반달족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점령당한 자들의 항거의 의지를 분쇄하기 위하여, 약탈과 문화재를 파괴하였다.
또 침략자들은 문화와 예술을 받아드리는 방법으로, 문화와 예술품을 약탈하거나, 또 임진왜란 때에 도공들이 끌러간 것같이, 문화와 예술에 종사하는 자들을 납치하여갔다.
약탈하지 못하는 것은 파괴하였는데, 파괴하기 손쉬운 팔, 다리, 목을 파괴하거나 불을 질렀다. 유럽의 박물관에서 팔, 다리, 머리가 없는 동상들이 많은 것은 반달리즘 때문이다.
(3)슬라브족
남자는 백색의 짧은 머리형, 여자는 흰 피부에 머리카락은 블론드(금발), 뚱뚱하고 키는 유럽의 중간인데, 현재의 동유럽인이다.
북아시아와 러시아, 폴란드, 첵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이 슬라브족이다.
서슬라브는 카톨릭교이고, 동남쪽의 일부는 동방정교회이며, 남쪽 일부는 회교도이다.
(4)켈트족
용감하고 게르만인과 비슷하며, 지금은 유럽에 동화되었으나 아일랜드가 유일한 켈트족이다.
한 때는 전 유럽을 휩쓸고 다녔고, BC4세기초에는 로마에 침공하여 포강 유역에 정착하였다. 로마의 시저가 쓴 '갈리아 전기'의 갈리아는 켈트족을 말한다.
전 유럽이 켈트어를 썼다고 하나, 로마의 라틴어가 정복하고 뒤이어 게르만어가 정복하여, 이제는 그 언어를 찾을 수 없다.
*훈 족
훈족은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해, 이후 140여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족이 한족에 쫓겨나 서쪽으로 간 것이 훈족이라고하는 것에는 학자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도 있으나, 흉노족이 훈족이라는 근거도 있다. 그 근거로,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기마민족(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성을 연장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만리장성 밖의 흉노족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을 근거로 한다. 사라진 이유는 흉노족이 AD350~390년 사이, 자연의 재해(추위와 가뭄)로 좋은 환경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텝루트(초원의 길)의 마지막 지역인 유럽의 헝가리까지 이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AD395년에 동게르만족의 동코트를 무찌르고, 서코트를 침략하므로 서코트인은 로마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의 대이동이라고 한다.
훈족은 전사(戰士)로서,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마상사수(馬上射手)들이었으며, 완벽한 승마술, 잔인한 공격과 예측을 불허하는 반격 능력, 그리고 전략적인 기동성 등으로 어떤 싸움에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헝가리 일대에서 자리잡아 동로마한테는 조공을 받았고, 게르만을 복종시켜 흑해연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이들은 국가라고 하기보다는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도적떼와 같았다.
서로마는 게르만과 연합하여 아틸라(제위, AD434-453)왕을 무찔렀다. 아틸라를 서구인들은 뿔 달린 도깨비로 여겼으며, 그가 갑자기 죽은 뒤 점점 쇠퇴하게 되어, 흑해쪽으로 이동하여 타민족과 혼혈하고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헝거리 사람들은 아틸라의 아들이 헝거리를 세웠다고 믿고 있다. 이후 역사는
게르만-롬바르드-프랑크왕국-신성로마 제국-도시국가-이탈리아
로 이어진다.
<비잔틴제국><이탈리아 중세, 현대> [출처] ★제3장 고대와 중세역사 :[2]로마(Rome) 制國|작성자 꽃가마연구원1
'지식.정보.시사.역사.과학.건강 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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